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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생각해 주세요”

기사승인 2020.08.11  19: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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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다 내 앞에 서 있는 다른 이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마태복음 5:38-42)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 안에 있는 완전한 평안을 날마다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욥기 본문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지식으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며 살아가지만 실제로 좋고 나쁜지 유익이 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가뜩이나 위축된 일상에, 40일 이상 지속되는 장마가 더해지면서 삶이 더 힘들어 졌습니다. 이런 영향들로 관광객들로 넘쳐나야 할 시기인데도 지역의 길거리가 한산해졌습니다. 이 때 우리는 쉽게 ‘안 좋다.’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말 나쁘기만 한 걸까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이 일들이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하나님께 겸손하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를 구하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진정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

얼마 전 모 방송의 ‘삼시세끼 어촌편’을 방영했었습니다. 연예인들이 어촌 섬에 살면서 밥도 해먹고, 고기도 잡는 평범한 일상을 그린 프로입니다. 이 프로에서 하루는 한 배우가 낚시를 하려고 동료들을 바닷가로 안내하면서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쨌든 제 말씀만 잘 따라주시고 그리고 끝날 때 좀 쪼끔만 생각해 주세요.(한 손을 흔들며) 쪼금만 생각해 주세요.”

동료들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여기서 조금만 생각해 달라는 의미는, 낚시 자리가 마음에 들면 자리를 안내한 자신을 생각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달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자신을 조금 더 생각해 달라는 ‘조금만 생각해 주세요.’와 비슷한 말을 많이 쓰거나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조금만 비켜주실래요.’, ‘조금만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만 양보해줄래?’, ‘조금만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등의 표현들입니다. 요청은 ‘조금만’ 이지만, 이 요청을 상대방이 들어주면 기분은 ‘많이’ 좋아지게 됩니다.

대단한 일을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거나 내가 상대방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생각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존중과 배려를 받은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생각해 주었구나.’ 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조금’ 더 생각하며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조금만’을 서로에게 실천하지 못해 다툼이 생기고, 미움이 생겨납니다.

타인을 ‘조금만’ 생각해주며 살기도 힘든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더 높은 차원의 사랑과 배려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때론 이 말씀이 구체적이기도 했는데요. 오늘 본문이 바로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동 요청입니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출애굽기 21:24-25을 보시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을 인용해 말씀하셨습니다.

당한 것만큼만, 손실을 입은 것만큼만 되돌려주라는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너희들이 들었고, 율법으로도 지키며 살아왔지만 이 율법으로는 부족하다시며 타인을 향한 새로운 행동규범을 오늘 본문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맞서지 않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을까요? 당한 것보다 더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씀을 힘겹게 지키며 살아왔는데, 예수님은 “부족했다.”고 선언하십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도 정신이 번쩍 뜨이게 할 만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찔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을 요청하시지만 우리는 ‘적당하게’, ‘부족하게’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적당한 선은 없습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힘들어 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 구절로 더 큰 충격을 주십니다.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경제적인 손실도 주저하지 말라는 장면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이에게까지 이런 행동을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몸으로 때우는 일은 어쩌면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히려 하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요구보다 더 많이 퍼주는 일은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중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이처럼 기꺼이 손해 보는 삶을 감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손해 보는 셈을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얻으려고만 하고, 하나님을 통해 혜택만을 보려 했기에 이런 실천은 더 힘들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이어지는 41-42의 말씀으로 앞의 39-40의 말씀의 의미를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타인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생각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장마가 길어지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경제적인 손실도 생기지만 사람의 생명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건들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이해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성도님들도 뉴스로 보셨을 춘천시 의암호에서 실종된 공무원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폭우가 내린 호수에 아내의 출산으로 휴가 중이던 공무원이 출근을 해서 일을 하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기사의 내용들을 보니 폭우로 인한 위험한 상황임을 이 일과 관련된 공무원들이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가 중이던 공무원을 굳이 호수로 보내 일을 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상대방을 ‘조금만 생각했다면’, 직장 동료를 ‘조금만 배려했다면’ 폭우가 쏟아지는 위험한 상황으로 휴가 중이던 공무원을 출근시켰을까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나도 하기 어려운 일을 상대방에게 시켰을까 싶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율법을 넘어 오늘 말씀과 같은 더 높은 차원의 행동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 실천만이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높은 차원의 사랑 행동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미국의 영성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리더가 죽게 되자 다음 리더를 세우기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리더가 될 수 있는 여러 명의 후보들이 있었는데요. 후보자 중 한 사람이 다른 후보가 자신의 입으로 “나는 왕이다.”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보자가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왕입니까?” 다른 후보자가 “네, 나는 왕입니다.”라고 소문에서 들은 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다른 후보자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자신이 이 공동체의 리더라고 생각하는구나.’라고 교만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나는 왕입니다.”라고 대답한 후보자가 자신을 찾아온 후보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왕이 아닙니까?”

“나는 왕입니다.”라고 대답한 후보자는 ‘우리 모두가 왕이다.’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 세상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처럼 높은 차원의 사랑 행동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들려드린 모두가 왕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예화처럼 우리 스스로가 빛이고, 소금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인식을 할 때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의 실천이 가능해집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옆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세상의 빛입니다.”, “당신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당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결코 밝아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빛을 세상에 비추지 않으면 세상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이제는 ‘너희들이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처럼 ‘빛’의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빛의 사람으로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조금 더 생각해’ 주실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기꺼이 실천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봄으로 누군가는 위로를 경험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도 더 충만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축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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