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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분신, 한국 신학과 교회를 깨웠다

기사승인 2020.11.08  13: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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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인간선언과 그 신학적 메아리 ⑴

▲ 생전의 전태일 열사 ⓒGetty Image
이 글은 지난 11월5일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 <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 심포지엄에서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국민중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형묵 회장님의 발표문입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최형묵 회장님과 전태일재단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증언, 사건과 기억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댓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의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1)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밀려난 소외된 인간의 아픔을, 그 시대의 모순을 이렇듯 정확하게, 생생하게, 절실하게 지적한 표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2)
 
“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 그들의 가슴 속에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때까지 집단적인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을 고취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상징과 존경할 만한 전통이 없었던 한국의 노동계급에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또한 급속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문제가 산업영역에서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산업노동자들이 사회적 갈등과 사회변혁의 핵심세력으로서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3)

“청년 전태일군의 분신자살이 신학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 이것은 사건이 되었다. 먼저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으며, 죽은 듯했던 노동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70년에는 165건에 불과했던 노사분규가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71년에는 그 열배인 1,656건이나 발생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일각에서도 눈을 떠서 1971년 9월 도시빈민들의 발전을 위한 수도권도시선교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중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뛰는 자들이었다. 민중신학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증인으로 그 뒤를 잇게 된 것이다.”(4)

“전태일의 삶은 불의한 착취와 그 착취에 시달린 어린 생명들의 아픔을 한 몸에 흡수해버리고 그 착취와 아픔으로부터 삶의 해방하고자 했던 삶이다. ‘참 삶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은 이러한 속죄양의 희생에서 계시된다.”(5)

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71년 「동아일보」신년호가 밝힌 것처럼 6ㆍ25가 1950년대를 상징하고 4ㆍ19가 1960년대를 상징한다면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 한국의 문제를 상징하는 가장 뜻 깊은 사건이 되었다.(6) 1960년대 초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그 가시적 성과가 드러날 즈음 그 이면에 가려져 있던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상황이 전태일의 죽음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로부터 우리사회에서 노동문제가 전면에 부상하였고, 나아가 민중에 대한 인식이 새삼 본격화되었다. 노동자의 인간선언으로서 전태일 사건은 이후 도도히 이어진 민중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노동자의 인간선언에 대한 신학적 메아리

전태일이 죽은 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했던 노동자들, 학생과 지식인들, 종교인들이 움직였다.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청계피복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이후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다면…”,(7) 전태일의 그 호소에 응답한 학생들은 가장 먼저 나서 그 죽음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그 뜻을 기리는 장례를 주도하였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세상에 알린 『전태일 평전』의 탄생도 이 때 가장 먼저 나섰던 조영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생들과 더불어 종교인들 역시 발 빠르게 나섰다. 정작 전태일과 그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는 자살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하는 마당에 재야의 신ㆍ구교 성직자들이 함께 나서 11월 25일 합동추모식을 열었다.

이 때 김재준 목사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8)

이 고백은 전태일의 죽음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왕에 한국 기독교는 4ㆍ19의 충격으로부터 역사참여 전통을 회복하고, 또한 경제개발계획의 성과가 가시화되어 산업화의 문제가 노정되기 시작한 1960년대말 산업선교를 본격화하였지만,(9)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의 민중선교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민중선교의 중대한 기폭제로서 전태일 사건은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된 기왕의 민중선교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시켰다. 이는 한국 민중현실로부터 출발한 고유한 신학적 성찰을 촉발시켰고, 이로써 형성된 민중신학은 1970년대 이래로 한국 기독교 민중선교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전태일 사건은 한국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 민중신학의 선구인 안병무와 서남동이 그 신학적 성찰의 얼개를 엿보인 것이 1975년이었지만,(10) 그 성찰의 맹아는 1970년 전태일 사건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롯되었다. 바로 그해 1970년 12월『기독교사상』에는 당시 청년학생들과 함께 했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오재식의 의미심장한 글 한 편이 실렸다. “어떤 예수의 죽음 - 고(故) 전태일씨의 영전(靈前)에”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정작 본문에서는 ‘전태일’ 이름 석 자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예수의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자살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보수교회의 교리주의에 맞서, 죽음이 예견되는 길을 스스로 나서 맞이한 예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는지 반어법으로 되물으며 오히려 사회적 타살로서 전태일의 죽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 의미는 전태일의 삶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예수의 삶을 회상하는 내용에서 더욱 증폭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 전태일이 죽음 앞에서 어머니에게 전했던 그 말씀의 의미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11)

민중과 예수의 동일시를 핵심 요체로 하는 민중신학적 통찰은 바로 그 착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가 스스로 민중과 동일시하였다는 것은 복음서의 증언이 확인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예컨대 마태 25장 등), ‘예수운동’이라는 개념이 시사하듯이(12) 예수의 삶을 당대 민중운동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수용하는 기왕의 신학에서도 인정되어 왔다. 민중신학의 특이성은 오늘의 민중에게서 재현되는 예수를 발견한 데 있다. 그것은 곧 오늘의 민중사건을 구원사적 의미를 지닌 예수사건과 동일시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민중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개념으로서 ‘사건’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13) 그 의미를 특별히 강조한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그 개념을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에게서 빌려왔다. 불트만에게서 ‘사건(Ereignis)’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신적 구원 사건으로서,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불트만에게서 그 사건의 의미는 신앙을 통한 실존적 체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신앙을 통해 그 의미가 현재화될 때 오늘의 개별적인 주체에게 실존적으로 관계되는 것이었다.(14)

그러나 안병무는 그 사건의 의미를 역사적 지평에서 재해석하였다. 안병무는 특별히 민중 예수가 일으킨 사건을 주목한다.(15) 안병무는 예수를 개인적 인격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집단적 인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민중 예수’는 예수 그 자신이 민중을 대표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언제나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더불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와 민중은 분리되지 않는다. 한편은 주체가 되고 한편은 객체가 되는 관계가 아니다. 혼연일체로서 주체를 형성한다. 안병무는 혼연일체로서 그 주체가 일으킨 사건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을 찾는다. 그 사건은 2천 년 전 갈릴리 역사적 현장에서 일어난 유일회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화산맥이 분출하듯, 끊임없이 역사 가운데서 재현된다.

안병무가 전태일 사건을 서슴없이 예수사건이라 말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예수와 민중은 해방의 사건 안에서 하나가 된다. 안병무가 사건의 의미를 강조할 때 가장 중요한 초점은 민중의 자기초월의 성격이다. 안병무는 숱한 역사적 사건 안에서 민중이 자기초월을 하는 것을 본다고 역설했다. 전태일 사건의 경우, “자기 고통의 문제를 자기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승화시킨 데서 민중적 메시아상이 드러”난다고 보았다.(16) 그것은 전태일이 곧 메시아라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전태일 사건 안에 민중의 메시아적 역능이 현존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이 강조한 예수와 민중의 동일시는 이른바 존재론적 동일시와는 달리 철저하게 사건의 지평 안에서의 동일시를 뜻한다.

전태일 사건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형성된 민중신학은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것은 민중의 고난을 증언하는 데서 나아가 역사의 주체이자 메시아적 역할을 수행하는 민중을 주목한 것이다. 안병무와 함께 또 다른 민중신학의 정초자인 서남동은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의의를 이렇게 집약하였다. 곧, 민중은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ㆍ억압되어 천민ㆍ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17)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으로서 전태일 사건의 메아리는 이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사건이 함축하는 뜻을 이보다 더 심원하게 펼친 경우가 있을까? 그것은 그의 삶과 죽음이 갖는 숭고함(18)을 간파한 신학적 혜안의 결과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했던 주인공의 외침은 헛되지 않았다. 그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라고 할까?

그 부채의식은 연대의식으로 발전했고, 민중의 시대를 열어갈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노동자 자신들에게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된 것을 필두로(19) 노동자의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 일련의 변화는 1970-1980년대 민중의 시대를 이끌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50년, 그처럼 놀라운 각성과 성과가 있었지만 정작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과연 성취되었을까?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사회 여러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미주

(미주 1)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서울: 돌베개, 1983), 165.
(미주 2) 조영래,『전태일 평전』(서울: 전태일재단, 2020), 6.
(미주 3) 구해근 지음 / 신광영 옮김,『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12.
(미주 4) 안병무,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역사와 민중』, 안병무 전집 6 (서울: 한길사, 1993), 254-255.
(미주 5) 서남동,『민중신학의 탐구』, 개정증보판 (서울: 동연, 2018), 453.
(미주 6)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24.
(미주 7)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135.
(미주 8)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23.
(미주 9) 장숙경, 『산업선교, 그리고 1970년대 노동운동』 (서울: 선인, 2013).
(미주 10) 서남동, “예수ㆍ교회사ㆍ한국교회”, 『기독교사상』 (1975/2); 안병무, “민족ㆍ민중ㆍ교회”, 『기독교사상』(1975/4). 이 두 편의 글은 민중신학의 얼개를 보여준 최초의 글로 평가된다.
(미주 11) 송필경, “분신 그 이후”, 「건치신문」, 2020.6.23. 인터넷판 http://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553
(미주 12) Gerd Theissen 지음 / 조성호 옮김, 『예수 운동의 사회학』(서울: 종로서적, 1981).
(미주 13) 이하의 내용은 최형묵, “안병무의 민중신학 - 민중사건의 증언”, 『진보평론』 64(2015/여름)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이 글의 맥락에 따라 재구성하였다.
(미주 14) R. Bultmann, Kerygma und Mythos, Bd. I, Hamburg, 1967, 67; 김명수, 『안병무의 신학사상』(서울: 한울, 2011), 139 참조.
(미주 15) 민중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안병무가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특별히 그 의미를 집약한 것으로는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86-128 참조.
(미주 16)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16.
(미주 1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58.
(미주 18) 송필경, “우리 시대 가장 숭고한 이름, 전태일!”, 「건치신문」, 2020.4.20. 인터넷판 http://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305
(미주 19) 청계피복노조사편찬위원회 기획 / 안재성 씀, 『청계, 내 청춘 - 청계피복노조의 빛나는 기억』(서울: 돌베개, 2007).

최형묵 회장(한국민중신학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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