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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선·황정신·황정일·황정해, 독립운동의 길을 가다

기사승인 2020.08.29  17: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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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들 (4)

▲ 1937년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 제6사 조선인장병들 ⓒGetty Image

<3.1학교> 교사이자 훈춘현 통신사업부 활동가, 황정선

황병길의 큰 딸 황정선은 1907년 연추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러시아 정부의 조선 독립운동가 탄압을 피해 1910년 봄, 조선인이 전혀 살지 않는 연통산 아래 연통라자 서골로 이사 옴에 따라 그는 연통라자 산골짜기에서 조선 아이로 외롭게 성장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와 스코트 선교사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다문 쌍신의 신풍학교에서 소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0년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인 마을, 용정에 캐나다 선교부가 세운 명신여자중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가 공부한 신풍학교나 명신여자중학교나 다 기독교 미션스쿨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장하였으며 부모들의 신앙 고백으로 일찍이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1920년 5월 말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서골로 달려와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과 절망으로 아파하며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나라를 찾고 아버지의 원수도 갚기로 결심하며 학교로 돌아갔다. 1920년 6월 4일에 <봉오동전투>가 일어났고 패배에 분노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발본색원하기로 기획하고 <훈춘사건>(1)을 날조했다. 이를 통해 국제 여론을 환기시킨 후, 2만여 명이 넘는 정규군을 연변지역에 파견하여 경천동지할 민간인 대학살을 시도하였다. 이 때 독립사상을 심어주며 항일교육을 실시한 많은 사립학교와 교회와 가옥이 불탔으며 연변지역에서만도 거의 4,000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명신학교는 캐나다 선교부가 직영하는 학교여서 안전하였지만, 그는 모친이 일본군에게 폭력과 수모를 당한 끝에 잡혀 가서 행방불명이라는 연락을 듣고 서골로 돌아와서 사방팔방으로 애타게 어머니를 찾았으나 10여일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였다. 그와 동생들이 어머니 김숙경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 있을 때, 중국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며느리가 일본군에게 끌려간 지 17일 만에 돌아오자 시아버지 황오섭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였고 아이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서로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학교생활에 성실하였으므로 명신여자중학교 교장의 추천으로 영국에 유학 갈 기회가 생겼으나, “망국노 신세에 박사가 다 뭐냐. 먼저 일제 놈들을 내쫓아야 한다. 아버지가 채하지 못한 뜻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유학을 포기하였다.(2)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골, 남별리 등지의 어린이 40여 명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심어주었다. 1924년 용정 은진학교 졸업생이며 대황구의 지도자인 김규봉과 결혼을 하였고, 대황구의 3.1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았다.(3) 그는 1927년 7월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묘를 아버지 옆에 묻어 드렸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과 9살인 막내 정해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로 대황구에서 연통라자를 바쁘게 넘나들었다.

1930년 남편 김규봉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부녀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32년 중국공산당 훈춘현위 통신부 사업을 감당하였다. 그의 남편은 김규봉은 1931년부터 중국공산당 훈춘현위 선전부장으로 연통라자 서골에 파견되어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으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항일투쟁과 독립투쟁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1934년 <반민생단투쟁>시 민생단원으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4) 남편 사후에 그는 일군에게 잡혀서 고초를 치르다가 도망쳐 나와 관내로 피신하였다. 해방 후에 조선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죽음으로 일본군에게 항거한 투사, 황정신

둘째딸 황정신은 1910년 연통라자 서골에서 태어났다. 만 10세에 아버지를 잃었고 1927년 7월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에 양포에 사는 이주옥(이주룡)과 결혼하였다.(5) 처음에 이주옥은 항일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그런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아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나 차츰 생각이 바뀌어 그도 항일투쟁에 몸을 담았다. 그는 결혼 후에 남편과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 모친 김숙경의 사망 소식을 듣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는 장례를 치른 후에 어머니의 죽음으로 남겨진 할아버지와 어린 두 동생을 돌보기로 하여 고향인 연통라자로 다시 돌아 왔다.

1930년 그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는 농민협회와 부녀회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1931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연통라자구의 선전위원사업을 맡았다. 1932년 12월 연통라자에 소비에트정부(노농병대표대회)가 세워질 때 그는 서골 소비에트정부의 부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코신부대”에 소속되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유격전에 참가하였으며 틈틈이 옷 공장에서 밀림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색깔로 유격대원들의 옷을 지어 보냈다.

1933년 6월 삼도구에 있는 동북인민혁명군을 위문하고 밤이 늦어 유격대실에서 숙박하고 있을 때, 100여 명의 일본군과 위만군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적을 유인하기 위하여 동지들과 반대방향으로 뛰다가 사로잡히게 되자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침 몸이 바위에 걸쳐서 바위를 끌어안고 버틸 수 있었는데 일본군의 총알로 어깨가 부상을 입자 손이 풀려서 강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물가에서 떠밀려 나온 그는 곧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었고 남구 귀틀집으로 호송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일본군 토벌대가 유격대의 귀틀집을 습격하였다. 아직 부상 중에 있던 그는 강을 건너다가 얼음판에 쓰러져서 생포를 당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는 중에 말을 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어 잘라 버렸다. 일본군은 그를 초막에 던져 넣고 불을 질렀다. 피난 나갔던 농부들이 돌아와서 불을 끄고 불에 그슬린 채 쓰러져 있는 그를 끌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 집이 생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불이 집을 태우지 못하여 그의 생명이 부지된 것이었다.

1934년 2월 14일, 정월 초하룻날에 정의단과 일본 토벌대 300여 명이 남구 유격구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최현숙과 만족 투사인 안서지는 아직도 부상 중에 있는 그를 부축하고 도망치다가 토벌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피할 길이 없게 된 그들은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깊은 물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일본 토벌대를 피해 달아났던 유격대들은 그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으나 연통라자 부녀부장이었던 안순화가 얼음장 아래 있었던 그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고이 묻어 주었다.(6)

항일투사 김남극의 며느리, 황정일

셋째 딸 황정일은 1913년 연통라자 서골에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14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16살 되는 1929년 항일투사 김남극의 아들이자 중국공산당원이며 항일련군의 간부인 김원익(7)과 결혼하였다. 그는 1930년 청년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부녀회에서 종사하였다.

1932년 1월 남편은 중공연구구위의 공청단서기가 되었고 그는 부녀회장이 되었다.(8) 그러나 함께 일하는 기쁨도 잠깐이었고 1933년 남편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국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9) 그는 심신을 추슬러서 1935년 동녕현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 위만군들에게 체포되는 고난을 겪었다.

그는 해방이 되어서 훈춘에서 의류업에 종사를 하였으나 1948년에 동녕현에서 포로로 잡힌 건으로 말미암아 무고를 당하여 당적과 군적을 잃었다. 1987년 1월에야 비로소 <역사문제>가 해결되어 그의 공로가 다시 인정되어 항일투사로서 간부 대우를 받았다. 대황구 김남극의 묘소에 가면 뒤 부분에 그와 그의 남편 김원익의 묘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의 소대장, 황정해

황병길의 아들 황정해는 1918년 10월 17일, 연통라자 서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9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10살에 할아버지를 잃고 고아 아닌 고아로서 누님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위대한 독립투사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아버지처럼 투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

1925년 7살 때, 삼가자의 한족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929년 11살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큰 누나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황구 <3∙1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0년에 학교가 폐교되자 서골로 돌아와서 농사일을 도왔다. 1931년 가을, 중공훈춘현위의 지도성원인 자형, 김규봉의 지도 아래 공산당지부가 결성되자 아동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아동단원들과 함께 보초를 서거나 통신연락을 하였으며 때로는 변장하고 훈춘성내로 들어가 삐라를 살포하였다.

1932년, 그는 <9∙18사변> 1주년 기념 군민연합대회에서 아동단 단장으로서 연설하였다. 같은 해에 연락병으로 마안산밀영에 가는 중, <토벌대>를 가득 실은 트럭이 서골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한 그는 다른 단원에게 편지를 맡기고 서골로 달려가서 급보를 전하여서 유격대원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토벌대를 덮쳐서 대승을 거두게 만들었다. 같은 해에 그는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훈춘현위, 중공동만특위의 통신원으로 통신 임무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그는 1933년 15세에 그는 셋째 누나의 남편인 자형, 김원익의 순국을 목도하였으며, 1934년, 16세에 일본군과 정의군 토벌로 정초에 둘째 누나를 잃었으며, 마음속으로 의지했던 자형 김규봉 투사가 <반민생단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1935년에 악명 높은 일본의 은퇴군인들로 구성된 <빨간 소매부대>와 겨루게 되는 <로흑산전투>에 참여하였다. 그의 임무는 적진에 들어가서 정세를 살피고 적들을 충동질하여 출동하게끔 유인전을 펴는 것이었다. 그는 지하공작원을 적의 주둔지로 보내어 자기들의 위치와 침공 계획을 밀고하게 만들었다. 혁명군의 작전에 넘어간 <빨간 소매부대>는 전투를 시작한지 한 시간도 못되어서 인민혁명군의 대승리로 끝이 났다.

1937년, 19세가 된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9월에는 제2군 교도퇀 2련의 기관총 패장(소대장)이 되었다. 1938년 5월에는 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부의 기관총반 반장이 되었고 후에 다시 기관총패의 패장이 되었다가 사령부의 경위패장(소대장)이 되었다.

1940년 제1로군 부사령 위증민이 교수하전투에서 부상을 입은데다가 위병과 심장병이 재발되어서 대부대와 함께 이동할 수 없게 되자 사령부에서는 그에게 10여명의 군인을 데리고 위증민을 고동하상류에 있는 서북차 밀영지로 호송하고 병을 치료하는 동안 경위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위증민의 병 치료를 위해서 동료들과 심산 밀영지에서 겨울을 나며 식량난과 토벌대에게 공격을 당하는 위험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몰려드는 토벌대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위증민을 조심스레 보살피며 고동하를 떠나 화전현 쟈피구밀영지로 떠났다.

1941년, 봄이 왔어도 쟈피구밀영지는 유달리 추웠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양식을 구하러 내려가면 토벌대에게 죽고 산에 남아 있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한 군인을 데리고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났다. 그는 곰을 발견하고 자기 몸을 내던져 곰을 사냥하고 곰과 함께 죽었다. 남아있는 군인들은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던진 그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23세의 항일투사 황정해는 몸소 부하들의 밥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곰과 사투를 벌이면서 아버지, 어머니와 둘째 누나 그리고 두 자형을 만났다.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편안히 잠들었다.

미주

(미주 1) 일본제국주의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우고 연변 조선인독립군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 비적 떼들로 하여금 9월 12일, 9월 30일, 10월 2일에 3차례 걸쳐서 훈춘 상부지와 일본영사관을 침공하여 약탈, 방화하며 일본인들을 살해하며 납치하도록 획책한 사건. 
(미주 2) 리광인 저, 『겨레 항일지사들 3』, 52쪽.
(미주 3) 같은 책, 52쪽.
(미주 4) 김양, 『항일투쟁반세기』, 222쪽;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97쪽.
(미주 5) 주영돈·한상호, 『중국동북조선족녀성과 항일투쟁』, 158쪽.
(미주 6) 박문봉·김광영, 『중국조선족 항일지사 100인』, 501쪽; 리광인·림선옥,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 181쪽.
(미주 7) 양봉송, 『훈춘조선족발전사』, 252쪽.
(미주 8) 최석승, 『훈춘조선족이민사』, 174쪽.
(미주 9) 앞의 책, 252쪽.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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