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가라지: 자기를 의롭다 믿고, 높이는 자(출 12:51-13:10; 롬 3:21-31; 눅 18:9-14)

기사승인 2020.08.07  16:48:28

공유
default_news_ad1

- 성령강림후 열째주일(8월9일) 평화·통일주일

1. 고슴도치들의 버닝맨 축제

▲ 함께 있는 고슴도치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책 『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에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슴도치들이 추운 날씨에 서로 온기를 나누려고 모여들었지만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딜레마를 통해 인간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표현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도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관계를 나누지 못하는 현재가 바로 고슴도치 딜레마 상황입니다. 이것은 남과 북에도 해당이 됩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가요? 물론 쇼펜하우어는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다가서지 않는 이러한 거리두기가 과연 정당한가를 묻습니다.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남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이 딜레마를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학과 자아의 분석(Group Psychology and the Analysis of the Ego)』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없는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관계에는 나르시시즘(자기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프로이드는 인간관계를 나르시시즘만 존재하는 관계로 보았을까요? 프로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결혼, 우정, 부모-자식 관계 등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에는 혐오(aversion)와 적대(hostility)의 감정의 잔여물이 존재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은 억압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이지만, 동시에 고슴도치의 가시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시가 없는 고슴도치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인간의 나르시시즘은 강력한가요? 나아가 남과 북은 서로에게 고슴도치가 되어 아픔만을 줄 수밖에 없는 관계인가요?

오늘은 평화통일주일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은 평화로 하나가 되던지, 그렇지 않으면 평화로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북한에 대한 혐오와 적대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이렇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축제가 있습니다.

미국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에서 1년에 한번 8월 마지막 월요일부터 9월 첫째 월요일(노동절)까지 개최되는 버닝맨(Burning Man)축제입니다(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축제가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버닝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창립자인 래리 하비가 1986년 하지(夏至, 24절기 중 낮이 가장 긴 10 번째 절기)를 기념하며 2.4m 크기의 나무 인형인 ‘더 맨(The Man)’에 ‘불을 붙이고(burn)’, 완전히 소각하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축제의 참가자는 플라야(Playa)라 불리는 염전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자신을 표현하면서 생존합니다.

▲ 버닝맨 축제 모습

축제의 슬로건은 ‘창조와 자유, 무소유’입니다. 참가자들인 버너(Burnner)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쓰러뜨리는 무자비한 경쟁 사회가 아니라, 무소유에서 삶의 자유를 만끽하며 연대의 공동체를 창조합니다. 이렇게 ‘참여’, ‘예술’, ‘자기표현’,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축제가 열리는 1주일 동안 모든 사람들은 물질로 가득했던 도시를 벗어나 그들이 원하고 내키는 것들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듀크 대학교 행동경제학자인 댄 애리얼리 교수도 이 버닝맨 축제에 참가하였고, 소감을 그의 책 『상식 밖의 경제학』 (청림출판, 2008)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음식을 준비한다. 심리학자는 무료로 상담치료를 해준다. 마사지하는 사람은 앞에 누운 사람을 마사지한다. 물을 가진 사람은 샤워 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음료수와 직접 만든 장신구를 나눠주고 포옹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MIT소품가게에서 퍼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풀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매우 생소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버닝맨의 규범에 적응이 되었다. 놀랍게도 버닝맨은 내가 겪어본 곳 가운데 가장 포용력 있고 사회적이며, 서로를 배려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최근 미국의 기업들은 ‘버닝맨 정신’을 기업 문화에 도입합니다. 구글의 창립자인 래리 페이지도 열렬한 버닝맨 참가자였고, 실리콘 밸리의 문화 역시 버닝맨 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버닝맨의 정신은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공동체 정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 이러한 버닝맨 축제가 생긴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고슴도치들의 버닝맨 축제’가 혐오와 증오, 미움과 원한을 다 태워버리고, 이렇게 포용성과 배려를 통해서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 통일과 희망의 시대를 가져오기를 소원합니다.

2.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포용과 배려, 사랑과 나눔 보다는 오히려 혐오와 증오, 미움과 원한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세상 풍조에 따라 사는 거짓 그리스도인들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듭니다. 알곡의 삶이 가라지의 삶보다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지난주에 이어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과 ‘교회 생활만 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성경의 비유로는 ‘알곡과 가라지’라고 말씀드렸죠? 오늘 설교의 제목은 ‘가라지’인데, 다음 주인 성령강림후 열한째 주일부터 마지막 열셋째 주일까지는 알곡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알곡과 가라지가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비유로 잘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가라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9-12)

▲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바리새인이! 또한 토색하지도, 불의하지도 않고, 간음도 하지 않으며 세리와 같이 착복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가라지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합니다. 십일조도 잘 드립니다. 그런데 가라지라뇨? 그렇다면 알곡은 누구일까요? 세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세리는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리새인과 달리 세상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a)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가라지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생활을 잘 하더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가라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애굽의 가라지’로부터 ‘히브리라는 알곡’을 구원해주신 사건이 바로 유월절이고, 또한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우리민족이 구원을 받은 날이 광복절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평화·통일주일인데,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전범국인 일본이 분단된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광복, 해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과 북이 다시 평화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여망을 담은 것이 바로 8·15 광복절을 기념하는 평화·통일주일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인 유월절과 무교절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 본문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출애굽을 회상시키시며 유월절 규례를 설명해주십니다(출 12:43-51).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출 12:51)신 이후에 무교절에 대한 규례가 이어집니다. 그 규례의 내용은 처음 난 모든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1-2) 이때 먹을 음식에 관해서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출 13:3-6)

▲ 무교병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지킵니다. 무교절은 본래 보리 추수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농경 축제였습니다. 이스라엘 전례력으로 첫째 달인 아빕월(태양력 3-4월로 ‘아비브’라는 말은 ‘푸른 곡식의 이삭들’이라는 뜻) 열다섯 번째 날(15일)에 시작되어 7일간 계속됩니다. 이때는 빵에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는데, 이것은 묵은 곡식으로 만든 누룩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빵은 새로 추수한 곡식으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결부된 이 무교절은 애굽 탈출을 기념하여 집안의 모든 누룩을 없애고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가 되었고, 나중에는 유월절 축제와 결합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 13:7-10)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킬 때,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죠? 무교병을 먹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호와 미간의 표로 삼고 항상 입에서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사건을 잊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가라지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잘 통찰하였습니다.

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바울은 인간 실존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렇습니다.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졌습니다. 율법의 조문들이 지키기에는 너무 어려워,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로 말미암아 범죄한 우리 인간이 다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또한 이 구원의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또한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신 속량의 은총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3-26)

5. 자랑할 데가 어디냐? 

따라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롭습니다. 가라지가 아니라, 알곡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 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지난주 말씀처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바울 자신의 교리를 일치시키기 위해,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대조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의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음성을 들어 볼까요?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 바울은 앞서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대조했다가, 다시 율법을 긍정합니다. 율법의 파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우리의 행위, 곧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지켜 준수한다는 것입니다. 알곡이 된 사람은 다시 가라지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시절을 생각해서 늘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었기에 자랑할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니,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b)

6. 영세중립국가를 향하여

▲ 영화 <강철비> 포스터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2>(2020)가 개봉되었습니다. <강철비1>(2017)도 그렇지만, 후속작도 한반도 주변 열강의 입장을 잘 보여주며 영화적 긴장을 잘 조성하였습니다. 특히 미국의 네오콘(Neocon, 미국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보수주의자들로 대부분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유대인들이다. 지연과 혈연, 학연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은 미국의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통령비서실 등 권력의 중심부와 학계 및 언론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과 일본의 극우 세력, 그리고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하는 중국과 북한 군부 강경파의 민낯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지도자,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남북미 정상회담을 북한 원산에서 개최합니다. 그러나 북미 사이에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핵을 먼저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핵을 포기할 것인지 북미 두 정상은 줄다리기를 합니다.

이렇게 두 정상이 줄다리기를 할 때,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평화체제 수립에 반발하는 북 호위총국장 박진우(곽도원 분)가 군부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 세 정상을 납치합니다. 납치된 세 정상은 북한 핵잠수함 백두호 선장실에 인질로 갇힙니다. 여기 함장이 호위총국장의 동생 박철우(류수영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함장실 안에서 예기치 못한 진정한 정상회담이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로즈버드(핵심이 되는 소재)’는 핵잠수함 백두호 함장실 안(한반도)에서 풍기는 ‘담배연기’와 ‘방귀’입니다. 담배는 북한이, 방귀는 미국이 내뿜습니다. 여기서 담뱃불과 연기는 북한의 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미대통령의 방귀는 미국의 방해를 뜻하죠? 그러나 이 냄새, 곧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대통령 한경재(정우성 분)는 미국 스무트 대통령(앵거스 맥페이든 분)과의 통역을 북한의 국방위원장인 조선사(유연석 분)에게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엉켜진 매듭을 풉니다. 잠수함 내에 부함장 장기석(신정근 분)을 위시한 쿠데타 진압 세력이 나타나 세 정상을 돕는 것입니다. 부함장은 잠수함 내 만약을 대비한 위원장 탈출용 소형 장치를 찾아 위원장을 내보내려 합니다. 의자를 치우니, 두 사람이 간신히 탈 수 있습니다. 이때 한경재는 두 사람을 태우고 자신은 잠수함에 남습니다. 자기희생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미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정상회담, 곧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서 자신은 위험한 잠수함에 남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영화는 잠수함에 갇힌 세 정상이 북한의 쿠데타를 극복하고,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북미간 평화체제 수립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영화처럼 쉽지 않습니다. 미국 네오콘이 단순하지도 않고, 일본의 극우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중국의 부상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고, 북한의 강경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장면에 광화문 광장에서 남북 정상이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과 북이 손을 잡고 하나가 될 때, 외세를 극복한 평화의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뜻일까요? 저는 그 새로운 세상을 한반도 전체가 영세중립지대가 되고, 남과 북이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가(permanently neutralized state)가 되는 것에서 꿈꾸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평화와 통일은 교만한 가라지들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자기를 의롭다 믿고 자기를 높이는 자들은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만들지,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늘의 백성이 그들의 아름다운 실천을 통해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알곡이 되어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일구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