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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지지 마라

기사승인 2020.10.13  22: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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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체, 접촉, 성서 : 예비적 고찰 ⑵

지난 글에서는 매체의 문제를 숙고했다. 매체의 문제와 더불어 숙고할 주제 중 하나는 “접촉”이다. 자크 데리다(J. Derrida)는 접촉(touche)의 문제와 관련하여 낭시의 사유를 주목한다. 데리다는 『접촉, 장뤽 낭시(On Touching-Jean-Luc Nancy)』(1)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 멘 드 비랑, 라베송, 장 루이 크리스티엥 등을 언급한 뒤 다시 장뤽 낭시의 저작으로 되돌아 온다.”(2) 데리다의 칭송이 없더라도 장뤽 낭시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접촉에 대한 철학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낭시와 데리다에 의해서 진행되는 접촉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계속해서 사유되어야 할 주제이다. 이 글은 만남 및 접촉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를 연결해서 생각하려는 의도를 가지기 때문에 낭시의 글 가운데서 성서 해석과 관련된 부분을 참고하고자 한다. 낭시의 책 중 철학자의 시각에서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를 읽는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가 있다.

그는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지려 할 때 예수가 했던 말씀 “나를 만지지 마라”에 특별히 주목한다. 만짐은 접촉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사랑과 진리에 대한 철학을 묘사해 주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3)

장 뤽 낭시의 저서, 『나를 만지지 마라』

낭시는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에서 접촉의 모티브를 금지하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4) 접촉은 관능이나 폭력과 연관된다. “그는 기독교가 접촉의 종교, 감각의 종교, 몸과 마음에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를 발명했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5) 그렇다면 “나를 만지지 마라”는 말씀은 “예외의 신학적 유일 사례”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만지다(ἅπτομαι)라는 동사가 붙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는 말씀은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떠남을 막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그리스도의 “나를 만지지 마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멈춰 세우지 마라. 나를 붙잡거나 내게 다가오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또다시 죽음의 권능 그 자체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의 권능 속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이 봄날 아침에 저분의 밤의 광휘 속에 발을 딛는다. 이미 나는 떠나고 있다. 나는 오직 이 출발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떠남이라는 행위 속에서 떠나는 자이다. 내 존재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내 말은 이것이다: “나 진리는, 떠나간다(Moi, la verite, je pars)”(6)

낭시에게 예수는 사랑과 진리의 비유이자 상징이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는 떠나가는 것이며, 사랑과 진리를 대하는 진정한 태도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는 나를 만지지 마라는 말씀에서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7)는 메시지를 읽는다. 그는 또한 ““나를 붙들지 마라”는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 낭시가 말하는 만짐은 “동일화, 고정, 소유, 부동성”으로부터 벗어난 만짐이며 접촉이다.(8)

기독교의 해체에 골몰하는 낭시가 그 자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접촉의 종교”인 기독교를 해체하기 위해서 선택한 본문이 요한복음의 말씀인 “나를 만지지 마라”이다. 낭시에 따르면 접촉하고자 하는 욕망은 서구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러한 욕망은 성찬식의 축성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성찬식의 축성문 “이것은 내 몸이니”에 대해서 “신의 몸을 만지고 먹으려는, 그리고 그 몸으로서 있고 다만 그것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불안과 욕망이 서구의 이성(과 광기)의 원리를 구성한다”고 논평한다.(9) 그는 접촉의 종교, 심지어 접촉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인 기독교에서 접촉을 금지하는 본문인 “나를 만지지 마라”에서 기존의 기독교의 접촉의 방향을 해체하는 단초를 읽어낸다.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해석은 성서 본문에서 기존의 믿음의 이해와 달리 접촉하거나 촉지해서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유와 동일화를 떠난 방식으로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읽는다. 이러한 낭시의 해석은 기독교를 해체시키려는 의도와 달리 기독교의 진리의 일면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10) 낭시는 하나님의 지나감과 하나님의 떠나감을 잘 파악해 내었다. 기독교는 접촉을 추구하지만, 접촉을 통한 촉지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접촉을 통한 촉지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우상숭배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낭시의 글은 접촉의 광기와 접촉이 지닌 우상숭배적 위험을 간파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마가복음 접촉의 복음

마가복음을 보면 접촉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어떻게 보면 마가복음을 “접촉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접촉의 모습은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멀리함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거룩함의 개념과 대치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박노식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접촉이라는 단어는 200회 이상 등장하며(동사형은 150회, 명사형은 78회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정결례나 제의와 관련된 접촉의 금지와 관련되어 있다.(11) 이에 비해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면모를 보인다.

마가 내러티브를 살펴보면, 예수의 접촉하는 손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막1:29-31; 막1:40-45; 막5:35-43; 막6:1-6; 막7:31-37; 막8:22-26; 막9:14-29 등). 또한 예수와의 접촉의 사례가 상당히 많이 보도되고 있다. 예수는 처음에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환자의 손을 잡아 일으킨 예수의 이 몸의 접촉이야말로 환자의 몸을 회복시킨 것이다.”(12) 그리고 곧 이어 당시로서는 접촉해서는 안되는 나병환자를 만진다. 나병환자의 에피소드는 접촉과 관련한 복음서의 입장을 대변하는 범형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는 율법에 의거해 볼 때 접촉이 금지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접촉은 나병환자의 병을 낫게 한다.

조태연은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애끓는 연민의 마음과 몸의 접촉이 치유를 일으켰다고 해설한다.(13) 이를 “감염의 역류”(Holme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나병환자에게 엄중히 꾸짖는다. 여기에서 43절의 꾸짖으셨다(ἐμβριμησάμενος)는 말씀과 내쫓으셨다(ἐξέβαλεν)는 말씀은 비록 접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과 치유의 접촉이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14) 엄중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는 자신의 치유를 널리 전파하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는 매우 곤란해 졌다. 그리고 나병환자의 접촉 증언은 마가 내러티브에서 예기치 못한 효과를 유발시킨다. 이후의 내러티브에서 수많은 병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만지려고 노력하게 되었던 것이다(막3:10; 6:27; 6:56; 8:22; 10:13). 복음에서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만지려 한다. 접촉은 나병환자와 예수의 처지를 뒤바꾸어 놓는다. 나병환자는 접촉을 통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했지만, 예수는 접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부정적인 존재가 된다. 스쁘레아피꼬(A. Spreafico)는 나병환자 치유가 예수에게 “명백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다.(15)

마가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예수의 치유를 살펴보면, 원격 치유의 장면도 나오지만, 접촉의 방식이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나 향유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보면 접촉을 당하기도 한다. 향유부은 여인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다. 접촉을 금지당한 부정한 공간에 예수가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16) 그러나 여인의 급습과 여인이 예수를 접촉한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다. 여인의 행위는 어떤면에서는 폭력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접촉도 인정한다.

복음서에서 접촉이 치유와 기적을 불러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체로 접촉은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접촉이 그 자체로 복음서의 최종적인 대답은 아니다. 마가복음은 믿음을 강조한다. 접촉이 실제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면, 성서는 그 이상을 강조한다.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실제계를 초월하여 가능계와 잠재계로서의 실재로 도약하는 사건이다.

서신서와 접촉의 문제

바울 서신서를 보면, 서신은 사도의 현존을 대체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이 교회를 대면 접촉해서 만나려고 시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7-18) 이 글에서 사도는 대면 접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반면 종말론적인 적대 세력인 사탄은 대면 접촉을 막고 있다. 바울은 직접적인 대면 접촉이 막혔을 때 다른 사람(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디모데이며, 고린도후서에서는 디도다)을 파견하여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촉을 한다. 그의 서신도 간접적인 접촉의 일환이다.

요한서신도 접촉에 관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말씀에 대한 대면 접촉을 강조한다.(17) 요한일서의 저자는 로고스에 대한 육체적이며 직접적인 접촉과 관련하여 어떠한 거부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접촉은 증언의 기초가 되고, 증언은 직접적 접촉을 하지 못하고 전달받아 믿는 사람들까지 사귐으로 나아가게 한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장로는 매체를 통한 간접 접촉보다는 직접접촉을 더 선호함을 밝힌다. 장로는 요한이서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12)고 말하며, 요한삼서에서도 유사하게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요삼13-14)고 말한다. 요한서신의 장로는 (혹은 장로들은) 매체(종이, 먹, 붓)를 통해서 만나는 것보다 대면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여기에서 “대면”한다는 말은 προς στομα 입과 입을 맞대고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얼굴을 보기를 열정적으로 원했고, 요한서신의 장로가 종이, 먹, 그리고 붓으로 글쓰기를 하고자 하지 않고, 입으로 말하고자 했지만(직접적 접촉), 그들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매체를 통한 간접적 접촉). 그리고 그 매체(글)는 오늘날 성서가 되었다.

나가면서

기독교는 접촉의 종교다. 접촉을 중시하는 종교다. 낭시에 따르면 성찬식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먹으려고 하는 광기를 가진 종교다. 동시에 기독교는 접촉이 불가능할 때 매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접촉을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접촉의 종교이면서 동시에 매체의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활동, 수난, 부활이라는 복음의 사건이 있었고, 사도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은 오늘날 성서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직접적인 접촉이 막혔을 때 간접적인 접촉의 수단은 중요하다. 또한 성서는 매체지만 동시에 매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부언해야겠다.

간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란 무엇인가? 매체의 존재론적 위상은 복잡하다. 사실 실제성은 실재성의 표현이며, 매체는 그 실제성을 다시금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매체는 실제성만을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체는 잠재성을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존재론적인 논의를 활용하여 이를 보다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도식이 필요하다.

실재는 가장 포괄적인 지칭이다. 가능성도 잠재성도 실제성도 모두 실재성의 일부이다. 잠재성이 펼쳐져서 실제성이 된다. 실제성이 접히게 되면 잠재성이 된다. 실제성의 구성에서는 촉감이 중요하며 촉지가 중요하다. 매체는 실제성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해서 실제성을 극단적으로 재현하거나 심지어 실제성이 표현해주지 못한 것까지 밝혀주어 실재성을 더욱 개방시켜주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매체를 신체와 의식의 확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매체의 발달을 통한 새로운 개념의 접촉은 여전히 신체적 의식적 접촉에 속한다. 그러한 매체는 거부해야 할 사항이 아니다. 현재의 기술 발전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매체의 최종적인 발달 형태는 VR이다. 매체의 발달은 우리 시대에 주어진 더 확대된 새로운 빛과 선물이다.

접촉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접촉은 최종적인 대답이 아니다. 예수 당시 예수를 직접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예수를 직접 접촉하고 그를 믿는 사도들을 직접 접촉해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접촉을 통한 촉지의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접촉에는 가상과 왜곡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접촉은 최종적인 답이 될 수 없다. 접촉의 세계 너머에 믿음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직접 접촉이든 간접접촉이든 접촉은 믿음의 주요한 수단이다.

미주

(미주 1) J. Derrida, On Touching-Jean-Luc Nancy, Trans. by C. Irizarry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미주 2) B. Peeters,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변광배·김중현 역(서울: 그린비, 2019), 961.
(미주 3) J.-L. Nancy,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이만형·정과리 역(서울: 문학과지성사, 2018), 64.
(미주 4) Ibid. 25.
(미주 5) Ibid. 30.
(미주 6) Ibid. 35.
(미주 7) Ibid. 66.
(미주 8) Ibid. 88.
(미주 9) J.-L. Nancy,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역(서울: 문학과지성사, 2018), 10.
(미주 10) 낭시는 기독교를 해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데리다로부터 아직 너무 기독교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낭시도 지지 않고 데리다가 너무 랍비적이라고 응수했다. B. Peeters, op. cit., 963.
(미주 11) 박노식, “마가복음의 정결법 이슈: 시간, 공간, 접촉,” 신약논단 25, no. 3 (2018): 594.
(미주 12) 조태연, 예수 이야기 마가1: 복음의 시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68.
(미주 13) Ibid., 76.
(미주 14) 이 문제가 ‘메시아 비밀(Messiasgeheimnis)’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은 비교적 수용할만 하다. W. Wrede, 『윌리엄 브레데의 메시야의 비밀』, 최태관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18), 65-86 참조.
(미주 15) A. Spreafico, 마르코복음서: 첫 번째 복음서의 영성, 박요한 영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2), 68.
(미주 16) 이러한 기이하고 낯설며 충격적인 측면 때문에 주석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어 놓았다. 주석가들은 나병환자가 진짜 나병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별명이라고 보기도 하고, 이 나병환자는 에피소드가 일어나는 시점에서는 완치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미주 17) 요일1:1에서는 로고스를 부연 설명할 때  남성관계대명사(ὃς)가 아닌 중성관계대명사(ὃ)로 받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세상에 와서 육체를 입고 인격적인 존재가 된 예수 이전의 로고스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재현(계명대)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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