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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투사 황병길의 생애

기사승인 2020.08.15  17: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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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들 (2)

▲ 단지동맹에 참여한 애국청년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병길이다. ⓒ국가보훈처

황병길은 20세기 초에 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뛰어난 조직가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넘어선 폭넓은 인간관계로 활동의 폭이 넓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1885년 음력 4월 15일(1), 경원군 양하면의 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독립운동에 청춘을 다 바치고 36세 나이에 ‘훈춘 한민회’(2) 군사부의 부장으로서 대원들과 함께 다른 지역을 순회하고 돌아오는 중에 일군의 추격으로 부상을 입어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나흘 전인 1920년 6월 1일, 마적달 피신처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의 흔적이 종교, 교육, 계몽, 무장투쟁단체 설립 등등 제반에 걸쳐 있었으므로 남다른  그 분의 삶을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 많은 책들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물로 2년 전에 「크리스천 항일투사, 황병길」을 작은 글을 써서 발표하였으므로 본 글에서는 그의 삶을 간략하게 돌아보고 그의 아내, 김숙경과 그의 4명의 자녀들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간도 독립운동사에서 황병길의 발자국은 의외로 깊고 다양하다

앞으로 보다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의 정체성을 크리스천 독립투사로 본다. 그는 ‘신앙구국’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소명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교회와 교육과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그는 일찍부터 캐나다 선교부 소속 선교사인 그리어슨(구례선)(3), 베이커(박걸)(4)와 스코트(서고도)(5)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훈춘의 조선인 복음전도를 위하여 그들과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1909년부터 사망하는 1920년 5월까지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캐나다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북간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1909년 오병묵과 함께 중국 교회 형식을 따라 훈춘 성내에 ‘강서당’(6)을 구하여 예배와 전도를 겸하는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들의 열성적인 복음전파로 밀강, 대황구, 경신 등지에 교회가 세워졌다. 후에 강서당은 스코트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김주범의 지도하에서 <훈춘성내교회>로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11년 백규삼, 오병묵, 이동춘, 양하구 등과 함께 한민회의 전신인 ‘기독교우회’(7)를 설립하여 훈춘현성과 훈춘서북부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와 미신타파, 문화 계몽운동, 조선인 단결과 항일의식을 고취와 군자금 모금에 전력투구를 하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기 구입을 위해 이동춘, 김영학 등과 함께 ‘애국저금단’을 만들어서 본부를 동녕현에 두고 군자금 모금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다.

1907년 그는 자신의 “교육구국”을 지지하는 스코트 선교사와 함께 신풍에 ‘신풍소학교’를 세웠으며 김종대를 교사로 임명하였다.(8) 김종대는 1908년 가을, 1909년 초봄에 학교로 안중근 의사를 초청하여 항일 민족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훈춘현 지방사를 살펴보면 황병길이 스코트 선교사와 함께 신풍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훈춘일대에 많은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양하구와 김철수, 유백초는 대황구에 ‘동창학교’, 1911년 이명순은 남별리에 ‘남별리학교’, 춘화에 ‘진명학교’, 판석에 ‘춘경학교’가 설립하였다. 황병길은 1917년 양하구가 이동휘, 김남국, 양재환 등과 함께 ‘동창학교’를 기초로 하여 6년제 ‘북일중학교’를 세울 때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9)

2개의 독립운동 단체의 창립을 주도하다

그는 러일전쟁 때 통역관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10) 그 후, 이범윤의 사포대에 참여하는 중에, 이범윤, 이위종, 최재형이 조직한 창의회 일원으로 1908년 7월에 국내에 진공하여 신아산전투, 고건원전투, 서수라전투에 참여하였다. 회령전투에서 대패한 후, 1909년 새해에 안중근 등과 함께 무명지를 자르며 조선독립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는 ‘단지동맹’을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제 3조로서 임무를 맡아 수분하지역에서 대기하기도 하였다.(11)

그는 1912년에 전 훈춘순경국장 왕결청, 길림참모부원 빈보현, 오병묵, 이종활, 윤해 등과 함께 한족과 조선인이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꾀하는 ‘둔전영’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같은 해인 1912년에 항일사상 고취를 위해서 김학천과 함께 ‘훈춘상무회’를 조직하였다.(12) 그는 1917년 10월에 훈춘일본영사분관에 체포되었고 1918년 일제는 그를 친일선전에 이용하고자 조선시찰단 단장으로 세워서 그는 4월 28일 훈춘을 떠나서 5월 25일에 훈춘으로 돌아왔다. 6월 2일에 일제가 기획한 시찰보고회가 있었지만 일제는 황병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와 기운을 꺾을 수 없었다.(13)

1919년 용정에서 3∙13 만세시위가 있은 후, 그는 훈춘에서 노종환, 양하구, 이명순 등과 함께 3∙20 훈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3월 말에 ‘기독교우회’를 근간으로 하여 이명순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훈춘한민회’ 창립하였다.(14)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연계하였고, 8월에는 ‘간도국민회’와 연합하여 ‘간도국민회’ 지회가 되었다. 그러나 산하에 무장단체인 ‘급진단’을 두어 군사훈련과 군자금 모금 등은 독자적으로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말에는 ‘급진단’을 토대로 하여 의사단, 포수단과 병합하여 ‘군무부’를 만들고 군무부장이 되어서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특별히 1919년 3월 20일, 노종환, 양하구 등과 함께 2,000여 명의 군중을 조직하여 훈춘시내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4월 1일에는 탑자구에 가서 2,000여 명의 군중을 시위에로 이끌었다. 자료에 의하면 그의 조직적인 활동과 영향으로 1919년 3월부터 4월 사이 훈춘현 47개 지방에서 항일만세시위가 있었으며 참가자는 1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15) 뿐만 아니라 그는 군자금모금과 무기 구입, 양식 비축과 병기 수리, 군사 훈련과 항일무력투쟁을 위한 근거지 확보 등 맹활약으로 후에 ‘청산리전투’에 독립군 제1대대에 참여하게 되는 ‘한민회’의 약 200여 명의 군인을 양성해냈다.(16)

황병길·김숙경의 독립운동 복원

이상으로 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이제는 그와 함께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그의 아내 김숙경 독립투사와 아버지를 따라서 독립운동가의 길에 들어선 황정선, 황정신, 황정일, 황정해의 독립운동을 살펴볼 차례이다. 솔직히 말해서 다섯 분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을 많이 섭렵하지 못하였고,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연변역사연구소가 정리한 세 개의 방문 담화자료인 『황정일 방문기』, 『황정일 담화기록』,  『황정일 할머니 집에서』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그들에 대한 조각 글들을 모아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황병길 일가처럼 부모와 자녀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한 위대한 가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황병길은 일군에 추격당하는 중에 입은 상처와 급성 폐렴으로 죽었다. 김숙경 또한 일경의 핍박과 폭력에 맞서는 중에 식중독(또는 뇌졸중)으로 인사불성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황정신과 황정해는 전투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황정선도 남편 김규봉과 함께 항일유격대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황정일 또한 남편과 함께 항일유격대에서 여성 지도자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위 2명도 항일투쟁 중에 목숨을 잃었으니 그의 일가의 조국독립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주는 가슴 뜨거운 감동은 끝이 없다.

독립운동의 소명으로 피비린내 나는 무장투쟁과 각종 필요를 지원하며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황병길 일가의 아름다운 독립운동을 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에 외치고 싶어서 부족한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는 바이다. 다음 글에서는 황병길의 아내, 김숙경 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미주

(미주 1) 리광인은, 『겨레 항일지사들 3』, 23쪽; 그러나 김택이 주필한 『길림조선족』, 제6편 인물전기 “황병길” 709쪽에서는 그의 출생일을 1885년 9월 6일(음력)로 나온다. 
(미주 2) 훈춘한민회는 <기독교우회>를 모체로 하여 1919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연계하다가 1920년 8월 이후로 <간도국민회>와 합병하여 그 지회로서 활동을 하였다. <훈춘한민회>의 산하단체였던 <급진단>과 훈춘지역의 연합부대인 <군무부>는 황병길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무장훈련을 시켰다. 
(미주 3) 최석승, 『훈춘조선족이민사』, 283, 285쪽
(미주 4) 북경대학교 조선문화연구소 편, 『종교사』, 146쪽; 최석승, 『훈춘조선족이민사』, 283, 285쪽
(미주 5) 최석승, “황병길”  in 김택, 『길림조선족』, 제6편 인물전기, 714쪽; 최석승, 『훈춘조선족이민사』, 259쪽.
(미주 6)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48쪽.
(미주 7) 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부, 『개척』, 392쪽; 룡정3∙13기년사업회 편집, 『룡정3∙13반일운동』, 208쪽;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48쪽에서는 <기독교우회>가 1913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450쪽.
(미주 8) 최석승, 『훈춘조선족이민사』, 259쪽;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편집위원회, 『종교사』, 167쪽.
(미주 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편,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 202쪽; 리광인은, 『겨레 항일지사들 3』, 31쪽.
(미주 10) 김택 주필, 『길림조선족』, 711쪽.
(미주 11) 리광인은, 『겨레 항일지사들 3』, 30쪽.
(미주 12) 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부, 『개척』, 371쪽.
(미주 13) 김주용, 『한국독립운동과 만주-이주∙저항∙정착의 점이지대』, 391~396쪽.
(미주 14)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450, 451쪽.
(미주 15) 리광인은, 『겨레 항일지사들 3』, 33, 34쪽.
(미주 16) 같은 책, 39, 40쪽;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46쪽.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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