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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극히 싫어하시는 것

기사승인 2020.11.18  23: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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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안다는 것(예레미야 9,23-24; 누가복음 16,19-31)

▲ Leandro Bassano, 「The rich man and Lazarus」 ⓒGetty Image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피조물인 이 세상에서 그의 자취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그 앞에서 신비를 느끼고 겸허해집니다. 그는 그 경험을 하나님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그 이상의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사람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하나님인지 알려주시고 사람이 자기를 그렇게 알기를 기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 역사에 궤적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역사는 말씀과 행위로 구성됩니다. 시편 19편 기자는 이 두 가지 ‘말씀’을 하나의 시로 읊어낸 시인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말씀’과 성서에 기록된 ‘말씀’, 이 말씀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지요?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하시는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지만, 계약을 맺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해방을 경험한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 땅에서의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관계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으로서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다만 문제는 나를 알아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위해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것에 머물 때 관계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심을 몰랐습니다. 나는 제사가 아니라 인애를 원하고 번제보다는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호 6,8). 이스라엘은 제사에는 대단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정성을 들였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그랬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선호한 까닭은 그들이 인애하지 않고 심지어 정반대의 경향을 보이고 하나님을 몰라도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용서받을 수 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제사가 하나님에겐 참 불편했을 것입니다.

호세아 6장 8절은 사실 성서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인애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외면한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 주술행위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제사가 그 둘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그 역은 결코 아닙니다. 관계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수용할 때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것을, 힘이 센 사람은 힘을, 소유가 많은 사람을 소유를 자랑합니다.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많아도 이 세 범주 안에 다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자랑하려거든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하는 분임을 깨닫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요즘 같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많은 세상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은 이런 분임을 깨달았다고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서도 그렇게 말한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하고 놀림을 당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비기독교적 삶이 그러한 비난을 초래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관계없이 그러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요? 참으로 그러한 앎과 깨달음을 갖고 있다면, 그는 사람으로서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의 깨달음에 따라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으뜸으로 여기며 그는 그의 모든 것으로 그가 사는 곳을 사랑이 넘치고 정의와 공의가 있는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이러한 맥락에 따라 듣고 읽을 수 있습니다. 부자는 그의 부를 자랑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분인 줄 깨닫지 못했기에 그의 부를 그 분이 하시는 것처럼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나사로 같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이 그의 비극이었습니다. 그의 자랑인 부가 그에게는 독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 죽음 이후 역전된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이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고 언급했던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말씀의 역할에 관한 끝부분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주면 생각이 바뀌고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예언자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말씀에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이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그만큼 자기가 자랑할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이 정의와 공의인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 우리 속에 말씀이 뿌려지고 자리 잡고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시행하시는 분인 줄 깨닫고 삶의 방향을 그 깨달음에 맞춰 정하고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의 자랑거리들을 그 깨달음에 따라 사용하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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