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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권리가 먼저다

기사승인 2020.11.17  23: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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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에 맞서(누가복음 16:1~9)

오늘 본문말씀, 누가복음의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성서본문 가운데서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 가운데 난문입니다.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고, 그런 만큼 수없이 많은 해석이 엇갈리는 본문입니다.

본문을 단순히 줄여 말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불의한 사람이 칭찬을 받았다면 통상적으로 그 불의한 짓을 청산하고 회개했을 경우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 불의한 행위를 청산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비유의 줄거리를 보면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 몰래 사문서 위조를 해 채무자들의 빚을 감면해줬습니다. 그런데 칭찬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요?

주석가들도 이 본문 해석을 놓고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의 ‘슬기로운 행동’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해고될 위기에서 자신의 장래를 예비한 슬기로운 행위 말입니다. 그러나 사문서 위조를 하고 주인의 재산을 축낸 행위가 ‘슬기롭다’는 이유만으로 칭찬을 받는다면 이치에 합당할까요?

또 다른 해석은, 원금을 축낸 것은 아니고 자신의 재량권 안에서 이자만을 줄여주었을 뿐, 결국 주인의 재산을 축낸 것은 아니기에 그 슬기로운 행동이 칭찬받은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해석에는 더 그럴 듯한 근거가 뒷받침됩니다. 당시 이자를 금지하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이자를 탕감해줬고, 이로써 주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칭찬받을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도대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은 사연이 무엇일까요?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청지기가 불의한 것은 그의 주인과의 관계에서라는 점입니다. 주인에게는 뭔가 마땅치 않은 사람입니다. 본문말씀에는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슬기를 발휘한 것도 주인 몰래 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주인에게 칭찬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는 일관되게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칭찬을 받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모든 성서번역본은 그 종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당연히 전제하고 해석합니다. 앞서 말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이 다 그런 경우입니다. 해고 위기 앞에서 자기 미래를 대비한 영악한 행위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종이 단지 자기 재량권 범위 안에서 이자를 탕감해줬고, 그 행위가 주인의 원금 손실을 가져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을 율법에 위배되지 않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줬기에 칭찬을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면 정작 칭찬받아야 할 사람은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부자의 이야기로 읽혀야 할 것입니다. 비유의 결말은, 그 너그러운 주인을 본받으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일관되게 불의한 종이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마지막 교훈 역시 그 종의 행위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종을 칭찬한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하는 것을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종을 칭찬한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주님’ 곧 예수님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인’과 ‘주님’은 그리스 말로 같은 말이고, 이 대목의 ‘주인’을 ‘주님’으로 번역해도 원문에서 문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아야, 본문의 줄거리에서 납득되지 않는 칭찬의 이유를 해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원래 말씀하시고자 했던 뜻에 훨씬 가깝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째서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우리는 이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의 평소의 언행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소 언행은 현실의 질서를 바꾸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입니다. ‘지금 너희가 이렇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렇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 Marinus van Reymerswaele, 「Parable of the Unjust Steward」 (1540년경) ⓒWikimediaCommons

더욱이 오늘 본문이 놓인 문맥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은 계속 재물, 곧 소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재물, 곧 소유에 관한 세상의 철칙을 문제시하는 문맥에 이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맥락을 유념할 때, 오늘 본문의 비유는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항상 빚에 허덕여야 하는 현실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도 그런 상관관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자 하나면 세 동네가 망한다”는 우리 옛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 때문에 사회적 관계,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청지기의 행위는 바로 그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낸 데 이 청지기가 칭찬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칭찬받은 것은 자기가 살아갈 방도를 찾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 때문에 뒤틀린 사회적 관계, 인간관계를 바로잡은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두 번째 실마리를 찾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후문맥을 보면, 청중은 두 부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청중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되어 있고, 14절을 보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중으로, 한편에는 추종자들이 있고 한편에는 적대자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적대자들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맥을 통해 볼 때, 이 비유는 돈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사람을 부리기를 좋아하는, 곧 재물로 인간관계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세계를 문제시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보면 청지기가 칭찬 받은 까닭도 분명해집니다. 그는 불의한 재물 때문에 뒤틀린 인간관계를, 그 불의한 재물을 바르게 처분함으로써 바로 잡은 점이 칭찬받을 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빚 때문에 허덕여야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반응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빚진 죄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서의 상황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는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번역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구미어판 성서에는 그렇게 번역한 경우도 많습니다) ‘빚’과 ‘죄’는 유무상통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빚진 사람의 처지는 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러한 사람들의 속사정과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이렇게 인간관계가 뒤틀려서야 되겠느냐,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재물 때문에 인간관계가 뒤틀리는 일이 없다.’ 이 진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적대적인 관계를 친구관계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13일은 전태일 50주기 기일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인터뷰에 응하느라 계속해서 그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말을 했기에, 오늘은 중요한 한마디만을 새기고자 합니다. 전태일의 일기에 남겨진 말입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댓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의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이렇게 외쳤던 전태일의 절규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마치 하나의 기계부품처럼 대했던 사회상, 시대상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본을 소유하고 재물을 소유한 것이 인간마저 소유물로 삼아버리는 것을 허용하는 세대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태일이 탄식했던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바꾸는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반면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권과 생활권, 노동권은 아직도 온전히 보장되지 않은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오늘 비유의 말씀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삶의 권리는 재물의 소유 권리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 믿음이 살아 있어야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희망을 일궈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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