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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법, 지체에 있는 법: 이수돈오 사비돈제(理雖頓悟 事非頓除)

기사승인 2020.08.04  16: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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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여정의 오솔길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신앙적인 것에 대하여 의심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경한 것처럼 여겨졌다. 궁금한 것이 있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질문하면, 신앙이 약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성적으로 이해가지 않는다고 하면, 불합리한 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라는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어떻게(?) 하다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말갈족(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와 말을 갈아탔다고, 신학적 사유가 부족한 것을 놀리면서 하는 말)이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교회에서 알게 되었던 것들과 매우 다른 신학적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듣던 말들이 듣던 것과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경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합리한 것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이 했던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는 말에서 비롯되었고, 그 말마저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이 신앙과 이성이 대척점인 것처럼 자주 인용되지만, 믿기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당시에 합리적인 사유를 한다고 자부하던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유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합리성을 뛰어넘는 또 다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그것은 합리성에 미치지 못하는 비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을 뛰어넘는 초합리성의 영역이었으나 당시에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올바른 신앙과 믿음은 의심을 동반하고, 질문을 허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말로 할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잘못 인용되고 있던 터툴리안의 말과는 반대로 ‘신앙이 이해를 동반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고 명확하게 이야기한 11세기 안셀름의 견해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는 왜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았을까를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더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을 알게 되면서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교 안에서도 합리성에 미치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태도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목회 현장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이런 당시의 생각은 절반의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학을 공부하던 도중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도서관에 어떤 책을 읽던 순간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가졌던 발칙한 신앙적 의심 중에 하나가 ‘혹시 예수는 사탄이 보낸 사기꾼이 아니었을까?’하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이런 질문을 했다가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한다는 듯한 눈초리를 느끼고는 다시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의 제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중세 시대의 어떤 수도사가 내가 했던 질문과 거의 비슷한 의심을 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수도사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서 서술했던 내용이 그 책에 실려 있었다. 그 해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만 나보다 천 년전에 살았던 수도사가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과 똑같은 유형의 질문을 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직도 도서관에서 ‘유레카’라고 외치며 뛰쳐나오고 싶었던 심정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 책을 통해서 내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 의해 공감받고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성과 신앙이 서로 보완적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차츰 배웠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의 본성과 위배될 수 없음을,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들 수 없는 돌을 만드시지도 못하시고’, ‘네모난 원’을 만드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신학함의 기쁨에 도취되어 그것이 만들어내는 물매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초합리적인 것을 꿈꾸면서도 합리적인 것의 한계 내에서 신학을 하면서 차츰 이신론理神論에 기울었고, 그리고 점차로 기능적 무신론자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성적인 작업을 통해 합리적인 것을 뛰어넘는 초합리적인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습관과 패턴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기존에 살면서 형성된 자신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불가의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이라는 책에서 이를 ‘이수돈오 사비돈제理雖頓悟 事非頓除’라고 하였다. 이치는 순식간에 깨우칠 수 있지만, 삶의 습관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새번역 로마서 7:21~24)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성적인 앎만으로 부족한 영역이 우리 몸과 마음의 영역이고, 지성적인 훈련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학교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신학을 하면서 맛보았던 해방감이 또 다른 형태의 차꼬를 만들어 채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칼 폴라니라는 사회학자는 이를 ‘암묵적 영역’이라고 하였다. 이 영역은 합리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초합리적인 영역이며 지성적인 사유로는 그저 어렴풋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지극한 시간과 태도를 통해 닦아나갈 때,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앎의 영역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신비’라고 하였다. 체험은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 말로 표현은 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찬란한 어둠’,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순수한 사랑의 응시’, ‘거룩한 빛에 의해 완전히 투명해진 영혼의 창’ 등과 같이모순적인 어휘나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어휘로만 설명되는 영역이다. 이들의 체험은 근대적인 학문 영역을 통해서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성직자이기에 체험하게 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이 그들의 체험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theos-logos), 그것이 바로 신학함이었다. 그 신학함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도, 단지 지성적인 작업만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마음을 닦고, 조율하며, 지극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따라가야하는 길인 것이다.

김오성 목사님의 이 글은 ‘평화교회연구소’(소장 황인근 목사)가 발행하는 웹진 「주간 평화교회」 39호에 실린 것을 평화교회연구소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와 김오성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김오성 목사(한국살렘영성훈련원) peacechurch2014@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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