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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창 2:18-25 엡 5:21-6:4 막 10:1-16)

기사승인 2020.09.18  16: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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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셋째 주일(9월20일) 남신도회주일

1. 여자,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인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십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그런데 먼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어 아담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담을 돕는 배필이 되는지를 살펴봅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2:19-20a)

▲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아담은 가축에게는 소, 개, 닭, 돼지 등의 이름을 주었고, 공중의 새는 독수리, 비둘기, 참새 등의 이름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들의 짐승들에게는 늑대, 사자, 호랑이라는 이름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는 아담을 돕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 존재를 지칭하는 이름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축과 새와 들의 짐승이 아닌 다른 어떤 배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속에 있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십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0b-22) 

이렇게 아담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을 때, 그때 아담은 자신의 배필에게 맞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부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곧 ‘남자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여자가 이렇게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여성은 남성의 조력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돕는 배필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 아담과 하와

사실 우리말의 ‘돕는다’는 의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사장을 돕는 직원의 ‘도움’이 있고, 또 아이를 도와주는 엄마의 ‘도움’이 있습니다. 곧 아랫사람이 돕는 도움과 윗사람이 돕는 도움입니다. 우리는 여자가 아담을 ‘돕는다’라고 했을 때, 대부분 전자의 도움을 생각합니다. 사장인 아담을 도와주는 비서 직원인 여자, 혹은 바깥양반을 돕는 안사람, 남성을 도와주는 조력자 여성 등. 그러나 ‘돕는다’라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구약성서에서 20회 정도 사용되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도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홀로 있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붙잡아 세워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뜻합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우리말에서, 엄마가 아이를 도와주는 도움의 의미와 비슷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아담을 돕는다는 말은, 아담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를 인도하는 도움, 곧 하나님의 도움과 같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도움입니다. 사실 그렇죠? 여성의 도움 없이 그 어떤 누구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2.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살펴 볼까요? 유전학적으로도 남성보다 탁월한 성이 여성입니다. 우리의 세포 속에는 유전자정보를 담고 있는 염색체가 46개가 있습니다. 2개씩 짝을 이뤄 모두 23쌍의 염색체 쌍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22쌍은 보통 염색체로 남녀 모두 공통적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2개의 염색체는 남녀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는 부모로부터 X와 Y염색체를 하나씩 물려받아 XY를 갖지만, 여성은 양쪽에서 모두 X염색체를 받아 XX염색체를 갖습니다. 따라서 X염색체와 Y염색체는 남녀의 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성염색체로 불리는데, 여성의 경우는 44+XX, 남성의 경우 44+XY로 나타냅니다.

▲ 사람의 염색체

그런데 그림에도 나와 있지만, X염색체가 Y염색체보다 훨씬 큽니다. 또한 유전자 수도 더 많습니다. Y염색체가 78개의 유전자를 가진 데 비해 X염색체의 유전자는 1098개나 됩니다. 게다가 X염색체에는 뛰어난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X염색체 하나가 문제가 생길 때, 여성은 또 다른 하나가 있어서 안정적이지만, 남성의 경우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X염색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뇌질환에 남성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한번 상처가 나면 좀처럼 피가 멎지 않는 혈우병(血友病)이나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색맹처럼 X염색체에 문제가 있을 때 생기는 유전병은 대개 남성에게 나타납니다. 여성은 X염색체가 2개 있기 때문에 설혹 하나가 잘못되더라도 다른 하나로 대체할 수 있지만, 남성은 X염색체가 하나뿐이라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경유전학과 진화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샤론 모알렘은 『우리의 더 나은 반쪽』 (지식의날개, 20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하는’ X염색체에 존재하는 1천 개의 유전자 가운데 23퍼센트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여성의 세포 하나하나에 비축되어 있는 상당한 유전학적 예비 전력이다. 여기에는 수백 개의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여성의 모든 세포가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다. 하이브리드카에 비유하자면, 휘발유로 작동하는 내연 기관보다 전기로 작동하는 모터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가 있다. 생존이 목표라면, 여성처럼 유전학적 선택지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남성의 세포와 여성의 세포 간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여성의 세포는 유사시에 중요한 유전자 수백 개의 비축 분을 요청할 수 있다. 남성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또한 샤론은 인생을 울트라 마라톤에 비유하여, 그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남성은 스포츠카로, 여성은 하이브리드카에 비유합니다. 따라서 단거리 경주에서는 높은 출력의 스포츠카가 유리하지만, 울트라 마라톤에서는 연료와 전기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오래 갈 수 있는 하이브리드카가 단연 우월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생존의 가능성도 여성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합니다. 샤론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병원체가 들끓는 지구에서 살아남는 것은 우리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난관 중 하나다. 극심한 세균성 감염증을 이겨내는 것이든 인플루엔자 A의 최신 변종을 물리치는 것이든 혹은 범위를 넓혀 기근과 유행병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든 여성에게 더 유리하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XX 염색체와 관련이 있다. 유전학자로서 항생제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여성은 진정으로 면역학적 특권을 누린다.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인류의 생존은 여성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이 바이러스로부터도, 기후 위기로부터도 살아남겠지만, 같은 인류인 남성의 폭력으로 부터는 쉽게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남성들이 지금껏 자신 보다 더 나은 반쪽을 억압한 역사가 지금도 변함없이 그 위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국의 대표적인 종합 일간지 신문인 <가디언>(The Guardian)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성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끌어온 성평등이, 코로나 이후, 정부의 개입이 없으면 수십 년 전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일터에서 불안정 저임금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더 쉽게 해고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남성들이 가정에 머무는 재택근무 시간이 늘어나면서 여성을 향한 폭력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식인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 연구자들의 논문 출판이 남성들보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재난은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강화시키고 여성에 대한 폭력도 증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난의 상황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을 잘못 이해한 인류의 역사, 곧 남성 중심적인 세상은 변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존 역량도 부족한 남성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남성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들을 제대로 돕는 여성들과 함께 해야만 인류의 미래는 그나마 덜 불안할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영국 신문 <가디언>의 경고는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끌어온 성평등이, 코로나 이후, 여성들이 이끄는 정부의 개입이 없으면 인류는 지금껏 존재했던 가장 참혹한 시절로 후퇴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이 창조되었고, 이제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남자 혼자서는 한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혹은 하나님) 처럼 남자를 도와주는 여성과 함께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에덴동산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창 2:25)”는 완벽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주제는 ‘가족’입니다.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정을 파괴하는 이들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며 나아가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입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이 어린 아이들은 ‘버려진 아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가정의 구성원인 아내들과 남편들, 그리고 자녀와 아비들에게 권면합니다. 오늘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금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라 하신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가정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먼저 복음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의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1-2)

가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 10:3-4).” 가만히 보면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아시고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하시더라.”(막 10:5-9)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창조 때의 일을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아내를 학대하고 내버리는 완악한 사람들 때문에 모세는 어쩔 수 없이 이혼 증서라도 써서 아내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여성들이 정당하게 다시 결혼하여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이혼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이혼을 반대할 것을 예상하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을 인정했는데, 왜 예수 당신은 반대하는 것이냐?” 그렇게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 때의 일을 말씀하심으로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또 다시 이혼에 대해 반대하십니다.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막 10:10-12)

4.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혼에 대해 반대하시고, 또 가정에 관해 중요하게 여기셨을까요? 바로 이어지는 말씀 때문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10장 13절부터 16절 말씀은 단독으로 사용되면, 어린이 주일 말씀으로,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는데, 앞부분의 말씀 때문에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먼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3-16)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본문을, 어린아이(파이디온)의 순수성, 혹은 어린아이가 당시 사람 취급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표현 등으로 해석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된 어린아이라는 말의 ‘파이디온’은 ‘갓난아이부터 소년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앞서 이혼에 대한 말씀을 전제로 하면, 어린아이들의 상황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가정이 파괴되어 버려진 아이들일 것입니다. 지금도 결손가정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부모가 이혼을 하거나 가정이 제대로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대우받을까요? 오늘 마가복음 10장 13절 말씀처럼 “얘들은 가라!”입니다. 제자들처럼 꾸짖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은 가정을 잃어버린 어린아이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위해서도 가정이 중요합니다.

사실 19세기 말까지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일제강점기 당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함으로 어린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개념이 존재를 창조한 것일까? 아니면 존재에 개념을 호명함으로 존재가 출현한 것일까요?). 소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 하라!”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으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임금 때문에 어른들이 일을 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노동을 하였습니다. 임금이 싸기도 했지만 어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어린아이들이 들어가 일하는 것입니다. 탄광과 방직공장, 그리고 굴뚝에서 어린이들이 일을 하였습니다.

▲ 방직공장과 탄광의 아이들

가령 탄광에서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캤습니다. 방직공장에서는 돌아가는 방직 기계 밑을 기어 다니며 떨어지는 털 부스러기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어린아이들은 폐병으로 죽습니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 평균 수명이 20대 초반이라니,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좁은 굴뚝에서도 몸집이 작은 어린이들이 들어가 굴뚝을 청소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에도 열차를 움직이는 엔진 속에 들어가 엔진 찌꺼기를 제거하고 엔진을 돌리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작은 어른으로 어른들이 들어가서 할 수 없는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였던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렇게 어린아이, 여성들이 학대 받는 세상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닙니다. 이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정의 중요성을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부부가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서로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가정을 바로 세우라는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먼저 아내들에게 권면합니다. 바울의 애정 어린 말씀을 들어 볼까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그리고 남편들에게도 권면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5-28)

이렇게 부부를 통한 가정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은 부모를 떠나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그 결혼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유비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29-33)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권면합니다. 부모에게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서로 경외하고 복종하는 부부관계,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와, 또한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로 이루어진 가정이 바로 아름답고 복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남신도회주일입니다. 특별히 남신도회원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나아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교훈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주신 아름다운 가정을 지키고, 나아가 우리 사회 공동체를 더 큰 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기를 잘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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