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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과의 만남 이후

기사승인 2020.11.10  16: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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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1

< 1 >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 위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34살의 수도사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이른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을 때, 그 망치 소리가 1600년 교회 역사의 터전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이 1,000년의 중세 역사의 끝을 알리는 조종이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 역사적 사건의 발단은 1506년에 착공된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 교황청이 푸거 가문의 은행에서 빌린 빚을 갚기 위해 ‘대사’를 판매한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본래 십자군 원정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함께 떠나지 않는 자가 돈을 지불함으로써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제 ‘대사’는 교황청의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대사’야말로 루터의 가톨릭교회 비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95개 조항’의 반박문으로 알려진 루터의 글은 주로 ‘대사’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테제는 “우리의 주님이자 선생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하신 때로부터 신자들은 일생에 걸쳐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 평생을 걸친 ‘회개’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교회도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지, 고해성사나 성직자가 인정하는 고백과 보속, ‘대사’의 구입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의 권한이나 교회법은 어떤 형벌도 감해줄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사면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대사를 발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21조).

대사를 설교하는 성직자들은 돈 통에 동전이 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날아오른다(27조)고 하지만, 늘어나는 것은 이득과 탐욕뿐,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하다(28조).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사면증이 없어도 죄와 벌로 부터 온전히 사면 받을 권리를 갖는다(36조).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이를 구하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 대사를 사는 것보다 좋다고 배워야 한다(43조). 그리고 마지막 95조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장된 평화가 아니라, 많은 역경을 통해서 천국에 들게 되리라 확신하여야 한다.”로 끝납니다.

‘보장된 평화’란 무엇일까요? 루터 당시에는 ‘대사’ 증서를 구입하는 것이었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말할 수 있는 ‘보장된 평화’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7,21-23).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개혁신앙은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 외에 어떤 구원의 보장도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2,12-13).

< 2 >

오늘 인물로 읽는 성경, 삭개오라는 인물을 탐구하는데, 굳이 종교개혁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이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고리가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순수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자가리아’의 줄인 말인 히브리어 ‘자카이’(Zakkay)의 헬라식 이름인데, 그의 이름은 세리장이라는 그의 직업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닙니다. ‘세리’들은 군대의 힘을 빌려, 납세자에게서 확보한 세금을 로마 당국에 정기적으로 보냈고, 그들 자신도 여기서 혜택을 누린 세금 징수자들입니다. 점령국에 협조하고 세금을 착취하는데다가 탐욕을 부린다하여 세리들은 유다 민중과 지도층에게서 경멸을 받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 Saint Andrew Bible Missal, 「Jesus and Zacchaeus」 (1962) ⓒGetty Image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일한 ‘여리고’는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사해 북쪽의 기름진 오아시스 지대에 있습니다. 기원전 7천 년 전부터 17개의 도시들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탐사 결과에 따르면, 여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였고, 중요한 무역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것은 그가 양심적으로 올바르게 생활을 했다기보다는 부패한 세리였음을 암시하는데,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키가 작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삭개오는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애썼다”(눅 19,3)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정말 큰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자기를 알아보고 증오를 표출할 수도 있는 대중들 사이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 없자, 키가 작은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갑니다”(눅 19,4).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또 다른 인물, 헤롯 왕은 예수님에게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지만, 삭개오가 ‘애써, 대중의 미움과 증오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나무 위로 올라가면서까지’ 예수님을 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소문, 그 수많은 소문들 가운데 어쩌면 그의 마음에 닿은 소문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알아보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몰랐지만,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알고 부르신 것으로 봐, 우리는 삭개오가 여리고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았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를 알아보신 예수님은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셔들였습니다”(눅 19,6).

도대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렇게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집 안으로 모셔 들이게 했을까요?

키가 작은 장애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는 것이 서러워서, 바리사이파 같은 지도층은 물론 민중들로부터도 증오와 미움의 대상인 세리가 된, 아니 세리의 장이 되어 악착스럽게 부를 축적한 자기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영역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로 전락한 자기 집에 묵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비아냥거리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 예수님에게서 그는 더욱 확신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임을.

삭개오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합니다.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눅 19,8). 삭개오의 행동은 당시 랍비들이 구제의 경우 소유의 20% 혹은 다음 해 수입의 20%를 나누어 주고, 착취 혹은 부당취득에 대한 보상도 20%를 덧붙여 주었던 당시의 규례(레위기 6,5: 민수기 5,6-7)에 비추어 보아도 율법의 요구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회개의 행동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행동, 결과로서의 행동이지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9)고 말씀하심으로써, 식민지 종주국 로마의 군사력에 힘입어 민중의 세금을 착취하여 같은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부유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잃어버린 자’가 된 삭개오, 유대인이기는 해도 세리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구원의 언약에서 소외당한 삭개오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변했습니다. 삭개오는 더 이상 이전의 삭개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삶이 변했지만, 그의 직업적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그의 직업, 세리장직을 버리고 제자가 되어 자기를 따르라고 요청하거나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여전히 여리고의 세리장이고, 작은 키가 커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변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과의 만남 이후(눅 19,10),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닙니다.

< 3 >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는 것’(눅 19,10)에 두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 5,32)고 하신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오셨습니다.”(마태 20,28).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정작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었던”(눅 9,58)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며”(마태 18,14),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눅 15,10)고 말씀하셨습니다.

키가 작은 세리장 삭개오는 열등감으로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켰고, 유대 사회는 세리인 그를 구원의 언약에서 배제시켜 그를 이스라엘의 잃은 자로 만들었지만, 세리와 죄인의 친구,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눈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으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시대의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십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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