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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속았던 사람

기사승인 2020.09.22  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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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5

< 1 >

예레미야, 우리에게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통한 시대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슬픔의 예언자’로 불린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암울함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627년 요시야 왕 재위 13년부터, 기원전 587년까지, 점차 쇠락해가던 유다 왕국이 마침내 비참하게 몰락하는 40년의 역사를 예레미야는 목격해야 했습니다.

힘찬 종교개혁과 국가 부흥운동을 추진했던 요시야 왕에 대한 기대와 환호도 잠시, 기원전 609년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의 손에 갑자기 요절하면서부터, 자기 조국 유다가 먼저 이집트 손에, 다음에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청년 예언자 예레미야는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습니다. 바빌론은 유다를 기원전 597년, 588년, 582년, 세 차례나 연거푸 침공했습니다. 기원전 587년, 두 번째 침공 말미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자기 아들들이 목전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본 후, 자신의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비극의 예언자로 만든 것은 끊임없이 계속된 외세의 침략이 초래한 암울한 시대만이 아닙니다. 그는 40년 동안, 자기 조국의 평안과, 통치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예언이 아니라, 나라의 파국과 파멸을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역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에서 낯선 이방인,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하는 지식인의 전형입니다. 이런 고통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 합니다: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 내가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 20,7-9).

예레미야는 스스로 예언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 예언자 학교도 있었고, 직업적 예언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인물이 아닙니다. 선택의 주체는 온전히 하나님 자신이시고, 예레미야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결과에 개의치 않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한 일도 아닌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아닌데, 해야만 하는, 그것도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자기 조국의 파국과 파멸을 말해야 하는 예언자의 숙명이 어떤 것인지 예감한 듯,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렘 20,14-18).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렘 15,10).

아니, 저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고관들과 거짓 예언자들은 예레미야를 협박하면서 죽이려고 합니다: “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줄 알아라!”(렘 11,21). 살해 협박 앞에서 예레미야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처럼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집트와 바빌론의 침공 자체나, 자신을 죽이겠다는 위협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데, 정작 나라를 책임지고, 백성을 지켜야 할 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들, 유다 왕국의 지식인들인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오히려 국가적 위기를 기회삼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습니다. 그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습니다”(렘 22,13-17).

시드기야 왕은 유약하기 짝이 없어 대신들의 서로 다른 전략적 판단에 이리 저리 흔들리기만 합니다. 이집트에 붙을 것인지, 바빌론에 붙을 것인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지조도 없이 흔들립니다”(렘 2,36).

왕과 지도층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읍니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입니다.

백성이 상처를 입고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면서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얼굴을 붉히지도 않습니다(렘 8,10-12). 제사장들은 심지어 성전 안에서도 악행을 저질렀고, 서기관들은 거짓된 붓으로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으며(렘 8,8), 예언자들은 간음을 하고(렘 23,14), 만사형통을 선포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팔아 꿈에 계시를 받았다면서(렘 23,25), 거짓말로 예언을 합니다(렘 23장 17절, 25절). 그들은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거짓 평화를 약속합니다(렘 14,13).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백성에게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선포하지 않았고, 백성은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렘 23,33).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 현실과 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말씀하셨지만, 믿음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담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소유로 택한 백성을 포기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렘 12,7). 하나님의 심판은 이민족의 침략과 나라의 멸망에서 현실이 됩니다. 포위당한 예루살렘 성 안에는 기근과 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산처럼 쌓인 칼에 맞아 죽은 시체들은 치우는 이들이 없어 공중의 새와 땅에 사는 개와 짐승의 먹이가 되어도 아무도 그것을 쫓아줄 사람이 없습니다(렘 7,33-34; 15,2-3).

하나님께서 뽑아 세운 민족,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아끼고 사랑하시던 민족이 왜 이런 처참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단 말일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렘 8,7).

“내 백성이라는 것들은 활을 당기듯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는다. 진실은 없고, 그들의 폭력만이 이 땅에서 판을 친다. 참으로 그들은 악에 악을 더하려고 돌아다닐 뿐, 내가 그들의 하나님인 줄은 알지 못한다. 친척끼리 서로 거침없이 사기를 치고, 이웃끼리 서로 비방하며 돌아다닌다. …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을 되풀이 하면서 기만 가운데 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렘 9,3-8).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구원입니다. 그리고 회복과 구원은 오직 회개할 때 주어집니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렘 18,7-11).

파국과 파멸에 직면한 한 나라를 회복하고 구원하는 길은 회개에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백성이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행동과 행실을 고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갈 때, 다가온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증언입니다.

▲ Enrico Glicenstein, 「예레미야(Jeremiah)」 ⓒWikipedia

< 2 >

얼마 전에 한 친구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음과 같은 나라라는 것이지요:

- 평균 IQ 105를 넘는 유일한 나라.
- 문맹률 1% 미만인 유일한 나라.
-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아직도 휴전 중인 나라.
-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국 중 하나인 나라.
- 여성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
- 음악 수준이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싸이와 방탄소년단 등)
- 문자 없는 나라들에게 UN이 제공한 문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현재 세계 3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있음).
-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진 나라(한글 24개 문자로 11,000개의 소리를 표현, 일본 300개, 중국 400개에 불과).
- 가장 단기간에 IMF를 극복해서 세계를 경악시킨 나라.
- 세계 10대 거대 도시 중 한 도시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
- 인터넷 TV 초고속 통신망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
- 세계 각국 유수대학의 우등생 자리를 휩쓸고 다니는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나라(2위 이스라엘, 3위 독일).
- 일본 대비 땅 덩어리는 1/3도 안되며 인구수 5,000만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하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58년 만에 이 모든 것을 이룬 나라.
- 유태인을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
- 국민 의식 수준이 국회의원 보다 높은 나라.

물론 우리는 여기에 계속하여 덧붙일 수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최고인 나라, 청년실업률 최고의 나라 등등 부정적인 것도 있지만, 매우 긍정적이고 본받을만한 것들도 계속 덧붙여 갈 수 있습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우리도 놀라고 세계도 놀랄 일들을 해내지 않았습니까?

IMF 위기를 극복하자며 온 국민이 ‘금모으기’에 나선 일, 축구 월드컵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열렸을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온 민족의 응원함성과 함께 참으로 이루어진 것을 감격스럽게 지켜볼 수 있지 않았습니까?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방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요. 아무튼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자랑스러울만큼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세계를 놀라게 했는지, 아니 지금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할 일이 있다면, 평화통일 이루는 일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가 도둑처럼 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통일도 도둑처럼 그렇게 올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가 충돌하고 분단 상황과 분단 유지가 주변 강대국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주변 강대국들은 결코 우리나라의 평화통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힘,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평화통일, 이 길 위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교회는 우리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고, 우리 국민이 바른 길을 가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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