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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프란치스칸 전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20.10.16  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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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시대의 프란치스칸 작은형제회 ⑴

▲ 프란치스코 ⓒGetty Image

프란치스칸 수도회에 대해 과문한 사람이 큰 과제를 맡게 되어 명예이자 멍에로 생각한다. 글에 앞서 평소 본 수도회에 대해 갖고 있던 필자의 일천한 경험을 나눠야 될 듯싶다. 그래야 본 글을 쓰는 어렴풋한 이유가 밝혀질 것 같아서이다.

프란치스칸과의 인연의 시작

80년대 중반 바젤대학교 유학 시 첫 학기(1986년 3월) 세미나로 프란치스코 사상을 선택,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한 학기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프란치스코란 말과 롬바르트란 이름뿐이었다. 어느 강의 땐 성인의 이름은 들리지 않고 후자의 소리만 반복, 청취되었다. 롬바르트가 성인의 사상을 체계화시켜 후대에 전달한 학자란 사실을 강의 끝 무렵에서야 파악했으니 필자의 무지가 하늘을 닿았다.

이후 개신교 종교개혁사를 수강하면서 그것이 중세 가톨릭의 실재/유명론 논쟁에 잇대어 있음을 알았고 개체성을 강조한 둔스코투스가 프란치스칸인 것을 배우며 기뻐했다. 도미니칸 수도회와 결을 달리하며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했고 무엇보다 가난을 사랑했던 까닭이다. 이후 접한 남미 해방신학이 프랜치스칸 전통에 대한 재해석에서 비롯한 것에 놀랐고 현 교종께서도 이런 의식을 갖고 가톨릭교회를 치리하고 있으니 세상이 모두 그를 우러른다.

가난과 문화를 주제로 「복음의 기쁨」(미주 1)을 가슴 벅차하며 읽고 논문을 썼으며(2) 프란치스칸인 보프 신부의 신간 『오소서 성령이여』(미주 3)를 번역한 것도 모두 프란치스칸 전통에 대한 놀람과 감사로 인함이었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필자는 프란치스칸 사상이 어느 면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을 3백년 앞지를 수 있는 내적 동력을 지녔다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가난’을 조명하는 프란치스코의 신학적 전망은 로마화된 천년 가톨릭 전통을 쇄신할 충분한 여지를 지녔던 까닭이다.

하지만 모든 삶이 역설이듯이 본 수도원 또한 내적 모순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가난을 사랑한 수도회가 가장 많은 부를 획득했던 탓이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겠으나 지식이 일천한 사람들에겐 이율배반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필자가 공부하던 바젤 시,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 ‘barfuesser Platz’, 즉 맨발의 광장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성인께서 신조차 신지 않을 만큼 가난한 모습으로 바젤을 다녀간 이후 명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 가장 번화한 곳이 되었으니 바젤사람들은 이 광장에 들어 설 때마다 프란치스칸 수도회를 빗대어 삶의 모순을 언급하곤 했다. 하지만 어디 프란치스칸 수도회뿐이겠는가? 오늘의 기독교, 이 땅의 교회가 도무지 ‘처음처럼’ 되지 못했고 그리 될 생각도 없다. 불교 역시 다르지 않다. 절대 공(空, Sunjata)를 말했으나 종단 권력자들 속의 탐진치(貪嗔痴)는 속인(俗人)들 그 이상이다.

이런 점에서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창시한 감리교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정신이 사라질까를 걱정할 뿐이다.”(4) 산업혁명 시대 피폐한 민중을 구하고자 시작한 개혁운동이었으나 이 역시 허울 좋게 변해가자 말년의 웨슬리가 감리교를 향해 퍼부은 독설이었다.

이 점에서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시스 교종의 말씀은 더욱 과격했다. “교회 복음화 없이는 세상의 복음화 없다.” 오늘의 타락한 세상을 교회가 복음을 갖지 못한 반증이라 본 것이다. 우리들 내부가 변화되지 못하면 밖의 세상을 조금도 달리 만들 수 없다는 고언이겠다. 프란시스 성인의 이름을 빌어 자기 정체성을 내걸었기에 교종은 오늘의 교회를 향해 이렇듯 아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100년 역사를 눈앞에 둔 한국의 프란시스 작은 형제회도 이 점을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800년 전통의 서구 프란시스칸 전통을 수용하되 그것을 한국적으로 수용, 발전시키려는 고민도 건네 준 책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그렇다면 교회, 나아가 수도회가 먼저 복음化 되어야 한다는 말뜻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예수 모방을 넘어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의 정신, 예수의 십자가 상혼을 자신의 몸속에 새길 만큼 그렇게 신비적 합일의 삶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가난을 통해 예수와 하나 되는 이 길을 홀로 가는 것은 참으로 버겁다. 예수와 제자들의 공생애가 있었듯이 함께 살 때 가능할 수 있겠다. ‘혼자서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다’(5)란 말에서 보듯 어렵겠으나 공동체적 삶만이 이룰 수 있는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회칙을 지닌 수도회가 생겼고 작은 형제회가 이 땅에서 탄생되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창시한 아놀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수의 유언으로 읽었고 이것을 공동체를 일구라는 뜻으로 수용했다.(6) 그래서 그는 저명한 학자의 길을 뒷전으로 한 채 공동체를 만들었고 개신교 수도원 운동을 만개시켰다.

그렇다면 교회의 복음화란 공동체를 통해 청빈을 사랑하듯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이라 정의해도 좋겠다. 우리들 교회와 수도공동체가 이렇게 되어야 세상을 복음化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華嚴經』이 말하는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길과도 유사하다. 자신 속의 불성(하느님 형상)을 믿고 뜻을 이해한 후 그 삶을 실천하여 진리를 수행차원에서 증거 하도록 불교가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삶이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가난을 사랑하는 일이 성직자라 해서 절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회칙도 있고 의례도 생겨났으며 지속적인 자기 수행을 요청받고 있다. 허나 회칙은 때로 율법이 되어 자신을 옥죄이며 의례는 습관이 되기 십상이고 수행은 남과의 비교 속에서 경중을 따지게 된다. 상호 카리스마의 비교가 상처로 남아 공동체를 힘들게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필자는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가 자신들 최고 책임자를 여타 다른 명칭 대신 ‘관구봉사자’라 칭하는 것에 큰 감동이 되었다. 로마의 관제를 체화시킨 탓에 지도자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호칭은 개신교인들에게 낮설고 거북했으나 프란치스칸은 오롯이 ‘나는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왔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래도 공동체가 쉽지 않은 듯 읽혀졌다. 최근 20년 역사를 다룬 작은형제회 책자(7)에는 형제愛의 삶이 내실화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지금 밖에서는 크고 작은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당신 뒤를 i아가도 좋으니 이제 우리 더불어 살자’는 의식이 팽배해진 결과이다. 자율성, 진보성. 경쟁성만 갖고 인생을 사는 일이 고단해서일 것이다. ‘공감의 시대’(8)라 불릴 만큼 자타의 가격을 좁히려는 세간의 노력이 눈물겹다. 그럴수록 수도원 공동체는 시대정신을 이끌고 돌 볼 책무가 있다. 2037년 100주년을 앞둔 작은 형제회가 이 땅을 위해 공헌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수도원은 중세의 개념과는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칸 수도원이 지향했듯이 세상과의 결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사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수도 공동체가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JPIC 운동을 앞장 서 수행해온 한국 작은형제회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주지하듯 2020년은 서울대회(1990) 30년을 맞는 해로서 한국교회가 JPIC를 깊이 성찰할 시점이다. JPIC는 정의, 평화. 창조보전의 과제가 실현되지 않는 한 기독교의 구원(정신)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9)는 새로운 구원관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런 2020년의 해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기후 붕괴. 곧 재앙적 홍수에 처해 JPIC의 경고, ‘사실적 종말’의 위기를 절감하게 되었다.

홀로세를 인간세로, 급기야 자본세로 변질시켰다(10)는 문명 비판적 시각과 여실히 맞닥트려야 할 것이다. 하여 프란치스칸 정신이 사실적 종말에 처한 우리 시대를 위한 백신이 될 수 있을지를 신학자, 수도자들이 진지하게 성찰할 일이다. 따라서 소위 4개의 ‘탈’(脫), 즉 탈성장(자본). 탈인간. 탈세계화 그리고 탈종교 시대(11)에 이른 오늘 시점에서 ‘가난’을 내세운 프란치스칸 영성과 신학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를 외부자로서 본고에 힘껏 적시할 생각이다.

이런 계획 하에 본고는 다음 4단계를 거쳐 진행될 것이다. 첫 장에서는 프란치스칸 신학의 특징과 변별력을 가톨릭교회 내부(스콜라주의) 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 신학의 경향성과 견줘 정리할 것이며 둘째 장에서는 특별히 ‘가난’의 신학적, 실천(영성)적 의미를 4개의 ‘탈’(脫) 개념의 빛에서 재조명할 생각이다. 이어 세 번째 장에서는 이를 위한 수도 공동체로서 작은형제회의 내/외부적 과제를 적시할 것인 바, 각기 형제애와 JPIC의 실천을 주제 삼고자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프란치스칸 영성과 신학의 토착화를 위해 多夕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와의 접목 가능성을 살펴보겠다. 결론 장에서는 프란치스칸 공동체가 펜데믹 시대의 치유를 위한 생태백신의 지혜인 것을 강조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종교개혁의 동력이 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프란치스칸 전통, 무엇이 다른가? - 여타 신학유산과 비교하여

프란치스코의 사상은 당대 신학 범주로는 수용키 어려운 낯섦이 있었다.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 사상운동으로 종교 개혁적 측면을 지녔던 까닭이다. 복음서 속 예수 삶을 공동체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당시로서 낯선 여성 수도원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프란치스코가 교황권 범주에 머물렀지만 가난 자체를 기쁨으로 여긴 것은 동시대 수도원과 크게 변별된 지점이다. 노동과 부(富)의 관계를 넘어 가난 자체를 최고 덕목삼은 것은 동시대 도미니칸 수도원과의 차이라 하겠다.

이에 따른 신학역시 종래와 달리 구성되었던 바, 개신교 신학자의 눈에 신론, 곧 하느님 이해가 독특하게 여겨진다. 본 논의는 2장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서는 먼저 가톨릭 수도원의 생성과정 및 역사적 실상을 개괄하고 프란치스코 공동체 운동의 변별된 모습을 짧게 서술하겠다.

주지하듯 가톨릭 수도원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국교로 편입된 이후 이에 동조치 않는 성직자들, 사막의 교부라 불리는 이들의 활동에 기원을 두었다. 금욕주의를 표방했으나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서말씀에 따라 수도원에 재산을 기부하는 이들 탓에 수도원에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중세기에 접어들며 수도원 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며 발전했다. 여전히 사적소유 및 개별 혼(婚)을 불허하는 금욕적 공동생활을 추진했으나 손의 창조력(노동)을 강조하며 직조 업을 발전시켰고 생산조합을 통해 수도원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도원은 점차 착취적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12) 수도자가 아닌 타자의 노동으로 수도원이 경영되었던 탓이다. 수도원과 고위 성직자들 간의 은밀한 거래 역시 생겨났다. 이 모두는 경제적 지배권을 가진 교회가 가난을 말한 원시 그리스도교 정신을 왜곡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자 교회, 수도원을 향한 불만도 쌓여졌고 가난의 에토스에 신비주의가 더해져 새로운 미래를 향한 묵시적 환상 또한 싹트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나중이긴 하나 당대를 성령의 시대라 봤던 요아킴 피오레의 천년 왕국설이 바로 그 실상일 것이다.(13)

알다시피 프란시스코는 신흥 상인계급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생산된 직조물을 아랍 지역에 수출했고 발달된 아랍 문명의 문물을 가져와 유럽에서 판매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던 새로운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십자군 전쟁 후유증으로 나병환자들이 창궐한 현실을 목도했다. 이들 고통과 마주했던 프란시스코는 기사의 꿈을 접고 가난을 기쁨 삼는 ‘작은 형제회’를 창시했다. 부모로부터 받는 옷까지도 벗고 나환자들을 예수처럼 섬길 목적에서다. 아무리 비천할 지라도 이들 또한 하느님께 속한 존재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진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라 여겼다.(14) 이것이 후일 가난을 선(善)으로 보고 자신의 신론을 구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로써 신학을 목적론적, 인과론적, 도덕적 신증명의 학(學)으로 여긴 동시대의 스콜라주의와 출발점 자체가 달라 질 수 있었다.

따라서 ‘작은 형제회’는 이성 보다는 의지를, 보편보다는 개체에 역점을 둔 가톨릭교회 내의 이단아였다. 사변보다 실천이 중요했고 개개인의 삶이 언제든 보편에 앞서 있던 까닭이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구체적인 인간과 의지로서 관계하는 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죄를 앞세운 속죄론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더 중히 생각했다.(15) 이로써 인간의 보상을 요구한 스콜라주의 신학자 안셀무스 식의 대속론(Cur Deus Homo?)과 동이 서에서 멀듯 멀어졌다. 신적 보편성이 개체를 향한 신적 사랑의 의지를 대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 의지와 일치 시켰고 바울 사상을 ‘윤리적(사랑) 신비주의’로 정의했던 20세기 성서학자 A. 슈바이처를 연상할 수 있다. 철학과 신학 영역에서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앞세운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예수와 한 몸 이룬 프란치스코의 신비적 체험 역시 의지의 일치라 말할 수 있겠다.

이점에서 프란시스코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맹아를 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보편을 강조한 오캄과 달리 개체를 앞세운 둔스코투스의 유명론이 종교개혁의 모체란 말이 설득력 있다. 개신교 신학과의 연속성을 생각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프란치스코의 신학이 루터의 사상보다 더 급진적이고 시대적합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비록 인간을 ‘의인된 죄인’이라 봤으나 선(善)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봉건영주들 편에서 약자 농민을 부정했으며 무엇보다 ‘오직 믿음’이란 명제 하에서 실천력을 약화시켰던 탓이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긴 구속론을 강조했기에 그와의 의지적 일치, 신비적 합일의 경지가 애시당초 허용되지 않았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을 오히려 첫 번째 종교개혁자로 칭할 수 있는바 그런 기회를 살리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아쉽게 생각한다. 이는 지금 프란치스칸 수도회의 몫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영적 동반자 클라라와의 관계 역시 돋보이는 지점이다. 11년 연하로서 귀족신분을 버리고 여성으로서 공동체를 일궈 프란치스코 정신세계를 확장시켰던 놀라운 존재였다. 성차(性差)를 넘어선 이들 간의 영적 교감은 역사 속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통해 마리아의 현존을 확신했을 듯싶다.

주지하듯 그는 신모(神母) 마리아의 자리를 가장 정확하게 찾은 사람으로 평가된다.(16) 해방신학자 보프 역시 하느님의 영(靈)이 마리아 속에서 최초로 인격화되었음을 강조했다.(17)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과 예수를 어머니로 언표 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신 역시도 어머니로 묘사했다.

이렇듯 모성성의 강조는 실상 사랑의 실천력(의지)의 표현이겠다. 주지하듯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우리 역시 예수(아들)가 될 것, 아들을 낳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거울신학’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점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둘이면서 하나(不二)인 관계 속에 있다. 최근 서구 생태신학이 하느님 어머니의 은유를 사용하는 것도 세상과 하느님의 불이(不二)적 관계를 강조할 목적에서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신학의 백미는 형제애의 지평을 자연(피조물)에게까지 확장한데 있다. 자연신학에 근거했으나 그 지평을 훌쩍 뛰어 넘어섰던 까닭이다. 토미즘이 말란 신과 자연의 존재유비를 넘어 피조물 자체를 신적 계시로 본 것이다. 이는 현대 가톨릭 사상가 토마스 베리(Berry)의 견해와 흡사하다. 실재하는 모든 것 속에 육화된 예수가 존재한다고 했으니 말이다.(18) 신의 피조물 모두가 그 자체로 선(善)함을 적시한 것이다.

여기서 가난은 선이고 선은 창조이며 그것이 곧 구원임이 강조되었다.(19) 피조물이 속에 육화된 예수가 실재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태양 형제의 노래’가 프란시스코 사후,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진 것이라 알고 있으나 그의 생각을 족히 잘 담았다. 그는 동식물을 비롯한 일체 생명체가 인간처럼 의식을 지닌 것으로 여겼던 스승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는 인격적 방식으로 관계하지만 새와 지렁이에게도 각기 그들 방식대로 관계한다고 믿었다. 단지 인간은 그것을 모를 뿐이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기후붕괴와 팬데믹 시대에 이른 지금 반듯이 큰 시사점이 되면 좋겠다.

이렇듯 5가지 측면에서 약술한 프란치스칸 전통의 변별력은 결국 ‘하느님은 선(善)’이란 신학적 진술로 소급될 수 있다. 초기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의 특징도 이 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세상을 이처럼 아름답게 봤던 이들의 긍정성이 다소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차이를 낳은 프란치스칸 신학 유산을 살펴보고 오늘의 시각을 첨언하여 가난의 의미를 부언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교황문헌, 「복음의 기쁨」,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2014.
(미주 2) 이정배, “교회 복음화 없이 세상 복음화 없다”, <신학과 세계> 2015, 감리교신학대학교.
(미주 3) L. 보프, 『오소서 성령이여』, 이정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미주 4) 이 말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의 본 취지와 다르게 전개되는 감리교회를 보고 탄식하며 했던 말로 회자되고 있다. 전통과 역사의 이름으로 처음을 왜곡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미주 5) 조현,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도서출판 휴 2018, 244-263.
(미주 6) E. Arnold, 『공동체로 사는 이유』, 김순현 역, 비아토르 2019.
(미주 7)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 편, 『한국의 작은 형제들 1997-2017』,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2017. 1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미주 8) J. 리프킨, 『공감의 시대』, 이경남 역, 민음사 2010; 이정배, 『고독하라, 저항하라, 그리고 상상하라』, 동연 2014, 96-141; J. 리프킨, 『유로피안 드림』, 민음사 2009, 349, 407.
(미주 9) 이것은 JPIC를 발의한 공로로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수여 자리에서 폰 바에젝커가 말한 내용이다.
(미주 10) 클라이브 헤밀턴, 『인류세』, 정서진 역, 이상북스 2017, 16-67.
(미주 11) 여기서 말하는 4개의 탈(脫)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핵심용어를 일컫는다. 필자뿐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정배,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교회를 말한다, <농촌과 목회> 87, 2020년 가을, 26-34.
(미주 12) 칼 카우츠키, 『새로운 사회주의의 선구자들 - 루터와 뮌쩌를 중심하여』, 이승무 옮김, 동연 2018; 이정배, 『수도원 독서』, 신앙과 지성사 2019, 252-254. 이 책에서 저자는 수도원을 사회주의 시각에서 바라봤다.
(미주 13) 윌리함 쇼트, 『가난과 기쁨 - 프란치스칸 전통』, 김일득 모세 역,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7, 109.
(미주 14) 앞의 책, 45, 이점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일컬어졌다.
(미주 15) 앞의 책, 83 이하.
(미주 16) 프란치스칸 사상 연구소, 『아씨시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글』, 프란치스코 원전 01,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4, 50.
(미주 17) 보프, 『오소서 성령이여!』, 173-182.
(미주 18) 『가난과 기쁨 - 프란치스칸 전통』, 60 이하.
(미주 19) 『가난과 기쁨 - 프란치스칸 전통』, 60-70.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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