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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만 따라온 이방인들

기사승인 2020.10.13  17: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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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8

< 1 >

동방박사와 빈들에 있던 목자들은 아기 예수 탄생의 첫 목격자였습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마 2,1-12)와 빈들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다가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목격한 목자들 이야기(눅 2,8-20)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춥고 가난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 교회를 따뜻하게 밝혔던 목가적인 동화로 남아 있습니다. 성탄절 연극에 출연하여 목자 역을 하거나 동방박사 역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기억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동방에서 온 박사가 몇 명인지, 동방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지, 박사라고 번역된 사람들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세 명의 동방박사들, 혹은 세 명의 왕들이 동쪽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가져온 예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라는 말로 미루어 추정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매우 나중에 만들어진 교회 전통입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동방박사 12명이 왔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12제자에 빗대어 추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왔다는 동방은 어느 나라인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이 유대인의 포로생활과 메시아 대망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바벨론에서 왔다는 추정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 ‘박사’로, 영어성경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wise men)로 번역된 동방박사들을 나타내는 단어는 ‘마기’(magi: 단수형은 magus)로서, 이 말에서 ‘마술사’(magician)이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마술사가 아닙니다. 이들은 일종의 종교적 인물로서, 초자연적인 실재와 접촉함으로써 얻게 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하늘의 징조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점성가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의 관심은 이들이 점성가나 마술사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에서 온 현자들이 예수의 빛에 이끌려오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증인이 유대의 헤롯 왕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아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대 백성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고 유대 사회의 밑바닥에 있던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당시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이나 죽음을 하늘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현상과 연관시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별,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던 별이 어떤 별이었는지를 과학적으로 밝혀보려고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11년경에 출현한 헬리 혜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기원전 5년에서 2년 사이에 특별히 밝은 빛을 내었던 천왕성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800년마다 한번 씩 만나는 목성과 토성의 결합으로 생겨난 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심입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별’, 윤동주의 서시(序詩),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이들은 별에 대한 과학적 탐구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별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 ),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그의 ‘연금술사’라는 작품 첫 장면에서도 양치기 소년이 등장합니다. 양털을 팔기 위해 도시로 나온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 주인을 기다리면서 햇볕이 잘 드는 담 벽 아래 책을 읽고 있는데, 주인집 딸, 안달루시아 풍의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묻습니다. ‘양치기들도 책을 읽을 줄 아네요!’ 산티아고가 말합니다. “양치기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책보다 양들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우리도 책에서보다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하나의 별이 생겼다가, 그가 죽으면 그 별도 사라진다는 생각, 특별히 큰 인물의 탄생과 결부된 별은 더욱 빛난다는 생각은 과학혁명 이전 시대의 무지한 몽상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 별을 따라 온 동방박사들 ⓒGetty Image

< 2 >

그러나 별과 함께 움직여온 동방박사의 등장은 헤롯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마 2,3),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학살당하는 슬픈 사건(마 2,16)을 촉발시켰습니다.

마태는 헤롯의 잔학한 유아 살해를 예레미야 예언서에 나오는 라헬의 슬픔(렘 31,15)과 연결시킵니다.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잃고 통곡하는 창세기의 이야기와(창 35,19; 48,7), 라헬의 무덤이 있고, 기원전 597년과 587년, 바벨론에 의해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던 길목에 있던 라마 지역을, 유대인들의 슬픈 운명의 기억과 결합시킨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방으로 끌려가는 자기 백성들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무덤에서 통곡하는 라헬을 상상했고, 마태는 헤롯의 유아 학살을 예언의 성취로 이해한 것입니다.

마태는 의식적으로 헤롯 왕과 아기 예수를 대립시킴으로써, 헤롯 왕의 지배로 표상되는 낡은 세계의 종말과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통치자란 말일까요?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미가의 예언이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 통치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고 합니다(마 2,6). 그런데 마태가 ‘다스린다’고 번역한 말은 본래 미가서에 의하면 주님의 백성을 ‘먹일 것’이라는 뜻입니다(미가 5,4). 메시아의 통치는 넓은 의미에서 공의와 사랑의 통치를, 구체적으로는 백성을 배부르게 ‘먹이는 것’입니다. 백성의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 채우는 지도자, 측근들의 배만 불리는 통치자가 있는 나라는 결국 망합니다.

또한 마태는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동방박사들과 대립시킵니다. 정작 시대의 표징을 읽고, 메시아의 도래를 예견해야 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시대의 표징을 읽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이들 권력에 기생하면서 기득권에 매몰되어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이방인인 동방박사들과 대립시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관습과 타성, 기득권 탐닉에 빠져서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오히려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본 것이지요.

우리 옛 말에도 ‘고향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한국사회를 더 잘 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나이든 사람은 젊은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아픈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부자가 볼 수 없는 것을 가난한 사람은 볼 수 있다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마 2,12)고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해치려는, 미래의 메시아를 살해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헤롯 왕의 교활한 음모를 알고 그들은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이지요. 아니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왔던 길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길을 갔음이 분명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미 이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빈들의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여전히 목자로 남아 있었겠지만,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이전의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움직이던 별이 머문 곳, 그 쏟아지는 별 빛 아래, 구유 안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배부르게 먹일 왕, 그 스스로 어둠 속에 있는 백성들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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