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비접촉 시대의 만남이란

기사승인 2020.09.30  16:51:08

공유
default_news_ad1

- 매체, 접촉, 성서 : 예비적 고찰 ⑴

▲ 코로나 위기 속 전세계적인 현상은 “언택트”(비대면)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Getty Image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접촉에 관한 논의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컨택트(contact)가 아닌 언컨택트(uncontact) 혹은 언택트(untact)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접촉/비접촉의 문제는 오늘날의 다양한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용섭은 현재를 언컨택트의 시대로 규정한다.

“우린 지금 ‘언컨택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1)

김용섭의 책에 나와 있는 언컨택트와 관련된 마인드 맵(mind map)을 보면, 언컨택트가 수많은 논의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래한 언택트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주제도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비접촉 만남의 문제이다. 언컨택트 사회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대는 비접촉 만남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물음을 유발시킨다. 비접촉 만남은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비접촉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매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비접촉 만남과 그러한 만남을 돕는 매체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어떠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대적 기술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새롭게 제기된 물음에 나름대로 응답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예비적인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준비작업은 비접촉 만남을 가능하게 한 매체(media)의 발달의 의미를 고찰하면서,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된 주된 물음은 ‘매체란 무엇인가?’이며, 매체는 실제(2)의 이미지나 보충물이지만 매체가 실제를 소외시키고, 실재의 자리를 찬탈하는 존재인가?(보드리야르)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확장인가?(맥루언) 매체의 가상성과 매체의 인간 확장성에 대한 방향 결정이 중요하다.

두 번째 준비작업은 접촉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에 대한 연구이다. 접촉과 관련하여 철학적 사유를 깊이 있게 전개하는 학자로 장-뤽 낭시(J.-L. Nancy)를 거론할 수 있다. 낭시의 사유에 자극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더 포괄적으로 연구한 데리다(J. Derrida)의 저서도 출판되어 있다.(3)

이 글에서는 접촉에 관한 논의에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낭시의 저서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접촉을 통해서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현대 철학자가 드문 만큼 접촉에 관한 인문학적 철학적 성찰과 관련해서는 낭시에게 귀 기울이고 낭시에게 배울 수 있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세 번째 준비작업은 성서학적 이해다. 성서가 접촉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접촉에 어떠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성서와 접촉의 문제를 논의한 연구가 많지 않다. 구약과 관련해서는 정중호의 “새로운 성서해석을 위한 촉각언어 연구”가 구약성서와 관련하여 접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별히 정중호는 성서가 “문자로 된 책이 아니라 가상현실에서 구현되는” 가상 성서(virtual bible)로 전환하기 위해서 성경의 촉각 언어를 연구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방대한 구약성서의 촉각 언어를 큰 틀에서 고찰하여 관련 문제를 발굴한다.(4)

신약성서와 관련해서는 접촉과 관련한 본문에서 석의적 논의들은 풍부하게 있지만, 접촉을 주제로 한 글은 많지 않다. 박노식이 마가복음의 접촉 이슈를 살펴보았지만 주로 정결법과 관련해서 고찰했으며, 접촉의 문제가 연구의 독자적인 주제는 아니었다.(5) 세 번째 준비작업과 관련하여 필자는 특히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신약성서에서 접촉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을 개관하고자 한다.

글의 결미에서는 성서 전체를 매체라는 차원에서 숙고하고자 한다. 성서는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성서는 그 말씀을 담고 있는 매체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성서는 영과 말씀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글이며 책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활용되는 매체다. 매체라는 관점에서 성서를 최종적으로 성찰하면서 접촉, 혹은 비접촉적 만남이라는 문제에 대한 준비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매체 이론을 통해 접촉의 문제 접근하기

최근 코로나 19 때문에 비접촉이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만남의 양상이 변화되고 있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는 가상공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만남의 양상은 변화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이러한 “가상공간”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6)을 생성시킨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통신 혁명 덕분이다. 소외 말하는 사이버 스페이스와 VR은 비접촉 만남의 차원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과거에도 원시적인 형태로 직접적인 현존을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으며 그 때문에 매체가 활용되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는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문화가 있었다. 이어서 문자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전자장치들인 전신과 전화가 개발되었다. 드디어 컴퓨터의 발전과 더불어 인터넷 메일이 출현했는데, e-mail에서 mail이라는 말이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듯 e-mail은 종이 편지가 또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신과 전화 계열의 발전은 화상통화나 화상 회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만남의 양상을 상당히 변화시키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만남 양상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체(media) 연구를 참조하면서 그 존재론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 발전이 매체의 문제를 통신의 차원을 넘어선 ‘실제’와 ‘현실’의 차원으로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진, 전화, 영화 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은 텔레비전의 발명이다. 전화와 텔레비전의 발전을 통해 시청각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해져 유사 실제를 만들기고 전달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나는 매체 연구에서 세 가지 대표적인 입장을 고려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매체를 통한 유사 실제에 대해서 경악하면서 극단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로는 귄터 안더스(G. Anders)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매체를 통한 유사 실제가 하나의 이미지요 모방이자 대체품임을 알지만, 오늘날의 시대에는 이미지가 실제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자는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이다. 매체를 통한 유사 실제를 인간의 확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사고의 대표자는 마샬 맥루언(M. McLuhan)이다.

▲ 귄터 안더스 ⓒGetty Image

첫 번째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귄터 안더스는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에서 텔레비전을 현상학을 분석했다. 여기에서 팬텀은 텔레비전에 비친 이미지를 말한다. 사실 우리가 매체를 통해서 만나는 것은 실재의 타자라기보다는 타자의 이미지다. 귄터 안더스는 길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1948년 어느 날 거리의 쇼 윈도우에서 잠시 TV를 본 후 평생 동안 다시 TV를 보지 않았다.”(7) 그가 텔레비전을 볼 때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나의 이미지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화면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유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가 만약에 화면에 비친다면 그 이미지는 나인가? 나의 일부인가? 내가 아닌가? 만약 화면에 비친 이미지도 나로 간주할 수 있다면 나는 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나의 이미지는 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화면에 비친 나의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을 규정하는 문제는 기술 발전의 속도가 심화되는 현대사회에서 결정적인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 쟝 보드리야르 ⓒGetty Image

두 번째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은 장 보드리야르다. 그는 매체를 통해서 이미지가 실재(reality)를 초과하는(hyper) 현상을 ‘초과-실재(hyper-reality)’라고 불렀으며 시뮬라시옹 이론을 개진했다. 하이퍼 리얼리티의 시대에는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된다는 주장에 따르면 화상에 비친 나의 이미지는 실제의 세계를 살고 있는 실제의(actual) 나보다 더 실제적인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사정이 가능해진 주된 이유는 매체에서의 복제와 재생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술 복제”를 통해서 이미지는 공간적인 제약을 뛰어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편재할 수 있게 되었고, 재생 기술의 발달을 통해서 시간이 지나도 반복 재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이미지와 실제의 관계를 과장되게 표현한 것 같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의 위상이 강화되고 실제의 위상이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방향을 강조하는 현대 사유의 방향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 세계(actual world)마저도 그저 해상도가 높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지와 실제는 큰 차이가 없는 관계, 정도의 차이를 가지는 관계일 뿐인가? 실제는 이미지보다 해상도가 높을 뿐이기 때문에, 이미지로 만나는 것은 실제와 진정한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서 실제의 존재론적 위상이 하락하고,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이 크게 상승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지는 저장과 반복 재생에 있어서는 실제보다 더 뛰어나다. 실제의 만남은 스쳐 지나가고 기억에 남을 뿐인 것이 비해 영상이나 화상은 보존이 훨씬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내 이미지가 영상물에 남아 있다면, 실제의 나는 사라지더라도 그 이미지는 매체를 통해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가면 실제의 나는 사라지더라도 나의 이미지는 나 보다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오래된 매체인 책에서도 나타났다. 저자가 책을 쓰지만 책은 저자를 소외시킨다. 책을 쓴 저자는 내가 책을 썼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가면 내가 책의 독자가 되고 나도 내 책에 대해서 낯설어지게 된다. 독자들은 책을 통해서 저자를 추정하고, 그렇게 그려진 저자의 이미지는 실제 저자보다 사회에 더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 뿐 아니다. 저자가 죽은 후에도 책은 여전히 남아 있다.(8) 그래서 미셸 푸코(M. Foucault)는 책이 진짜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얼마 후면 죽고 사라지지만 책은 계속되기 때문에, 책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이다.

▲ 마샬 맥루한 ⓒGetty Image

세 번째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은 마샬 맥루언이다.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하여 맥루언은 상당히 중요하다. 맥루언은 매체를 기본적으로 인간과 의식의 확장으로 보며, 촉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매체 연구가이기 때문이다. 맥루언은 오감이 조화되는 상태를 촉각성(tactility)로 규정한다. 이는 촉각적(tactile)이라기 보다는 촉지적(haptic)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맥루언은 이러한 촉각적-촉지적 성격을 강조해서 “미디어는 마사지다”라고 말한다.(9) 전통적인 사유에서는 감성을 무시하고 지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감성 가운데서도 시각과 청각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나머지 감각은 무시를 당했다.(10)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맥루언이 오감의 조화를 촉각에서 찾았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지닌다.

비접촉적 만남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크다. 비접촉적 만남은 실제의 모방과의 간접 접촉이라는 방식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으므로 매체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매체가 실제를 일부 전달하는지, 실제를 왜곡하는지, 인간의 확장인지, 매체는 실재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되다는 의미에서 가상(假像 - 거짓된 이미지)인지 깊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왜곡과 가상의 위험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의 일부를 전달하면서 인간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도 매체의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실재에 속한다고 본다.

미주

(미주 1) 김용섭, 『언컨택트: 더 많은 연결을 위한 새로운 시대 진화 코드』 (서울: 퍼블리온, 2020), 7.
(미주 2) 이 글에서 실제와 실재는 actuality와 reality의 번역어이다. 최근의 경향에 따르면 actuality는 현실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경우에 reality도 현실로 번역되는 경향을 띠게 되어, 이 글에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급적 현실이라는 말의 사용을 지양하고, 실제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미주 3) J. Derrida, On Touching: Jean-Luc Nancy, Translated by C. Irizarry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미주 4) 이상, 정중호, “새로운 성서해석을 위한 촉각언어 연구,” 「구약논단」 16 (2004): 77-99; 정중호, 『가상현실 시대를 위한 새로운 성경해석』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2007) 참조.
(미주 5) 박노식, “마가복음의 정결법 이슈: 시간, 공간, 접촉,” 「신약논단」 25, no. 3 (2018): 581-613.
(미주 6) virtual reality는 흔히 가상 현실로 번역된다. 하지만 용어의 심층적인 차원을 고려해보면 가상 현실이라는 번역어로 담지 못하는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virtual이라는 말은 ‘가상적’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잠재적’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정중호는 피에르 레비(Pierre Levy)를 따라서 virtual이라는 말이 ‘거짓된,’ ‘허상의’라는 의미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virtual이라는 말은 라틴어 virtus라는 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잠재된 힘의 상태’로서 진취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정중호는 “가상성과 현실성은 존재의 두 가지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이상, 정중호, 가상현실 시대를 위한 새로운 성경해석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2007), 25; 철학자 질 들뢰즈(G. Deleuze)도 현대 철학에서 잠재성(virtuality)의 차원을 심화 발전시켰다. 그에게 실재(reality)란 잠재성(virtuality)과 실제성(actuality)로 이루어져 있으며, 잠재성이 더 중요다고 보았다. 잠재적인 것은 실제에 비해서 열등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잠존하고(subsist) 있던 것이 순간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 철학에서 잠재성의 발견이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만, 잠재성 뿐 아니라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서 존재에 대한 사유를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정우, 『사건의 철학』 (서울: 그린비, 2016), 211-215.
(미주 7) 진중권, 『진중권 미디어 이론』 (진량: 열린길, 2016), 108.
(미주 8) 발터 옹(W. Ong)에 따르면 구술은 삶과 연관되어 있고, 글쓰기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옹의 테제에 영향을 받아 이를 성서학적으로 발전시킨 학자로는 켈버를 들 수 있다. W. J. Ong,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이기우·임명진 역 (서울: 문예출판사, 2000); W. Kelber, The Oral and The Written Gospel: The Hermeneutics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Syoptic Tradition, Mark, Paul and Q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미주 9) 진중권, op. cit., 70-71.
(미주 10) 플라톤의 『히피아스 Ⅰ』을 보면, 다른 감각보다 시각과 청각을 우위에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 『플라톤전집 Ⅶ』, 천병희 옮김 (파주: 도서출판 숲, 2019), 165-177.

김재현(계명대) verticalkjh@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