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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출 33:18-23; 롬 11:33-36; 눅 10:21-24)

기사승인 2020.10.23  17: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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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여덟째주일(2020.10.25.) 종교개혁주일/이단경계주일

1.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 비텐베르크 성당 앞 95개조 반박문과 루터

오늘은 종교개혁 503회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마르틴 루터(M. Luther)에 의하여 시작되어 현재 500여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개신교를 ‘개혁 교회(改革敎會, Reformed church)’라고 하는데,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을 개혁하며 나온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Reformata Ecclesia Semper Reformanda).” 왜냐하면 지상에서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개신교회를 보면, 개혁 할 것이 500여년 전 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도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코로나19 이후 개신교인 이미지

2020년 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종교들의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가톨릭이 30%, 불교가 25.2%의 신뢰를 받는 반면에 개신교는 18.9%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2009년에는 26.1%, 2013년에는 21.3%로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심각한 것은 이것은 코로나-19 사태 이전 조사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 일반국민들의 개신교 인식 조사 결과는 더 참담합니다. 코로나-19감염병에 대처하는 한국 개신교회의 태도로 인해 그 신뢰도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종교별 신뢰도 변화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가운데 63.3%가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더 나빠졌다’고 답했습니다. ‘더 좋아졌다’는 1.9%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개신교 신뢰도에 대해 ‘더 나빠졌다’는 응답 대다수가 젊은 세대와 학생인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반면, 불교와 가톨릭에 대한 신뢰도는 이전과 “비슷하다”는 응답이 각각 86.8%, 83.0%에 달해 코로나19 이후 큰 신뢰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천주교와 불교인은 ‘온화한(각 34.1% · 40.9%)’, ‘따뜻한(29.7% · 27.6%)’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했지만, 개신교인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정말 한국 개신교회가 개혁되지 않으면 교회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2.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 신음하는 히브리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시고, 또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드디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뒤에 숨어 계십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자각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 말씀을 통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등만 보았고, 서신서 로마서 말씀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양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뒤쪽부터 읽어야 의미가 제대로 파악이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3-24)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당신을 보는 이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예수님을 (여기서는 창조주 하나님이겠죠?)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계속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 볼까요? 22절 말씀만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눅 10:22)

예수께서 아버지와 동일 본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창조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신 예수님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결국 선지자와 임금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아들을 통해 깨달아야 하건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창조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3.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사실 오늘 구약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때문에 더 이상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을 버리지 마시고 동행을 요청하는 중보기도를 드려 마침내 하나님의 동행 약속을 받은 내용입니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7일 동안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무려 40일이라는 시간 동안 산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해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요청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그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이 모습을 목격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율법인 십계명 돌판을 던져 파괴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동행하셨지만 이들은 오히려 거짓된 우상을 섬기고 미신을 믿고 세상 제물을 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출 33:5)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정말 간절한 기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약조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재촉합니다. 그 재촉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모세의 이 말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9-20).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본 자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조차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셨지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모세에게 보여주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1-2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종 모세에게조차도 얼굴이 아니라 음성으로, 또한 뒷모습으로만 나타나셨습니다. 철저히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또 모든 것이 마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가 쉬 알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사실 로마서의 신앙의 실천에 해당되는 후반부인 11장의 내용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연결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없음으로 그들은 버림받았는가?” 그리고 바울은 이내 그 대답으로 “아니오!”를 외칩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받은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울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형벌의 분노’를 ‘자비의 분노’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2장 1절에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바울의 결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5.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형벌의 분노와 자비의 분노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속성을 양면성을 통해 파악합니다. 곧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과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입니다.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어두운 데 계시는, 없이 계신, 텅 빈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려는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사변에 대한 반대가 바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동시에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뿐이다(crux est sola nostra theologia).”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숨어계신, 곧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숨어 계시는 방법으로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옷을 입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들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루터에 의하면 이러한 십자가의 은총은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말씀 이외의 신비적 체험, 곧 꿈과 환상을 통하여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잘 아시겠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의 모토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뱅에 의해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합쳐져서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완성됩니다.

▲ 스위스에 설치된 종교개혁 기념물 왼쪽부터 종교개혁가 파렐, 칼빈, 베제, 녹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혐오와 배타성으로 똘똘 뭉친 바리새주의적 한국 개신교회에 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구약과 서신서 말씀과 같이 또한 자비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형벌의 분노(ira severitas)’와 ‘자비의 분노(ira misericordiae)’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자비의 분노입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인만이 계시된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식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의 모세가 그러했으며, 서신서 로마서의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곧 전염병 경제 위기, 대기근과 대재앙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또한 하나님은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과로로 택배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냐고 묻습니다. 검찰이 정치를 하고, 정당이 국민의 삶과 생존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기에 온 힘을 기울일 때, 하나님의 심판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좌절합니다.

의인 욥도 엄청난 재앙을 만나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그러나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형벌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라는 자비의 분노임을 깨닫고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이단경계주일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손쉽게 이단과 타협하거나, 세상의 정욕에 넘어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마 24:13)”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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