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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은 학살당했고 역사에서 삭제되었다

기사승인 2020.07.31  16: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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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시 (N. Malathy) 박사와의 인터뷰

▲ 말라시 박사
다른 많은 타밀들과 마찬가지로 말라시(N. Malathy) 박사는 스리랑카 정부의 지속적인 억압 때문에 1970년대에 스리랑카를 떠났다. 2002년 스리랑카와 LTTE 사이에서 시작된 평화 프로세스 기간 동안 그녀는 인도주의 일꾼으로 일하기 위해 뉴질랜드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타밀 주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정책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북동 인권사무국의 주도적인 멤버였다. 말라시 박사는 여성단체인 LTTE 평화사무국, 여성개발 및 재활센터, 고아원과 긴밀히 협력했다. 스리랑카가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타밀 주의 북부와 전면전을 벌일 때, 수천 명의 다른 나라들과 이들과 함께 조국을 떠나야 했다. 스리랑카 군은 그녀를 강제수용소에 4개월 동안 구금했다. 말라시 박사는 『나의 조국에서의 덧없는 순간: 사실 상의 국가인 LTTE의 마지막 해』(2012년)라는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타밀족의 국가건설과 파괴 과정, 그리고 스리랑카 포로수용소에서 그녀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뉴질랜드에서 수십 년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하셨는데 2002년부터 시작된 평화 프로세스 동안 그 평안한 삶을 떠나 타밀지역으로 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저는 타밀이고, 제가 어디에 있든지 저는 제 민족의 투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몸은 뉴질랜드에 있었지만, 마음과 영혼은 내 백성들과 함께 있었고, 지금도 함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뉴질랜드에서 사회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긴 전쟁 후에, 2002년 평화 프로세스는 타밀 뿐만 아니리 스리랑카 전체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평화 프로세스에 성공했다면 스리랑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 중 하나가 되었을 것 입이다.

처음에 저는 타밀 주(州)가 다양한 봉사를 통해 완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북부의 바니로 몇 차례 짧은 여행을 했고, 2005년부터는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20년에 걸친 전쟁과 60년 이상의 탄압 속에서 타밀은 복지 서비스, 여성 센터, 고아원, 의료 센터, 농장, 언론기관, 문서 센터, 학교, 법원, 은행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회 인프라들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십 년의 긴 억압 끝에 전쟁의 페허에서 나온 새로운 국가였습니다. 나는 그 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타밀들은 다른 모든 이들처럼 동등해지도록 국제적인 인정과 지원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영국, 인도의 눈에는 LTTE(Liberation Tiger of Tamil Eelam,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가 ‘테러 조직’이었지만, 중국과 일본은 물론 다른 EU 국가들은 LTTE를 타밀 국가의 지도력으로 보았습니다. 타밀에게 그들은 해방자였고 정부였습니다. 이들 국가의 많은 대표자들이 타밀 국가 지도자들을 만났고, 이들의 주선으로 LTTE 대표들이 주요 유럽들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 프로세스 동안 중국은 바니에 무역 대표단을 파견한 첫 번째 국가였습니다.

저의 언어 능력과 네트웍을 사용해 바니의 주민들과 함께 정의로운 함께 평화를 이루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스리랑카의 인권 침해를 문서화했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는 평화사무국의 서한을 초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 민족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지극히 기본적인 요구,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평등해지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을 반영했습니다. 사실 평등을 쟁취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과 전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평등을 위한 투쟁은 국제법과 도덕적 양심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투쟁은 모두가 평등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2007~2009년 전쟁을 경험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싱할라 우파 민족주의 세력은 2002년 정전협정과 평화프로세스 체결 이전과 그 과정에서 매우 약했지만, 스리랑카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2005년부터 2006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LTTE와 인간적인 협상을 통한 정치적 해결보다는 가장 잔혹한 군사적 해결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실, 전쟁은 200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2006년 8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타밀 여성들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리랑카 공군은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있던 바니의 타밀 도시 킬리노치의 고아원을 폭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54명의 어린 소녀들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같은 기간 스리랑카 보안군은 동부 트린코말리 항구를 중심으로 전면전을 벌여 2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습니다. 트린코말리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항만 중 하나이며 2002년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스리랑카 정부에게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타밀 지역을 점령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 항구의 확보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의 가장 핵심 사항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처럼 군대를 보내 전쟁을 치르지 않고 스리랑카 국가와 안보군을 여러모로 지원해 타밀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의 구체적인 패턴이 있었습니다. 보안군이 먼저 한 지역을 포위했고, 식량과 의약품을 차단한 뒤 지상과 공중에서 민간인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2007년, 최소 50만명 이상이 거주하던 북부의 바니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수법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것은 완전한 전쟁이었습니다. 곧 유엔 기구들을 포함한 모든 국제 NGO들은 스리랑카로부터 이 지역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고, 어떤 기자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니에게 오는 필수품들은 모두 스리랑카에 의해 저지되었고, 음식도, 약도, 연료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략물자였기 때문입니다.

공중폭격은 매우 흔했는데, 처음에는 매주, 나중에는 매일 있었습니다. 무차별 폭격이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피난처로 찾은 예배처, 병원, 학교들 마저도 여러 차례 폭격을 당했습니다. 병원이 폭격을 당할 때마다 타밀 보건소 직원들은 병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또 이 임시 병원이 폭격을 당한 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스리랑카의 유엔 대변인은 병원 이전이 16번 있었고 이들 지역은 60번 이상 폭격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대학살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복지관 앞에서 음식을 줄지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폭격을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피를 흘리는 가족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커에서 나오면 그들은 다시 폭격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포격과 폭격 직후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갔던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스리랑카 보안군은 일부러 민간인을 겨냥했습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한 민족을 섬멸하는 전쟁범죄나 반인륜적 범죄 그 이상이었고, 대량학살이었습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있는 우리들 중 몇몇은 학살사건에 대해 전 세계에 알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LTTE는 휴전을 요구했고, 멜버른, 타밀 나두, 런던, 뒤셀도르프, 파리, 오슬로, 토론토 등지에서 수천 명의 타밀이 모국에 대한 전쟁을 중단하라는 대중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단 한 차례도 이런 상황을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부 EU 국가들은 스리랑카 국가가 휴전에 동의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싶었지만, 영국과 미국이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습니다.

2002년 평화 프로세스 당시 타밀 주는 약 1만5000㎢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상반기에 이르러서는 겨우 1.5㎢의 면적으로 축소되어 35만명을 수용하는 공원과 같이 축소되었습니다. 해안 지역에 위치한 이 작은 곳은 하늘과 육지와 바다에서 폭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백인 경찰관은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눌렀고, 반면 조지는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세계 열강의 막강한 지지를 받은 스리랑카 보안군은 2년 가까이 우리 목을 눌렀으며, 우리 타밀은 고국에서 살기 위해 숨을 죽이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살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민족으로서 평등과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타밀은 생존을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 LTTE 대원들은 유엔과 스리랑카 대통령, 국제중재자의 안전보장 약속을 받아 스리랑카 군에 투항했으나 스리랑카 보안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습니다. 결국 스리랑카 군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거의 30만 명이었고, 저는 이 캠프들 중 한 곳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14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방불명 되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유엔 보고서는, 전쟁 마지막에 사망한 타밀은 적어도 7만명이라고 합니다.

▲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은?

정부는 이 캠프들을 복지센터라고 불렀습니다. 전쟁 직후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이들 캠프 중 한 곳을 방문해 캠프운영을 위한 유엔의 지원을 승인했습니다. 실제로는 복지관이나 난민촌이 아니라 나치 강제수용소처럼 철조망으로 연결된 강제수용소였습니다. 스리랑카 군에 의해 통제되었고, 군대는 총기를 손에 쥔 채 우리 모두를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군대의 구타는 일상적이었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그들은 LTTE 일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데려갔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타밀 주의 민간 행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와 여자, 노인들까지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인종적 학대는 흔한 관행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싱할라로 스리랑카 국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용소 안에 갇혀 외출도 못하고, 기자들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열린 감옥과 같았습니다. 여성들은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고 아무도 이에 대해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타밀은 완전히 예속되었고, 싱할라는 승리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가끔 싱할라 내각장관이 캠프를 방문했을 때 함께 온 비디오팀의 호송대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던지고 나서 사람들이 땅에 떨어진 음식을 찾아 허둥대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며 영상을 찍곤 했습니다. 캠프에 있는 4개월 동안, 가장 우울하다고 느낀 것은 캠프에 있는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를 자주 했고, 어떤 아이들은 A형 간염에 걸렸으며, 신생아들은 태어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성인들에게도 불결한 수용소로 다시 보내졌습니다. 아이들은 화장실 바로 앞 더러운 곳에서 놀았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수의 파리와 모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화장실에서 바로 오는 파리 때문에 늘 오염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영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자선단체에서 가끔 나눠주는 분유를 제외하고는 도통 우유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생후 7개월 된 아기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모유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아기에게 줄 홍차에 설탕을 구하러 저에게 왔습니다. 홍차가 이 아기의 규칙적인 식사가 되었습니다. 일부 국제기구들이 영양 보충제를 배포했지만, 아이들을 위한 식단은 매우 부실했습니다. 우유, 고기, 야채가 없었고, 가끔 콩을 주기도 했지만 거의 썩어서 아이들은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병은 급속도로 번져 피골이 상접했으며, 작은 부상이 감염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엔의 원조는 없었으며, 그들은 이 상황을 전혀 감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은 스리랑카 정부와 보안군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운이 좋아 전쟁지역으로부터의 탈출했더라도 가족과 갈라져야만 했습니다. 종종 탈출하는 동안 가족의 일부는 스리랑카 쪽으로 건너가곤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수십 통의 편지를 썼으며, 실종된 멤버들을 찾기 위해 캠프 내 관공서로 눈물겹게 오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순전히 운이 좋아서 실종된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캠프 주위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전쟁터를 빠져 나온 사람들의 버스가 수용소에 도착할 때, 캠프에 있는 이들이 가족들을 찾기 위해 버스 뒤를 죽자고 달리는 가슴 아픈 장면을 보았습니다. 버스 안에 있던 누군가가 손을 흔들면 그것이 누구를 향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놓고 끝없는 추측이 나오곤 했습니다. 이는 전쟁 중에 흩어진 가족들을 애타게 찾는 그리움의 표시였습니다.

뉴질랜드 시민이었기 때문에 저는 강제수용소에서 4개월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한 민족으로서,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땅을 침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리랑카 정부가 우리를 범죄자로 취급하고 아이들까지 수용소로 끌고 간 것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의지를 말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전쟁을 겪은 사람으로서 한국인들과 국제사회에 어떤 당부의 말을 하고 싶으신 가요?

우리들의 투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상실과 고통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저항과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지 때의 일제의 탄압과 이에 저항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합니다. 제주 4.3과 광주 5.18의 가슴 아픈 죽음과 항쟁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합니다. 또한 독재에 저항했던 이야기, 분단의 고통과 평화통일에 대한 소망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우리 타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정부들과 이들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NGO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삭제하거나 편집합니다. 우리의 저항, 해방에 대한 희망, 조국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개인의 인권침해로 묘사합니다. 우리의 집단 정체성과 투쟁은 지정학적 의제에 어긋나기 때문에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쟁 후 미국이 후원했던 스리랑카 유엔 결의안은 타밀이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 타밀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스리랑카만 존재합니다.

제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경우는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스리랑카에 대한 민의 법정 제1세션에서, 두 번째는 독일의 브레멘에서 민의 법정 두 번째 세션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우리와 비슷한 집단학살의 경험을 가진 에콰도르 원주민들이 조직된 한 회의에서 였습니다. 이 모든 자리에서 참석한 이들은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고, 깊은 공감과 연대를 표했습니다. 희망이 있다고 느꼈고, 우리 타밀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한국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를 바랍니다. 글로벌 아젠다를 이유로 우리의 이야기를  삭제하거나 편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야기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이고 한 국가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닙니다.

신승민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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