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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과 재해석

기사승인 2020.08.09  01: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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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마스의 규범적 진화이론 (2)

▲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융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그 2세대에 해당하는 유르겐 하버마스에 이르러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게 된다. ⓒGetty Image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최초의 해석 시도는 5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적으로 관심 있게 활성화시켜 보려는 데에 있어 장애로 대두되고 있는 어려움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주관해 나가는 서독에서의 자본주의적 복구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경험은 마르크스식의 자본 분석을 단순히 그냥 이어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당시의 중요한 마르크스해석들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탈역사화된 형태의 또는 탈경제화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소련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이론은 아주 근본적으로 하나의 변증법적 보편과학으로 존재론화되어 버렸다. 전쟁 이후의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아주 강력하게 철학적 소외이론으로 중립화되어 버려, 거기에서 실천적 방향에 의거한 자본주의 비판의 관심을 찾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론적 상황에서 마르크스의 초기작품에로 되돌아가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론적 의의를 비판적 사회이론으로 다시 붙잡을 수 있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하버마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해석의 변천

역사적 유물론의 소련 마르크스적 견해에 반대해서 하버마스는 그의 마르크스해석의 초기 단계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경험적 역사적 논증의 맥락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보편역사적 발전법칙으로 개념 파악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규범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 정치적으로도 실제의 현실적 역사경험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발전논리의 마르크스 이론은 어떤 역사내재적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없고 다만 철학적으로 현재를 분석해서 역사적 발전의 개방성을, 정치적으로 이제 비로소 실현해야 하는 역사의 의미의 형성에 사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하버마스는 갖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은 경험적인 현재에 대한 緞 철학적인 현재 해석에 엄격히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서유럽에서는 전쟁 이후 철학이 마르크스이론을 실존주의적으로 또는 인간학적으로 탈정치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을 반대해서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이론의 실천적 논증의 연관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다만 경험적으로 근거지워진 현재 분석만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그 역사적 유물론이 주장하고 있는 해방의 목표를 실천적 정치적으로 산출해냄으로써 비로소 이론적으로 완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외에도 역사적 유물론은 모든 다른 이론들처럼 하버마스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역사적 실천적 관심의 맥락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경험적 사회학적 정리와 실천적 정치적 방향설정을 하버마스는 “경험적으로 반증가능한 역사철학을 실천적인 의도로서” 시행해 보려는 계획과 함께 묶어 놓는다. 마르크스이론은 경험적으로 근거확립된 사회탐구로서 자본사회주의의 위기의 맥락을 연구하며, 그것을 철학적으로 근거제시가 되고 행위의 지침이 되는 비판에서 정치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TuP, 244쪽 이하, 428쪽 이하).

그런데 “실천적 의도의 경험적으로 반증가능한 역사철학”은 그 자체 유물론적 역사해설을 위한 분석가능성을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실증주의 비판의 고찰로서 시작된 사유가 하버마스로 하여금 역사적 유물론을 인식이론적으로 새롭게 파악하도록 강요한다. 만약 자연과학적인 이론형성이 자연개발의 종의 역사적 과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면, 비판적 사회이론의 학문 개념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단지 사회적 현재경험에서만 확정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대상영역의 이론 역시 인식이론적으로 어떤 학문이전의 경험의 과정에-그 과정을 통해서 종이 실천적으로 자기를 재생산해 내고 있다-소급 연결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마르크스의 구별을 “도구적” 실천, “의사소통적” 실천이라는 두 가지 행위형태의 구별로 끌고와서(TWI, 9쪽 이하, 48쪽 이하) 그로써 자연과학적 이론형성과 사회과학적 그것과의 차이를 사회의 재생산과정의 두 길 위에 실용주의적으로 근거 지을 수 있게끔 만든다. 자연과학들이 자연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려는 인식주도적 관심에 의해 주도될 수 있다.

여기서의 관심은 인간의 생활형식이 언어화됨과 더불어 종의 역사적 생존의 필연성이 되어버린 그런 관심이다(TWI 에 실린 Eu I 볼 것). 역사적 유물론은 이제 더 이상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그의 초기 마르크스 해석에서 보이고 있듯이, 어떤 사회적 관심의 맥락에다 근거지울 수 없고(이 맥락은 실제의 현실적 역사의 형세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있다.) 오히려 그 자체가 종의 역사적 재생산의 과정의 결과로 파악되어야 한다.

역사적 유물론은 심리분석의 방법론적인 모형에 맞추어 구상된, 종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이 되어 버린다. 이 이론에서는 사회적 상호행동관계의 지배체제적 억압을 재구성해냄으로써 집단적 자기성찰의 과정이 유발된다고 본다. 심리분석이 이론적으로 주도되는, 삶의 역사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병리학적으로 찢겨진 개인의 삶의 조정에서부터 이 개인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듯이, 역사적 유물론도 종의 역사의 해석을 통해 지금까지는 자연 성장적이었던 지배의 역사에서부터 집단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적 역사이론을 더 이상 현재의 경험에 기반을 둔 역사철학이라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종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파악한다(Eu I. Kap III).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노동 개념의 비판

흔히 『파리논고』라고 불리우는 『국가경제와 철학』의 마지막 장인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전반에 대한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

헤겔의 ‘현상학’과 그 최종결과의 위대함은 따라서 헤겔이 인간의 자기생산을 하나의 과정으로, 대상화를 탈대상화 - 표면화 - 이 표면화의 지양으로 파악한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상적 인간을 견지한 데에-실제의 인간을 그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 개념파악하기 때문에–있다.(1)

마르크스에 의하면 헤겔의 정신철학의 신화를 벗어버려야만 우리에게 비로소 세계사를 노동을 통한 인간종족의 자기 생산의 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의 철학을 “자연주의”내지는 “인문주의”(미주 2)라 칭하여 그로써 그 철학을 관념론뿐 아니라 구유물론의 입장과도 구별짓는다.

하버마스는 앞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을 “사회적 삶의 재생산의 법칙들에서부터 인간종족의 세계사적 형성과정을 재구성해 내려는”(TWI, 45쪽) 시도라고 해석한다. 하버마스를 따르면 마르크스는 여기서 사회적 노동의 체계가 변화돼가는 메카니즘을 “자연의 과정을 노동을 통해 활용하고 있는 이 축적된 힘이 갖고 있는 모순과 자연적으로 규제되고 있는 상호행동의 제도적 테두리”(같은 곳) 안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여기서 상호행동과 노동사이의 본래적인 관계를 설명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라는 특수한 칭호아래 한 행위를 다른 행위에로, 즉 의사소통의 행위를 도구적 행위에로 환원시켜 버리고 있다고 비난한다(같은 곳을 볼 것).

하버마스에게 있어서는 노동과 상호행동은, 중재하는 매개체로서의 언어와 함께, 인간주체의 구성요소들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의 유형들-이것을 통해 인간은 자연 및 사회와 실천적으로 관계를 맺는다-이기도 하다.(3)

마르크스는 노동개념을 “물리적 생산”이라는 의미로, “인간의 본질적 힘이 실천적으로 표출된다”는 의미에서 실천의 근본범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하버마스에 의하면 일종의 환원론적 경향이며, 거기에서는 인간이 그의 자연적 주위세계와 갖는 도구적 교섭관계가 기술적 사용(제어, 지배)이라는 관점 아래에서 인간 삶의 실천의 범형 그 자체가 되어 버리고 있다.

마르크스가 상호행동을 노동과 함께 사회적 실천이라는 이름아래 함께 내던져 버리지 않았다면, 그 대신 종합이라는 유물론적 개념을 도구적 행위의 수행하고뿐 아니라 의사소통적 행위와의 연결하고도 똑같은 정도로 연관시켰다면, 인간에 대한 학문의 이념이 자연과학과 동일시되어버려 어두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EuI, 85쪽)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하버마스의 주된 반대는, 마르크스 자신 그의 내용적 분석에 있어 종의 역사를 노동과 상호행동이라는 범주의 관련 테두리 안에서 개념 파악했으면서도 “범주적 차원”에서는, 즉 “철학적 관련체계”안에서는(EuI, 58쪽) 오직 노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상호행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는 이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기자신의 탐구실천 자체를 왜곡하여, 노동에게만 종합의 소임을 떠맡기고 있는데, 이것은 하버마스에 의하면 본디 노동과 상호행동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4)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생산력의 우월성 비판

마르크스, 특히 후기 마르크스는 주로 순수 경제적인 역사관을 옹호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역사학자들이 경제적인 것을 망각하였고, 그러기 때문에 역사를 “역사밖에 놓여 있는 가늠기준”에 따라 서술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갈파한다.(5) 여기에서 마르크스를 붙들고 있는 확신은, 역사의 본래의 가늠쇠는 그때 그때의 생산력의 수준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역사적 유물론에서 분석적으로 그 안에서 인간종족의 자기생산이 전개되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을 구분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기술공학적 발전의 축적적인 전개의 차원을(생산력, 노동력) 지배의 형태, 계급투쟁, 해방의 과정 등의 전개의 차원(생산관계)과 구별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이외에도 사회적인 움직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억압된 계급의 조직화된 투쟁자체를 생산력이라 이해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두 원동력사이에, 즉 한편에서는 기술적 조직적 진보와 다른 편에서는 계급투쟁사이에, 하나의 혼동되는, 어쨌든 충분히 분석되지 못한 연관을 산출해내고 있다.(6)

하버마스에 의하면 한 사회는 생산력 발전에 힘입어, 즉 “기술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지식(자연과학을 기계장치에로 변형 응용시키는 것까지 포함)의 생산”에 힘입어(EuI, 27쪽) 외적 자연의 폭력에서부터 해방되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 생산력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해방의 가능성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 생산력이 상승되고 발전됨에 따라 이 생산력이 기술적 과학적 진보에 얽매어 있음이 드러나고, 여기서의 예속성은 동시에 급기야 경제와 정치사이의 관계까지 뒤바뀌게 만들어, 드디어는 생산력이 지배를 합법화시키는 기능까지도 떠맡도록 만들고 있다.(TWI, 92쪽)

권력을 쥔 조직에서부터의 해방은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쟁하는 계급의 혁명적인 활동을 통해서(반성하는 학문들의 비판적인 활동까지를 포함) 가능해진다. 사회적 실천의 두 범주가 함께 합쳐져서 비로소 마르크스가 헤겔을 해석하며 종의 자기생산행위라 칭한 그것을 가능케 한다.”(EuI, 72쪽)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역사의 주체 비판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이어야 하며 그것도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 차원이란 마르크스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의 자연 및 동료인간들과의 대립투쟁이며, 이 대립투쟁은 그 본질에 있어 경제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에서부터 역사 관찰방식을 인수받고는 있지만 칸트식 의미의 초월론적 의식의 자리에, 또는 헤겔식 의미의 절대정신의 자리에 그때 그때의 구체적 인간종족을 주체로 내세우는데, 이 인간종족은 노동을 통해 자기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요구하듯이, 노동과 상호행동이 아니고(7) 오직 노동만을 인간종족의 유사초월론적 종합으로 개념파악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실증론적으로 오해하여 그 뒤를 잇는 실증주의에게 문을 확짝 열어주고 있다.(8)

마르크스에 의하면 구체적 인간종족은 자신과 객관적인 자연을 실제적인 노동을 통해 중재하고 있다. 이 활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이긴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란 것은 또한 동시에 상황에 대한 반작용(대처)이기도 하다. 역사에 있어 중요한 행위는 대개 개별주체들에서부터 출발된 것이기 보다는 한 계급에서부터 출발된 것이다. 계급이란 단순히 이론적인 분류가 아니고 실제이다. 계급의 중요성은 계급의 물질적 관심을 통해 입증이 된다. 마르크스는 계급개념을 보편적 역사철학적 관점 아래에서 전개시키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에게 본질적인 것은 자신의 현재의 역사를 짊어진 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뿐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그의 시간인 이 세계사적 시간에서 인류를 대변하는 대변자이다.”(9)

하버마스는 마르크스 이래 대두된 사회적 변동에 유의하게끔 만든다. 마르크스가 확인한 국가와 사회의 분리는 상호적인 제한이라는 관점에서 지양되어 버렸다. 이로써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상층구조와 토대라는 계급적 관계에”(TuP, 228쪽)서 있지 않다. 소외는 오늘날 더 이상 그전처럼 경제적인 비참의 형태에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차원에서 소외를 얘기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소외의 요인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경제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단순한 월급장이의 노동 계약 안에 은폐된채 고정되어 있는 폭력관계의 표현을 지배는 정당화시키고 합법화해 버린다. 이렇듯 미래의 사회주의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은 해체되어 버린다. 그 결과 “이러한 형편아래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혁명이론도 청취자를 얻지 못한다.”(TuP, 229쪽)

미주

(미주 1) K. Marx, Nationalökonomie und Philosophie (Köln/Berlin, 1950), 242/3쪽. 이 잘 알려진 마르크스의 말을 하버마스는 그의 여러 작품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J. Habermas, Erkenntnis und Interesse (= EuI)(1979), 59/60쪽; J. Habermas, 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 (= TWI)(Frankfurt a.M., 1978) 45쪽; J. Haberma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TuP) (Frankfurt a.M., 1978), 249쪽.
(미주 2) K. Marx, 윗책, 248쪽 볼 것.
(미주 3) 여기에서 하버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산과 행위, poiesis 내지 techne와 praxis의 구별을 받아들이므로써 노동의 독점적 위치를 무너뜨린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poiesis라는 개념을 기술적 제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노동 또는 기술적 행위라는 개념으로 번역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praxis라는 개념을 상호행동 또는 의사소통 행위라는 개념으로 번역한다.” M. Theunissen, Gesellschaft und Geschichte. Zur Kritik der kritischen Theorie (Berlin, 1969), 20쪽.
(미주 4) “마르크스는 반성을 생산의 모형을 따라 개념파악하고 있다.”(EuI, 61쪽) 이 문제점에 관해서는 A. Honneth, “Arbeit und instrumentales Handeln, Kategoriale Problem einer kritischen Gesellschaftstheorie,” Arbeit, Handlung, Normativität. Theorie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2, A. Honneth 와 U. Jaeggi(엮음), (Frankfurt a.M., 1980), 185-223쪽; J. P. Arnason, “Marx und Habermas,” Arbeit, Handlund, Normativität, 139-184쪽.
(미주 5) W. Schulz, Philosophie in der veränderten Welt (Pfullingen, 1976), 561쪽.
(미주 6) 하버마스는 초월 의식의 자리에 “문화적 여건아래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있는, 다시 말해 학습과정속에서 이제 자신을 비로소 구성해내고 있는 인간종”(EuI, 240쪽)을 놓는다. 그러기 때문에 하버마스에 의하면 노동만이 아니라 계급투쟁까지도 “종합”이라는 범주 속에 포함된다. “종합은 어떤 초월 의식의 기능이 아니고, 어떤 절대적 자아의 정립도 아니고 더 더욱이 어떤 절대정신의 운동도 아니고, 자신을 역사적으로 생산해 나가는 어떤 종의 주체의 경험적임과 동시에 초월적인 행사이다.”(EuI, 43쪽) 하버마스에 따르면 인간종족의 자연사적 자기구성이라는 이념이 그들을, 즉 생산적 활동을 통한 자기 생산과 비판적 혁명적 활동을 통한 학습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종합이라는 개념은 노동이 갖는 기술적 도구적 차원 외에도 투쟁이 갖는 상호행동적 의사소통적 차원도 받아 들여야 한다.(EuI, 76쪽 이하, 86쪽 볼 것) W. Marx, “Grundbegriffe der Geschichtsauffassung bei Schelling und Habermas,” Philosophisches Jahrbuch 81 (1974), 64쪽 이하 볼 것; W. Kunstmann은 하버마스의 이러한 사유방식을 노동과 상호행동, 기술과 삶의 이원론이라고 칭한다. W. Kunstmann, Gesellschaft - Emanzipation - Diskurs. Darstellung und Kritik der Gesellschaftstheorie von J. Habermas (München, 1977), 44쪽 이하, 62쪽 이하.
(미주 7) J. Habermas, Zur Rekonstrultio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RHM) (Frankfurt a.M., 1976), 32쪽.
(미주 8) RHM, 10쪽;  EuI, 86쪽; J. P. Arnason, “Marx und Habermas,” Arbeit, Handlung, Normativität, 140쪽; A. Wellmer, “Kommunikation und Emazipation, Überlegungen zur ‘sprachanalytischen Wende’ der kritischen Theorie,” Theorie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175족 이하 볼 것.
(미주 9) W. Schulz, 윗책 563쪽.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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