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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기사승인 2020.10.13  22: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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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운데 새겨진 하나님의 뜻(신명기 30:11~14)

오늘 우리는 모처럼 신명기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신명기는 이른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책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앞두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선포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신명기(Deutronomy)는 ‘두 번째 율법’ 또는 ‘거듭되는 율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과 구별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우리 말 번역 ‘신명기(申命記)’는 ‘가장 중요한 율법’이라는 뜻으로 오히려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줍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새로운 땅에서 지켜나가야 할 기본 법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구약성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일깨워줌으로써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구약성서를 꿸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여러 역사적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엮어져 있는 성서 안에서는 출애굽 하여 가나안 복지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선포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후대의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서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왕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유다 요시아 왕 때(주전 7세기) 성전에서 책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열하 22:11~13). 신명기의 원형, 나아가 오늘날 성서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책입니다. 왕과 신하들은 그 책을 발견하고, 선대에서부터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책을 발견하고 요시아 왕의 개혁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아 진척됩니다. 산당들을 철폐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여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불리어지고 그야말로 ‘종교’개혁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중대한 사회개혁을 함축한 조치였습니다. 산당을 철폐하고 성전을 정화하여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를 확립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조치가 아닙니다. 종교적 배타성을 강화한 조치가 아닙니다. 산당은 가나안 지역에 자리한 풍요종교의 제단을 뜻합니다. 풍요의 신, 번영의 신을 모시는 제단입니다. 그 번영의 신전을 일소하고 성전을 정화한 것은 해방의 하나님에 대한 복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빠진 백성을 경제정의의 세계로 인도한 것과 같은 의의를 지닙니다. 성장주의에 빠진 교회를 역사적 책임의식을 지닌 교회로 되돌린 것과 같은 의의를 지닙니다.

신명기에는 중요한 법조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명기 법전입니다(16~26장). 구약성서의 모든 율법이 그렇지만, 이 신명기 법전 역시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고리대부를 금지하고 무이자대부를 규정한다든지(15:7~11) 노동자의 임금체불을 해서는 안 된다(24:15)든지 하는 규정과 사유재산의 집중을 방지하는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보장하는 공동체의 질서를 규정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원 신명기의 종교적 관심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따른 요시아의 개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는 가운데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를 바로 잡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결에 더하여 신명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결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전 6세기의 포로기의 경험입니다.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여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시기의 경험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오늘날 전해진 성서의 개요가 형성되었습니다. 포로기 고난의 경험은 해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고난의 경험이 승화되어 놀라운 성서적 신앙과 그 세계관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모세의 선포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오늘 본문말씀은 그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포로기의 상황을 확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주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그 여러 민족 가운데로 흩으신 데서부터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30:2~3)

이 말씀은 포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고난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 앞선 전제입니다. 본문말씀 바로 앞 10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30: 10)

▲ James Tissot, 「모세가 멀리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다(Moses Sees the Promised Land from Afar)」 ⓒWikipedia

바로 여기에 덧붙여 오늘 본문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30:11~14)

아주 쉬운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은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의 종교적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고대 종교의 세계관 안에서 신탁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자만 그 뜻을 받아 전할 수 있었고, 험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만이 그 뜻을 받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뜻을 전해 받은 이의 특권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뜻은 전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특별한 경로를 거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습니다. 이 말이 함축하는 뜻이 뭘까요? 이 선포는 기본적으로 성서가 일관되게 일깨워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 하나님은 백성과 더불어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특권의 세계를 정당화하고 그 세계 안에 머물러 있는 신이 아니라, 그 특권의 세계에서 배제당하고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면서 이미 보여주셨고, 일깨워주셨고, 마음에 아로새겨 주어 입술로 이미 수없이 되뇔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실천하면 그만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누구든 저마다의 내면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것은 고대 종교의 세계에서 비약한 성서의 신앙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매우 간결명료한 신앙세계를 보여줍니다. 앞서 신명기 법전의 성격을 말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해방된 자유민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더불어 신명기는 유명한 역사신조(26:5~10)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시작하여, 억압과 해방의 경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햇곡식을 거둘 때마다 반복하라고 이릅니다. 땅의 소출을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 고백과 더불어 추수할 때는 반드시 낯선 이방인들과 더불어 그 기쁨을 나누라고 합니다. 나그네로서, 억압의 고통을 겪었던 그 기억을 되새기며 지금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주목하고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깨닫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고 오늘 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되새기면 어떤 의미가 될까요? 역사의식과 양심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면 보다 쉽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새겨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 그것이 내면의 빛으로 양심에 새겨진 진실을 따르는 것입니다. 별도의 신비한 언어를 사용해야 하나님의 뜻에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교훈을 따라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인간 삶의 길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째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소통의 능력을 상실하였을까요? 어째서 불신의 대상이 되고 걱정거리가 되었을까요? 자신들만의 배타적 세계 안에 갇혀 자기들만의 게토화된 언어를 사용하며 그것을 특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 기독교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이 더 잘 압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요,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 있고, 그 현실에서 깨달아 이미 우리의 내면 가운데 새겨져 있습니다.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이 일고 어떻게든 함께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도하고 말하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삶으로 구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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