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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는 정말 악한 왕이었을까

기사승인 2020.10.11  15:4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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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으니까 버려지는 신앙(열왕기하 21:2-9)

▲ 「Manasseh’s repentance」 (역대기하 33:1-13, 1904) ⓒWikidpedia
2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3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4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5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6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7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8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셨으나 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일으킨 왕이 두 명 있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이 두 왕에 대한 열왕기의 평가는 다윗과 솔로몬에 필적할 정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도 종교 개혁을 일으켰지만, 그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개혁이 아닌 것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사울은 여러 고민거리가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 열왕기가 위대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왕이 므낫세입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치적인 종교 개혁을 다시 원점으로, 아니 원점 이하로 되돌립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상 목록에는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우상이 거의 다 나와 있습니다. 거대한 자연물 자체에 대한 신앙과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등장하는 우상을 제외한 모든 우상 목록입니다. 므낫세는 도대체 왜 이런 우상숭배를 시작한 것일까요?

우리는 므낫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와 성경의 평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왜 므낫세를 북왕국의 아합 이래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역사적 평가

므낫세가 왜 우상을 숭배했는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독립을 꾀했지만, 산헤립에 의한 침공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야기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당시 유다와 마찬가지로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바벨론과 교류를 맺기도 했지만, 이는 결국 훗날 바벨론에 의한 침략과 유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열왕기는 기록합니다.

히스기야 사망 당시 12세였던 므낫세는 분명 아시리아에 의해 왕으로 책봉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아시리아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가 왕위에 있던 동안 이집트 역시 아시리아의 후원을 받은 제26왕조가 세워집니다. 유다를 둘러싼 모든 지역이 아시리아 세력권 안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고학적으로 므낫세 통치기의 이스라엘을 살펴보면, 므낫세의 통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 어려움을 발견합니다. 히스기야 시절 산헤립에 의해 망가졌던 지역의 복구가 이루어졌고, 히스기야 시절 이상으로 발전된 건축 양상을 보입니다. 또 파괴된 지역의 복구와 함께 인구 정착과 증가도 발견됩니다.

아시리아 비문에서 므낫세는 충실하게 조공을 바친 왕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아수르바니팔이 이집트를 침공할 때 군사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므낫세가 다스리는 남왕국 유다는 아시리아에 충성스러운 속국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고, 전쟁에 패배한 나라는 승리한 나라의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말은 그 신을 섬기는 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므낫세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며 자신들의 충성을 나타냈습니다.

과거의 연구에서는 아시리아가 이러한 행위를 강제했다고 말해왔는데, 최근 아시리아 연구는 아시리아가 이를 강요하진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므낫세가 아시리아의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섬겼다면, 이는 므낫세가 아시리아에 보인 충성심일 뿐입니다.

또 최근 학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우상 목록 중 일월성신에 대한 숭배는 아시리아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일월성신 숭배는 가나안 토속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일반 대중을 의식한 탓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신앙을 빼앗긴 일반 대중을 신경썼기 때문에 므낫세는 일월성신에 대한 신앙도 허가합니다.

므낫세는 외부로는 아시리아에 충성을 다했고, 남유다 백성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며 그들의 신앙을 허용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므낫세는 좋은 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인지 므낫세는 열왕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가장 긴 기간인 55년 동안 유다를 통치합니다.

성경의 평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므낫세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역대기 역사가는 므낫세가 중간에 회개하였고, 그 회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기록합니다.

므낫세가 아시리아 왕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가 환난을 당하고 회개하였다는 역대기의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아수르바니팔 재위 당시 그의 동맹국 일부가 반역을 꾀한 일이 있었고, 이집트도 그 반역에 동참했습니다. 아수르바니팔은 반역을 꾀한 나라의 왕들을 모두 폐위시켰지만, 유일하게 이집트의 네코우 2세는 복권을 허락했습니다.

므낫세가 이 반역 집단에 동참했고 네코우 2세와 함께 복권되었는지 다른 기록이 전혀 없기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역대기의 기록이 맞다면 그는 아마 아시리아에 반역을 일으킨 무리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성경과 고고학이 보여주는 므낫세는 반역에 동참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시리아에 충성하면서 최대한 나라에 해가 끼치지 않도록 이끈 왕이 므낫세인데, 성경은 그를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남왕국 유다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분명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에는 아시리아 파벌, 신흥 바벨론 파벌, 이집트 파벌 등으로 갈라진 남왕국 권력 집단의 문제가 있습니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어딘가의 속국으로 살아야 나라가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므낫세 때에 강하게 심어졌을 가능성이 있기에, 성경의 역사가가 므낫세를 악하다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므낫세의 이야기를 보면서 성경을 기록한 역사가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던진 질문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 여전히 하나님만을 믿을 이유가 있는가?’입니다. 므낫세는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성전에 우상을 세웠을지언정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도 믿었고 국제적 상황에 따라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는 나라의 신들도 섬겼을 뿐입니다. 그가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 붙들고 의지할 수 있지는 않았냐고 묻습니다.

위대한 왕 히스기야와 요시야도 처음에는 므낫세와 마찬가지로 이방신들을 성전에 두었을 것입니다.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라는 생각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종교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다보면 하나님 믿으며 살 때보다 더 좋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기보다 때로는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빼앗기도 하는 삶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삶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기보다 악으로 대하는 편이 더 손쉬운 삶의 모습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본래 지켜오던 신앙의 자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감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 믿음도 조금씩 사라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굳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품게 됩니다.

코로나 이후 대면 예배가 금지되면서 많은 목회자가 고민하는 문제가 이런 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을 살면서 세상적인 모습으로 살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선으로 대하기보다 악으로 대해야 할 때도 있고, 누군가에게 거짓을 말해야 삶이 평탄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따르는 삶은 항상 변해가는 세상을 신경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는 삶입니다.

므낫세는 가장 긴 시간 유다를 다스린 왕이기에 어쩌면 훌륭한 왕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항상 외세의 눈치를 보며, 변해가는 국제 정세를 살피며 몸을 숙일 수밖에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질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키면 반란군이나 점령군은 무조건 남유다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최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런 삶을 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는 일은 중요하지만, 자기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는 세상 사람들의 틈 속에서 늘 조마조마한 삶을 살지는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늘 채워주시는 만큼의 은혜 속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므낫세와 같이 세상과 타협하여 가슴 졸이며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 날마다 희망과 평안을 얻었던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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