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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통하여”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기사승인 2020.09.26  17: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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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의 ⑴

▲ 칭의론은 그리스도교가 서고 넘어지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Getty Image

칼빈은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삶, 곧 성화를 논하고, 『기독교강요』 제3권 제11장에서부터는 ‘칭의’를 다룹니다. 원래 ‘칭의’라는 용어는 재판정에서 사용하던 용어인데, 죄인을 ‘풀어주다’ 혹은 ‘의롭다고 선고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법적으로 고발당한 사람에게 재판관이 법정에서 무 죄를 선고함으로써 그 사람이 무죄한 사람으로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을 가리켜서 칭의라고 했습니다.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죄된 인간의 의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그렇게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상당히 오래전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세라(엘리자베스 슈)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벤은 알콜 중독자였고, 그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되고, 삶의 마지막을 쾌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보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도박을 하다가, 새벽에 도박장을 나온 벤은 길거리 여자 세라를 만납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벤이 죽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이제껏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영화의 엔딩 장면이었습니다. 세라는 벤이 죽어 누워 있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자막으로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때, 다음과 같은 세라의 독백이 자막에 나타납니다. “나는 그의 모습 그대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습니다. 난 그가 변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정말 진실로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이 찬송가 214장의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라는 가사입니다.

세라의 독백이 순간적으로 칭의의 놀라운 사실을 떠올리게 했던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에 맞는 사람들만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다면, 세상 어느 누가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칭의는 하나님께서 “내 모습 그대로”, 우리가 변화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 성격, 성품 그대로 우리를 인정하고 용납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신학 교리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교리입니까? 교회 강단에서 이 칭의의 복음은 언제나 힘차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칭의의 복음이 울려 퍼질 때, 동시에 그것과 함께 성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화보다 칭의를 뒤에,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복음서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르셨는데,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와 그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막 2:1-11).

그러자 곧바로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을 들고 걸어갑니다(막2:12). 죄 용서의 선언이 앞서 있고, 그와 동시에 죄의 용서에 토대를 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칭의에 대해 말하지만, 칭의는 결코 성화와 별도로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입니다(고전 1:30, 6:11). 우리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칭의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를 따르는 여타의 교의학 저서들에서는 칭의가 성화에 앞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가 방금 확인했듯이 자연스러운 배열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칭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신자야말로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연 스럽게 성화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화를 먼저 논하고 그 뒤에 칭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우선 종교개혁자들은 사랑과 선행이 결여된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로마교회의 비판에 대하여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의”를 주장한 로마 교회의 칭의 신학에 맞서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보다 신학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III.xi.1).

흔히 칭의를 말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칼빈이 여기서 “믿음을 통하여”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과 개혁교회 신학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의론은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칼빈의 칭의론의 내용은 루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칼빈도 칭의론이 죄된 인간의 구원의 토대가 되고 참된 경건을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믿음을 칭의론의 중심으로 본 반면에, 칼빈에게서 믿음은 결코 칭의론의 중심이 아닙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게 한다면, 신앙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게 여기는 일을 부분적으로 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 할 것이다(III.xi.7).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칼빈은 엄격한 전가(轉嫁)적 칭의론의 지지자입니다. 여기서 전가적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려졌다, 전달되었다, 주어졌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칼빈은 명료하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 어떤 의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려졌기 때문이다.”(1)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믿게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역설합니다(III.i.1-4). 불링거(H. Bullinger)가 작성한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1566년)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적 입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칼빈적 입장 뒤로 명백하게 물러서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2)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언제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확립하려고 했던 개혁교회의 개혁자들의 일관된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인간은 업적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관념’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칭의를 성취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사항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 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 ‘우선적인’ 측면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I.i.3을 참고).

미주

(미주 1) 존 칼빈, 『신앙교육서』, 이형기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40.
(미주 2) 박근원 외 편저, 『장로교 신조 모음』(서울: 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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