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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과 진실함으로!

기사승인 2020.07.13  17: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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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言善信(언선신, 요한일서 3:17~18)

인간과 말

언어의 사용 즉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켜주는 가장 특징적인 자질 중의 하나입니다. 동물은 소리는 내지만 말을 하지 못합니다.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을 구성하고 그리고 그러한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 전달을 하는 동물은 인간뿐입니다.

인간은 지능지수(IQ) 혹은 뇌의 크기에 관계없이 말하기가 가능합니다. 침팬지는 학습을 통해 단어를 구별할 수는 있지만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며 인간의 언어에는 문법이 있고 번역될 수 있으며 생각 속에 있는 개념을 모두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발견된 인간 언어는 최소 1000개에서 최대 7000개 종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 말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을 함으로서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또 인간다운 삶을 살고 또 그러한 삶을 요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인간이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다움과 말을 하는 것은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언어 구사 능력(말하기)으로 인하여 자신 스스로가 인간다운 삶을 잃게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말을 잘못하여 구설(口舌)에 오르기도 합니다. 괜한 말 혹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함으로서 우리는 ‘구설’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말로 자신이시비나 험담의 대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되기도 합니다. 말조심하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말은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망치는 일도 합니다. 그래서 성현들을 우리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말에 대하여 조심할 것을 늘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1.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자.
2. 남의 단점을 지적하는 말을 조심하라.
3. 우정이 깊지 않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지 말라.
4. 자신과 관련이 없는 말은 하지 말라.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삶에서 말이 갖는 중요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유익을 주지만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망치거나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독교, 말의 종교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말은 기독교에서도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기독교를 흔히 ‘말씀의 종교’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땅으로 오십니다. 말씀의 성육신화가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부터 옵니다.

모세는 시내산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세상에 선포합니다. 신약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려고 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죽고 말씀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부활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말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은 입으로 말을 함으로서(고백) 우리가 주님의 사람임을 천명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전도 부흥회에서 마지막에 사람들을 초청해서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를 말하게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우리는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을 한다는 것(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입니다.

기독교는 말잔치의 종교인가?

그런데 이렇게 말의 종교인 기독교가 과연 오늘의 사회애서 어떤 인정을 받고 있는 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를 말잔치만 요란한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 대한 최근의 여론 조사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구의 19%정도만이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 자체도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슬픈 통계입니다.(기사 참조

기윤실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선 응답자의 25.9%가 ‘불투명한 재정사용 개선’을 꼽았습니다. 이어 ‘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변화’(22.8%), ‘타 종교에 대한 태도 고치기’ (19.9%)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신뢰도 제고를 위한 활동으로는 ‘윤리와 도덕실천 운동’(49.8%)이 ‘봉사·구제활동’(27.9%) 등 보다 우선적으로 꼽혔습니다.

여론조사에 의해 나타난 한국 교회의 낮은 신뢰도의 원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은 화려하게 하는데 나타나는 결과는 말과는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말잔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까?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단어들을 성찰해 봅시다.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은혜, 2. 사랑, 3. 동행, 4. 용서, 5. 화해, 6. 구원, 7. 봉사, 8. 선교, 9. 하나님의 뜻, 10. 하나님 나라, 11. 하나님의 영광, 12. 천국, 13. 심판, 14. 죄, 15. 고난

우리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무수히 나오는 이러한 단어들이 어떤 의미로 우리의 삶에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우리들 스스로가 자신있게 우리가 하고 있는 말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을 은혜로 대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들은 우리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고 함께 동행 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자성적인 질문을 갖고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보이고 있는 언어들을 살펴보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은혜보다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사랑과 동행 그리고 화해보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혐오, 증오, 차별과 거부의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 영광 그리고 나라보다는 나의 뜻, 영광 그리고 나의 이익을 최우선 가치관으로 삼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과 그 분의 영광보다는 교회의 안정과 성장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애써 덮고 갑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일들이 드러나면 교회가 혼란해 지고 숫자가 줄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말잔치의 주인공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열림은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을 자각함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말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입술로 말을 하고 믿음을 고백하면 그 순간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로마서 10:9~10)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마음의 믿음’은 단순한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흥분이나 혹은 감정의 동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차원입니다.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삶의 가치관의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바울에게 있어서 입술의 고백은 단순한 ‘소리내기’가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 다시 말하면 말로 하는 믿음의 고백은 삶의 실제적인 행위로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말은 단순한 ‘소리내기’가 아니었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하면 그 저주는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을 빌면 그 복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구원의 길에 대한 선포는 “사람은 의지적인 결단에 의한 변화(마음으로 믿어서)로 의에 이르고 행동함(입으로 고백해서)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로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진정한 말의 종교입니다. 말이 행동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선신(言善信)

도덕경 8장에서는 물의 또 다른 특징을 언선신(言善信)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언선신(言善信)
말씀 言 좋을 善 믿음 信

‘물은 말을 할 때 믿음직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말을 할 때 믿음직하게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무위당 장일선 선생님과 이현주 목사님은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무위당: 말은 성실한 것이 좋다. 믿음이란 성실한데서 오는 거지.
이현주: 그러니까 빈말을 하지 말라는 거군요. 알맹이는 없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말이 빈말인데.... 저는 참말의 반대는 거짓말이 아니라 빈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이 차 있는 말이 참말이고요 빈말은 속이 비어 있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물하고 연결해서 생각해 봐도 통하겠군요. 물은 속이 언제나 차 있고 또 물은 거짓을 모르잖습니까.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127쪽)

고대 한자에 있어서 신(信)의 뜻은 믿음이나 신앙의 의미가 없습니다. 믿을 신(信)은 ‘가능하다. 증명 가능한 신실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을 신(信), 믿음은 증명될 수 있는 것 (verification, verifiability)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말은 증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직스러워야 합니다. (노자와 21세기 下 김용옥 59쪽)

예수살기, 행동과 진실함으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살기를 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예수살기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살기는 우리의 마음의 의지로 결단하고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며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될 때 이루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한 일서 3:17~18)

요한의 서신은 요한 공동체를 향한 편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동체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빈부의 차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과 가진 것이 없어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공동체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내에서 서로 “형제자매님 사랑합니다.”라는 말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입술의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행동과 진실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말이 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이 힘을 갖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과 진실함으로 이어져 가야 합니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말은 행동과 진실함으로 보여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말입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말이 행동과 진실함으로 이어질 때 우리의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의 예수살기는 ‘행동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삶을 맞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와 비대면의 비정상적인 삶의 형태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요즘 말대로 뉴노말(new normal), 새로운 표준이 상식이 될 것입니다.

코로나19이후 교회 생활은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 보지 못했던 상황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세대들의 신앙은 오늘 기성세대들의 신앙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대면의 모임이 축소되고 또 경계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고민을 하고 대비하면서 우리의 신앙 모습을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이 퇴색되지 않도록 아니 오히려 코로나19 이후의 위기의 시대에서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믿음이 신조 혹은 교리를 수긍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행동과 진실함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허공을 치는 허무한 말이 아니라 증명되어 질 수 있는 말을 진정한 의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증명되어질 수 없다면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행동과 진실함으로 예수님을 살아감으로서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힘차게 전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언선신(言善信)
믿음직스럽게 살아갑시다.

물 밑에서 숨 쉬기*

- 정인영

어느 날 나는 던져졌고 너를 만났지 천 개의 결을 가진,
마치 날개가 수면에 닿을 듯 입맞춤하는 나비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어
뭉툭한 내가 너를 멍들게 할까 납작하게 가라앉고 싶었어
바위의 단단한 생으로 뭉쳐진 작은 돌멩이,
꼭 그만큼 네 고요를 깨트렸지
둥글게 퍼지는 파문 아래에서는 울음소리 들키지 않아
어둠 속에서 슬픔을 꾹꾹 누르지 않아도 돼
모든 걸 감춰주고 지워주는 네 안에서 웅크리며 숨을 참았어
나무가 몸에 삶을 가두는 동안 겹겹이 쌓은 물결은 견고해
넌 투명한 공기처럼 잡을 수 없었지만 바람처럼
쉬지 않고 모난 내 몸에 부딪혀 부서졌어
이제 나는 숨을 참지 않아도 돼
모든 소리가 잠긴 침묵 속에서 마침내, 푸-하

* 리처드 로어, 『물 밑에서 숨 쉬기』 (이현주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제목을 차용함.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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