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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이별의 분기점(사 1:1-8; 롬 1:8-17; 마 8:1-13)

기사승인 2020.07.31  16: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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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8월2일)

1. 이별의 분기점: 알곡은 떠나고 가라지만 남을까?

2020년은 다른 어떤 해보다 특별한 해입니다. 코로나-19를 통한 바이러스의 감염도 그렇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가기 위한 디지털 뉴딜이 시행되는 해이기도 하고, 교회적으로는 면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예배가 전환되고 모이기보다, 흩어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2020년을 ‘이별의 분기점’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이별을 말하는데, ‘미국과 중국’, ‘지식인과 노동계급’, ‘기업과 노동자’가 이별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50년 전부터 만나 소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2020년을 기점으로 이별한다는 것입니다.

▲ 미국과 중국의 이별

첫째 미국과 중국의 이별입니다. 현재 이 두 나라는 경제적, 군사적 대립이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별의 시작입니다. 최근에는 미국이 ‘스파이 활동 중심지’로 지목하며 폐쇄를 요구한 휴스턴 주재 중국총영사관이 철수 했습니다. 또한 중국 청두 주재 미국 총영사관도 중국 정부로부터 철수 요구를 받고 간판을 내린 뒤 짐을 싸고 있습니다.

물론 대사관이 주재국의 수도에만 있는 것과는 달리 영사관은 주재국의 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도시에 설치됩니다. 사증 등 증명서를 발행하고, 자국민을 보호하며, 타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 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도모하는 한편, 국제회의 등을 준비하는 영사관은 국가의 승인이 있어야 설치할 수 있는 대사관과 달리 국가의 승인 없이도 설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진핑 주석의 안정적 집권과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영사관을 폐쇄하는 등 긴장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욕망과는 별도로, 결국 지구상의 패권을 두고, 이 두 나라는 이별을 할 것입니다.

▲ 지식인의 죽음

둘째 ‘지식인과 노동계급’도 이별합니다. 2018년 설립된 비영리민간연구소 랩(LAB)2050이 있습니다. 이 연구소의 이원재 대표는 급격하게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세 없이 1인당 월 30만 원 지급이 가능하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이원재 대표는 지식인과 노동계급의 이별을 예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서구 진보정치는 ‘고학력 지식인’과 ‘노동조합 관료들’이 지배하는 정당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이 기존 보수정당과 정치권력을 과점하면서, 실제로는 안정적 고소득층인 자신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말았다. 갈 곳 없는 불안정 계층은 트럼프주의자로, 브렉시트주의자로, 극우정당과 노란 조끼로 나라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방황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라고 불리는 고학력 지식인과 노동조합 관료들이 고소득층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할 때, 대다수의 불안정한 계층은 정치적으로는 극우로, 민족적으로는 자국중심주의로, 또한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트럼프주의자는 미국을, 브렉시트주의자는 영국을, 극우정당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를(우리나라의 태극기 부대도 포함되겠죠?), 마지막으로 노란 조끼는 2018년 11월 유류세 인상 반대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반정부 시위로 번져나간 프랑스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진보와 보수가 겉으로는 생사를 건 듯 싸우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합니다. 그리고 그 협력의 목표는 ‘안정적 고소득층 지식인’의 이익입니다. 따라서 불안정한 계층들은 태극기 부대로, 극단적 좌파, 혹은 무정부주의자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제 ‘기업과 노동자’도 만나지 않습니다. 자동화 기술 덕분에 직접 고용을 최소한으로 줄인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일을 나누어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저 출산’과 ‘1인 가구’의 급증으로 인해, 이제 공동체적 결속은 와해되고, 독자적 생존의 장에서 방황의 기간은 더 길어 졌습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요? 영국의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굿하트는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 (원더박스, 20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특징

“세계 어디든 살 수 있는 ‘애니웨어(anywhere, 어느 곳이든지 가서 살 수 있는 사람)’ 계층이 권력을 독식했으며, 뿌리박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섬웨어(somewhere, 특정한 어떤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 계층은 소외되어 극우 정치의 토양노릇을 하고 있다.”

여기서 애니웨어는, 주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대학 졸업 뒤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런던이나 뉴욕과 파리(우리는 서울)에 삽니다. 이들은 오늘날 문화와 사회, 나아가 정치의 지배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삶의 터전을 옮기고 성취욕이 강합니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며 변화에 개방적이고 자유지상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구상 어느 곳(anywhere)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이들입니다.

반면 섬웨어는 지방에서 나고 자라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뿌리를 중시하고 급격한 변화에 불안을 느낍니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든 탓에 점점 가난해지고 있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우리는 고학력 젊은이)가 다수이며 점점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퇴물이나 꼰대로 취급됩니다. 고향과 같은 특정한 어떤 곳(somewhere)을 떠나선 안정적인 삶을 담보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섬웨어입니다. 따라서 섬웨어인 노동계급과 애니웨어인 지식인 계급이 분화되어 그 이별을 가속화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2020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별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더 빨라졌습니다.

▲ 가라지, 보리, 밀의 차이

2020년의 이 세 가지 ‘이별의 분기점’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바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과 ‘교회 생활만 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알곡과 가라지’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걱정되는 것은 알곡은 교회를 떠나고 가라지만 교회 건물에 남을지, 아니면 가라지는 떠나고 이제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남아 교회를 새롭게 할지 궁금합니다만, 최근의 세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분이 더 분명해지면서 정말 우리가 말씀으로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한국 개신교가, 또한 교회가 붕괴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나를 거역하였도다!

잠시 지난주 세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성령강림 이후,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통해 평화를, 올바른 법을 통해 태평성대를 이뤄야하는데, 그러한 생명과 평화에는 관심이 없고 ‘네가 크냐, 내가 크냐?’하는 다툼을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히 구약의 말씀은 아하스 왕의 통치 시대 때, 민족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영웅이 아니라 위기를 더욱 부추기는 악한 왕이 나타났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종말의 때에 심판을 받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방사람들이 아니라, 믿는다고 말하지만 열매가 없는 이들, 곧 유다 백성들이,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의하면, 모세의 규례를 따른다고 하는 이들, 그러나 말과 행실이 다른 이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특히 구약의 말씀은, 지난주 말씀처럼 남유다가 유다 최고의 악한 왕인 아하스왕 때뿐만 아니라, 그나마 다윗 이후 최고의 왕이라 불리는 히스기야 왕 시대조차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사 1:1-3)

물론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는 타락한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이사야가 말하는 타락상을 살펴볼까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4-6)

이사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고 묻습니다.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고, 마음조차도 병들고 피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없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땅은 어떻게 됩니까?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사 1:7-8)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가 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진정한 믿음은 선민으로 불리는 이러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3. 백부장의 하인, 사랑하는 종!

오늘 복음서 말씀인 마태복은 8장부터 9장 8절까지 병 고침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특히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먼저 ‘육체적 질병(마 8:1-4, 5-13, 14-17, 9:1-8)’에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자연계의 치유(마 8:23-27)’, 그리고 ‘정신적 질병 치료(마 8:28-34)’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육체적 질병 치료부분인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마 8:1-4)과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마 8:5-13) 두 부분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마 8:4).” 그러나 백부장의 경우, 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로마 군인입니다. 로마의 많은 신들로부터 자신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어서 자신이 주둔하던 식민지 유대교의 하나님에 관심이 있었던 인물입니다. 말씀이 어렵지 않으니 한번 볼까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5-9)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최근 몇 주간 계속되었던 세 본문 말씀의 핵심 주제가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1-13)

▲ 예수님과 백부장의 만남

놀랍습니다. 지금 언어로 바꾸어 볼까요?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신실한 사람들, 예수를 믿지 않지만 신실하여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심성이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심성이 기본적으로 좋지 않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신앙생활의 본질은 교회 생활 잘하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일에 함께 하며, 또 어디를 가든 성실하고 진솔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오늘 백부장의 하인을 분석해 볼까요?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의 하인’으로 되어 있지만,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사랑하는 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눅 7:1-10),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요 4:43-54).

지난번 성령강림후 여섯째주일 말씀에 ‘박넝쿨을 아끼듯!’이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당시 그리스나 로마에 성적 착취를 위해 남자 노예(하인, 혹은 종)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왜냐하면 그 시대에 노예는 누구나 주인의 성 노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거주민 중 다섯 명 중 한명은 노예였다고 하니, 이들 노예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도 주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노예 소유주들이 동성인 자신의 종이나 하인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동성애 금지’라는 것이 당시 ‘동성에 대한 성폭력 행사’를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주인이 노예를 폭행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힘이 있다고 힘없는 자를 짓밟는 것에 대한 부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넓은 범주로 보면 모든 타자에 대한 혐오와 폭행과 증오와 미움에 대한 반대입니다. 지금 성소수자들에게 향한 개신교의 혐오가 바로 바울이 반대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을, 사랑하는 종을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로마 군인의 신분으로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낮추기까지 합니다. 당시 로마의 백부장은 정복자였고 억압자였습니다. 예수님에 비해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랍비로 피지배계급이었고, 억압받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간청하는 모습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종을 아꼈던 것일까요?

아무튼 많은 주석서들이 본문 말씀을 ‘백부장의 믿음’과 또 종에 대한 ‘백부장의 긍휼’에만 초점을 두는데, 로마 시대라는 상황에서 백부장과 종의 관계를 살펴볼까요? 누가복음에 의하면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사랑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종’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은 ‘엔티모스(ἔντιμος)’입니다. ‘영광스런, 영예를 입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valued highly)’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성)폭력적이지 않고, 영예를 입었다는 말은 그들의 관계가 진정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에 관한 누가복음의 소개를 한번 살펴볼까요?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 7:5)” 그리고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눅 7:2)” 곧 백부장이 종을 사랑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물론, 주변에 소문이 다 났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최근 동성애 문제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과 종의 관계를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관계를 알면서도,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그 종을 고쳐주셨을까요? 사실 누가복음은 항상 소외된 자, 약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해석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랑하는 관계를 알았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뿐만 아니라, 주변의 유대인들도 그들의 관계를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종의 병은 중풍병입니다. 에이즈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우리는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고백을 들으시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하셨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알곡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혐오 없이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방인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 서신서 본문인 로마서에서 역설적으로 이어집니다. 이방인인 헬라인이 먼저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참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오늘날의 언어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제대로 믿으라는 말이겠죠? 그럼 로마서 말씀을 볼까요?

사실, 로마에는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 교인들의 도움으로 당시에 땅 끝이라고 생각된 스페인(다시스)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로마 교인들과 자신의 믿음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말씀이죠? 그 믿음의 일치를 위한 핵심 교리가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바울은 먼저 로마 교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8:8-10)

로마 교인들의 믿음생활이 바울에게까지 전해서 바울이 기뻐하며, 로마에 가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서 로마 교인들의 믿음과 바울의 믿음의 교류를 통해 서로 위로를 주고받고자 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8:11-13)

그러나 여러 번 로마로 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려고 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이야기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8:14-15).”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로마에 있는 교인들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은 무엇이고, 또 로마에 있는 교인들은 무엇을 믿고 있었을까요?

또한 바울은 13절 하반 절에 로마교인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과 같이 복음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로마 교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죠? 이들은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오순절 성령강림 때, 베드로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다시 원래 살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유대교의 틀에 갇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8:16).”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순서를 정합니다.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방인인 헬라인이 두 번째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복음의 정의를 내립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8:17)

이를 통해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 복음의 첫 번째 수혜자는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1,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이렇게 권면했던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깨닫고,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먼저는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향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제대로 잘 믿지 않으면 구약 이사야 말씀처럼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전하는 바,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섭니다. 나아가 이 땅이 황폐하고 성읍들이 불타고 토지가 파괴되고 황폐하게 되는 심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사 1:6-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After 성령’의 시대에 정말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만 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알곡이 되어야지, 가라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코로나-19 이후, 정말 알곡은 교회를 떠나고 가라지만 교회 건물에 남을지 두렵습니다. 이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말씀으로 깨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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