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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것이고, 죽고, 쓰러지고, 죽을 것이다”

기사승인 2020.09.29  01: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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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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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6세기, 유다는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아시리아와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빈번한 외침과 줄타기 외교, 경제위기와 사회적 양극화, 극에 달한 우상숭배, 역모와 암살, 정치적 불안정으로, “죄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예루살렘이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왕하 21,16-23 등).

이 때, 암살당한 부친 아몬 왕(642-640 BCE)을 이어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640-609 BCE)는 31년 동안의 통치기에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했습니다. 지방 신당들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파괴하고, 율법과 유월절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성서는 요시야 왕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왕하 23,25)고 합니다.

그러나 개혁도 잠시, 요시야를 이은 스물 세 살의 여호아하스(609 BCE)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고, 왕 위에 오른 지 겨우 세 달도 되지 않아, 이집트의 바로 느고 2세(610-594 BCE)에게 사로잡혀 엄청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이집트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느고 2세는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609-598 BCE)으로 이름을 바꿔 새 왕으로 임명합니다(왕하 23,31-34). 여호야김 왕은 이름까지 바뀌는 치욕에 더해, 이집트에 바칠 금과 은을 모으기 위해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했습니다(왕하 23,35).

이 때, 주전 605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605/4-562 BCE)이 갈그미스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유다를 침략합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삼 년 동안 느부갓네살 왕을 섬깁니다. 조공을 바치면서 눈치를 봐야 할 강대국이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바빌로니아, 두 나라가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여호야김 왕은 이집트와 손을 잡고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서 반역을 시도했으나(겔 17,15), 결과는 참혹한 참패였습니다.

바빌로니아의 포위공격 기간에 사망한 여호야김을 이은 여호야긴(598/7 BCE)은 열여덟 살에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채 안되었을 때, 바빌로니아 왕이 다시 침략, 주전 597년,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보물들을 탈취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 일부만 남겨놓고, 모든 주민과 관리와 용사, 기술자와 대장장이, 여호야긴 왕과 그의 어머니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고관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왕하 24,13-15). 이것이 첫 번째 추방이었습니다.

< 2 >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었던 에스겔(Ezekiel: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강하게 붙잡으신다’는 뜻)도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정착지, 텔아빕(Tel-abib), 그발(Kebar) 강가에서 에스겔은 조국의 파멸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유배의 충격으로 “괴롭고 분통이 터지는 심정에 잠겨”(겔 3,14),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습니다”(겔 3,15).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의 영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셨고, 그는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벙어리가 됩니다(겔 3,26). 말을 못하게 된 에스겔은 온 몸으로 상징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밧줄로 몸을 묶고 누워 390일 동안 쇠똥에 구운 빵을 먹음으로써, 39년 동안 유다 백성이 겪게 될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또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삼분의 일씩 태우고, 칼로 내려치고, 바람에 흩어지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징 행위는 유다 백성 삼분의 일이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죽을 것을, 또 삼분의 일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을, 나머지 삼분의 일은 쫓겨나가게 될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문이 터진 에스겔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외침니다: “아, 이스라엘 족속이 온갖 흉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모두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 때문에 쓰러질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은 전염병에 걸려서 죽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쓰러지고, 아직도 살아남아서 포위된 사람들은 굶어서 죽을 것이다. 내가 이와 같이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 모두 쏟아 놓겠다”(겔 6,11-12).

▲ Francisco Collantes, 「에스겔이 본 환상(The Vision of Ezekiel)」 (1630) ⓒGetty Image

< 3 >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과 함께) 가운데 한 사람인 에스겔도 비운의 예언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주전 593년부터 571년까지 활동하면서 자기 백성에게 행복과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재앙과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고통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멸망해 가는데, 사람들이 예언자에게 묵시를 구해도 얻지 못하고, 제사장들은 가르쳐 줄 율법이 없고, 장로들에게는 지혜가 사라졌습니다.

왕은 통곡하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겔 7,26-27), 거짓 예언자들은 폐허 더미에 있는 여우처럼(겔 13,4), 헛된 환상과 속이는 점괘를 보면서(겔 13,7), 무엇 하나 잘 되는 것이 없는데도 잘 되어 간다고 백성을 속였습니다(겔 13,10). 전혀 평화가 없는데도 예루살렘에 대하여 평화의 환상을 보았다며 귀환을 약속합니다(겔 13,16).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과 달리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고(겔 15,6-7),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통렬하게 비난합니다(겔 6,1-6).

바로 이 때,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한 곤궁에 빠졌을 때, 성전이 파괴되고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 모두 흩어졌을 때, 예언자 에스겔은 두 가지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첫 번째 환상은 골짜기에 가득 찬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역사의 죽음에서부터 부활하는 것이었고(겔 37,1-14), 두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메시아적 왕의 통치하에 통일되는 것이었습니다(겔 37,15-28).

예언자 에스겔이 들은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두 개의 나무를 들어 한 나무 막대기 위에는 ‘유다’의 이름을, 다른 나무 막대기 위에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써야 합니다. 이것은 두 왕국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무 막대기는 두 나라 왕들의 지배를 상징하는 지팡이입니다. 예언자는 이 두 개의 나무 막대기가 하나가 되도록 붙여야 합니다. 유다라는 막대기와 요셉이라는 두 개의 막대기로부터 하나의 막대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녀를, 옛날에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 것처럼, 분단에서부터 다시 끌어내 하나의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이 범죄한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겔 37,22-23).

예언자 에스겔의 이 환상은 두 개의 통일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과 그 백성을 해방하시는 하나님과의 통일이 그 하나이고, 분단된 두 백성의 통일이 다른 하나의 통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방인의 손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을 ‘함께 모으심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정결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마침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자기 백성과 하나 됨을 이룩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과 백성의 수직적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하나님과의 수직적 통일이 이루어져야, 분단된 민족의 수평적 통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통일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민족의 수평적 통일은 한 민족이 다른 편을 흡수하거나, 한 편이 굴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통일과 다릅니다. 에스겔이 하나로 만든 두 개의 막대기는 각자 자기의 고유한 성격과 특수한 형태를 아직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서로 다른 막대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막대기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의 두 백성, 두 개의 왕국이 새로운 메시아적 왕의 통일된 메시아적 백성이 됩니다. 북 왕국이 남 왕국에 흡수되는 것도 아니고, 남 왕국이 북 왕국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두 왕국으로부터 메시아적 희망을 가진 새롭게 하나 된 백성, 새로운 하나의 나라가 생깁니다.

< 4 >

이스라엘의 통일에 대한 예언자 에스겔의 환상은 그렇다면, 분단된 우리나라에 어떤 비전을 줄까요? 남과 북으로의 분단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촛불과 태극기 부대, 성(性)과 세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 수저’와 ‘흙 수저’ 등으로 산산이 분열된 한국 사회의 통합에 어떤 비전을 줄까요?

첫째, 수평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수직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에스겔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처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사회의 온 갓 형태의 우상들로부터 떠나야 하며, 죄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시장지상주의’, ‘배금주의’입니다. 사람들이 주변을 맴 돌면서 춤을 추는 황금의 송아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시장에서 소외된 사람들, 현대적 우상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회복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통일입니다.

둘째, 우리 민족의 수평적 통일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통일에서 시작할 때에만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동쪽의 우상을 내세워서 서쪽의 우상을 파괴하고, 남쪽의 체제를 내세워서 북쪽의 체제를 추방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경멸에 대해 증오로, 증오에 대해 경멸로 대응하고, 악마를 다른 악마의 힘으로 추방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통일, 진정한 통합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을 때 가능합니다.

이런 진정한 통일, 진정한 통합 모델을 예언자 에스겔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은 메시아적 백성은 주님의 규례를 지키며 살고, 주님의 율례를 지켜 실천함으로써(겔 37,24), 새로운 통합 모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른바 ‘제3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과거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만들기가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동시에 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우리가 지금 부딪치고 있는 세계의 무섭고 빠른 변화와 도전은 과거의 어떤 경험과 모델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백성, 메시아적 희망을 가진 신앙공동체는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된 일치’를 실천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세계 만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신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겔 37,28).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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