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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

기사승인 2020.07.27  18: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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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2)

▲ 샹탈 무페 교수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편집자 주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체제이다. 즉 자유주의(liberalism)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이념적 대립이 ‘자유’와 ‘평등’ 혹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공동의 적, 즉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투쟁의 결과였다.(1)

하지만, 이미 보수적 정치학자 칼 슈미트(Karl Schumitt)가 지적했듯이, 자유와 평등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란 이 갈등의 자리를 “긴장의 장소”(the locus of tension)(2)로 간주하고, 이 “구성적 긴장”(3)을 “여러 다른 헤게모니적 배열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정”으로 삼는 정치적 절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지배로 인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했고, 이제 ‘평등’의 이념은 ‘공정한 경쟁’으로 대치되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권’ 개념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4)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 시행과 인권 수호”의 초라한 구호들로만 존재해고 있을 뿐이다.(5) 즉 우리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된 “포스트 민주주의의 상태”(6), 즉 ‘자유주의’ 체제가 승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공평성, 다르고 다양한 문화와 믿음들에 대한 관용,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신장을 외쳤던 자유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획일성과 동종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영적 퇴화를 부추기고 그리고 자유를 침해”(7)했다. 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차이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단들이 우리를 감금하는 철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불만족이 증폭되고 누적되고 있으며, 때로 마녀사냥의 대상을 찾아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분노를 광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 금융귀족같은 소위 신-엘리트들의 출현(8), 그에 따른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자제력과 숙고의 능력 그리고 민주적 정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절차들보다는 “정치적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는데 소진되고 있다.(9)

자유주의(liberalism)의 핵심에는 “권리를 담지한 개인이 자신만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10)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 모델 정치체제는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동의한 소위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설을 발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점점 더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부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계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민들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각자도생의 삶으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하게 확보해준 개인의 권리란 오직 충분한 부와 지위를 확보한 이들의 권리와 자율뿐이라고 느낀다.(11) 따라서 시민들은 현 체제가 ‘실력주의’(meritocracy)가 되었고, 소위 능력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세습하고, 교육 시스템은 인성이나 소명을 찾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소위 ‘루저’(loser)를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고 느낀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로 대치하였고, 사회적 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구조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성과 심화되는 불평등의 격차를 값싼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무마시키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공정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승자로부터 패자를 채로 거르는 시스템을 통해 심화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격차가 초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격차로 이어져, 정말 소수의 초부유층이 자신들을 수퍼휴먼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현실이 소위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하라리는 “불평등의 업그레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세계화가 초래하는 무한경쟁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발전의 혜택을 누린다는 위로 아닌 “위로”가 주어지기도 한다.(13) 분명한 것은 이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세계화 경제가 현세대의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드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자유주의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진단한다. 즉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14)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총체적인 좌절과 실패는 바로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들에 맞추어 살아내는데 실패”(15)했다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liberalism)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동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교를 통해 알려줄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실패는 자유주의의 전적인 성공에 따른 결과라는 드닌의 진단과 병행하여, 샹탈 무페는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의 무능이 이 실패를 부추긴 주요원인들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즉 현재 서구 정치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요구들이 진보적 해답이 필요한 민주주의 요구라는 것을” 좌파 정치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일구어낸 타협이 우리 시대 유래없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를 양산해 내고 있으며, 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외치는 함성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로 반영되는 민주주의적 열망들이 낙오자와 실패자의 좌절과 분노로 응집되고, 그 분노의 감정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혐오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17) 진보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성공적인 실패’는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18) 즉 ‘성공보다 나은 실패’를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은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화에 의존한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안정성이 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교적 경제변화와 상관없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 혹은 폐지되고, 전 지구를 시장경제라는 우산 하에 두고자 기획되었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다문화’가 자유주의 기획의 일부로 고립되어 게토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대변한다. 그래서 정치는 차라리 실패했었던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같은 극단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해도 말이다.

미주

(미주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승원 역,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쇄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8.
(미주 2) 앞의 책, 29.
(미주 3) 앞의 책, 30.
(미주 4) 앞의 책, 31.
(미주 5) 앞의 책, 31.
(미주 6) 앞의 책, 34.
(미주 7) Patrick J. Den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3.
(미주 8) 이를 샹탈 무페는 “서구 사회의 과두제화”(oligarchization)로 표현하고 있다(『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3).
(미주 9)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xiv.
(미주 10) Ibid., 1.
(미주 11) Ibid., 3.
(미주 12)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London: Harvill Secker, 2015), 346.
(미주 13)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10.
(미주 14) Ibid., 3.
(미주 15) Ibid., 4.
(미주 16)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9.
(미주 1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노정태 역, 『진보의 몰락』(Death of the Liberal Class) (서울: 프런티어, 2013), 25.
(미주 1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123.

박일준 객원교수(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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