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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법; 버틀러에게 기대어 생각해 본 법

기사승인 2020.08.13  16: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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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7월호 (2)

▲ 가난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계랸 18개를 훔친 사람과 성범죄자가 비슷한 형량을 받았다. ⓒGetty Image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는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건과 신학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2020년 7월 <사건과 신학> 주제는 “법과 공정”입니다. 이글은 모두 6편의 글 중에서 <협성대학교 최순양 초빙교수>(클릭하면 원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님의 글입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했던 범죄자에게 내린 형량과 배고파서 달걀 18개를 훔친 남성에게 구형된 형량이 같을 수 있는 곳, 이것이 대한민국의 법 현실이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평성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뇌물공여라는 심각한 범죄를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공정하다’라는 것을 ‘신화’처럼 믿고 살지만, 실상의 법은 “강약약강”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처벌하)고 약한 사람에게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는 계명은 기독교의 독특한 윤리임은 틀림이 없다. 예수가 실천한 삶 속에서 항상 주목과 배려의 대상이었던 것은 사회적 약자였음 또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약자’로 고려되면서 배려와 포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범위는 사실 그리 넓지 않다.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타자’의 윤리학을 이야기한 레비나스를 묵상하면서 얼굴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1) 그리고 이 불확실성은 나에게로부터 출발해서 다른 이들의 불확실성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만 있는 고유성(singularity)을 보려 할 때 가능해진다.

이 불확실함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법과 제도에서 종종 포함하지 못할 때가 많다. 자본과 권력,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서 멀어질수록 ‘불확실함’을 품은 얼굴들이 제도와 권력의 ‘약자’로 존재한다. 버틀러는 따라서 “우리는 위험에 처한 삶의 불확실함을 알기 위해 언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야기하는 얼굴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2)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언어, 즉 사회에서 정해놓은 ‘법’이라는 것은 불확실함을 품은 약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늘 그 테두리 너머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배워 온 것, 사회에서 보도되는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들을 끊임없이 의심해 보면서 누구를 어떻게 재현하고 누구의 불확실성을 소멸시키고 있는 지 주의해야 한다. 이는 곧바로 법이라고 하는 형식적 체제가 누구를 위해 작동하며 누구를 피폐하게 만들며 억압하는 지 날카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버틀러는 젠더의 문제로 시작해서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거기서 머무르지는 않는다. 폭력과 차별의 대상은 사실 그렇게 협소하지만은 않다. 버틀러는 “담론의 층위에서 보면, 어떤 삶은 전혀 삶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간적인 것도 될 수 없다”(3)고 이해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을 정의하는 규범적 틀에 맞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이미 담론을 통해 탈 인간화되었고 그 다음에는 신체적 폭력을 겪기도 한다. 정상적인 의미에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러나 폭력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폭력은 표시되어지지 않는다.(4)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체류자들, 전 세계를 떠돌아야 하는 난민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버틀러에게 있어서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불확실성’에 기반 한다. 사회에서 정의하는 ‘정상적’ 주체에 적합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 예외성은 때로는 남녀 이원론적 ‘몸’에 관한 정의 그리고 성생활 존재양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정상적이지 않은 몸, 존재 정의 양식에 적합하지 않은 주체는 늘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빗겨간다.

버틀러는 무엇이 현실적이고 진정한 것인가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이면서 권력의 문제라고 하였다.(5)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면서 또한 다른 이들을 배제시키는 통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성직자’라고 하는 주체는 때로는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을 가해도 그것이 그 존재를 위협할 만큼의 문제로 평가되지 않는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을 문제삼는 것은 피해자의 문제이지 그 목사님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버틀러는 사회적 인정과 사법적인 죄의 여부를 가리는 것과는 별개라고 상기시킨다. 즉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죄라고 연결되어서는 안되고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법의 집행을 더 과중하게 받아서는 안된다. 윤리적 판단이라는 것은 늘 판단하는 자와 판단당하는 자의 거리를 전제로 한다.(6)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윤리적 책임은 사회적 인정을 가지고 나와 너를 판단하기를 중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죄’에서 더 멀다거나 법의 혜택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것은 흡사 예수가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한 사람들에게 한 말과도 같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그 여인이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그 판단에 너희 자신은 걸리지 않는 가를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약자를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그 올무와 같은 사회의 ‘법’이 과연 정당한 것인 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누구라고 판단할 때, 버틀러식으로 표현하자면 타자에 대한 ‘사법적 죄의 유무’를 결정할 때 우리는 마치 법이 정한 판결이 온전한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나 자신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그/그녀에게 있다는 식으로 거리를 설정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비난은 심판당하는 자와의 공통성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도덕화”하는 것이며, 자신 안에 있는 불투명성과 취약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타자가 내 앞에 범죄자의 얼굴로 있을 때, 내 안에는 그러한 판단과 정죄의 대상이 될 만한 어떤 것이 없을까? 그리고 너무도 쉽게 약자를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강약약강의 법이 정의로운 법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괜찮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고, 그만큼이나 타자에 대해서도 확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판단되는 법이 정의롭다고 믿는 것은 너무도 섣부른 생각이다. 이러한 버틀러의 윤리에 대한 재해석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한층 더 정교하게 ‘철학적으로’ 현실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예수는 그 법이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배제하는 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예수 당시 ‘안식일 법’이라고 하는 담론과 법적 권력이 판단했던 ‘죄인’은 경제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였을 수 있겠지만, 현재는 젠더적, 사회적, 그리고 사법적 담론들이 사람들의 ‘몸’과 경제적 계급, 권력의 유무를 통해 ‘죄인’으로 내몰고 있다.

법의 판단을 너무 쉽게 믿기 이전에 법이 내몰고 있는 죄인들이 왜 ‘죄인’으로 내몰리는 지의 상황에 민감해야 한다. 법을 판단하는 기준은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 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적어도 그 법이 내몰아 벼랑 끝에 놓인 존재들을 위해 법에게 문제제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주

(미주 1) 쥬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0), 184.
(미주 2) 같은 책, 205.
(미주 3)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5), 46.
(미주 4) 앞의 책, 47.
(미주 5) 앞의 책, 49.
(미주 6)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서울: 인간사랑, 2013), 81.

최순양 초빙교수(협성대학교)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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