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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자(心善淵/심선연)

기사승인 2020.06.30  1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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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한 마음 씀(요 21:7-13)

무례한 친절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슴은 호랑이에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신선한 야채를 주고, 호랑이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양을 잡아서 줍니다. 이렇게 둘은 정성을 다하여 상대방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둘의 사랑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문제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될 때 상대를 살피지 못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 이런 비극이 생깁니다.

진심 어린 사랑은 이타적일 때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향하여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불편하지 않게 나의 사랑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일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의 입장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의(특히 한국의 상황)삶의 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딸과 편의점에 갔다. 딸은 뭘 먹을지 고민했다. 60대쯤 보이는 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할머니 특유의 친절을 베풀었다. ‘과자 사러 왔어? 양갱이 맛있어. 새우깡은 몸에 안 좋아.’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꽤나 길게 말을 붙이면서 딸에게 과자(양갱)를 쥐어주셨다. 딸은 부담스러웠는지 과자를 놓고 내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빠 우리 나가자. 딴 데 가자’나만 부담스러움을 느낀 게 아니구나. 분명 저 할머니는 친절은 베풀었지만 받는 사람은 불편함을 느꼈다. 저 할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지만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풀려는 마음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식사시간에 ‘이거 먹어봐. 맛있어’라며 음식 권하고, 숟가락 위에 얹어주기도 하신다.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란 걸 안다. 알지만 불편할 때도 있다. 간혹 먹기 싫은 음식을 계속 건넬 때 내색하면 서운할까 봐 억지로 웃으며 받아먹을 때가 많다.

50대 이상 어른들은 적극적인 친절을 주고받는데 익숙하다. 간혹 부모님이 모르는 젊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할 때 말리곤 한다.

‘젊은 사람들은 싫어해요. 도움 안 주셔도 돼요. ‘아니, 나는 알려주려고 그랬지’ ‘도움을 청한 게 아니잖아요.’ ‘딱 봐도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인터넷에서 발견한 글 중에서)

위의 경우처럼 좋은 일을 하려고 했고 또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결과를 발생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세대 간의 문화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다른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움이나 좋은 일이 상대편이 아니라 나의 편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세심(細心)’은 ‘촘촘하다, 미미하다, 작다.’라는 뜻의 세(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심(心)의 합성어입니다. 작고 미미한 일까지 촘촘하게 마음을 쓰는 것을 ‘세심(細心)하다.’라고 합니다.

요즘 코로나19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재앙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이천 물류창고 화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산불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심선연(心善淵)

도덕경이 전하는 물에 대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심선연(心善淵)

마음 심(心), 착할 선(善), 연못, 깊을 연(淵)으로 이루어진 구절입니다.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물처럼 깊은 것이 좋다.” 혹은 “물의 마음은 깊고 깊은 고요함을 유지하는 착한 마음”이다. 즉 물은 마음씀씀이가 깊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자는 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물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 씀씀이가 연못처럼 그윽하고 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을 길고 깊은 물병에 넣으면  물병 모양대로 자신의 모양을 만듭니다. 네모난 물병에 들어가면 네모의 모양을 갖고 세모난 물병에 들어가면 세모의 모양을 갖습니다. 둥글면 둥근 대로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 모양새를 갖습니다.

물의 마음 씀씀이는 이처럼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만일 물이 세모 병과 만나서 네모 모양이 좋다고 네모 모양을 고집한다면 잘못하면 물병은 깨지고 물은 바닥으로 쏟아져 내버려지는 결과는 낳을 지도 모릅니다. 물이 자신의 모양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형편을 고려하는 마음을 씀으로서 병도 무사하고 물도 병과 함께 삶을 살아갑니다.

물은 마음씀씀이가 깊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낮은 존재의 형편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경은 물의 특징을 심선연(心善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산다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들이 상당부분 해소되고 우리 모두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면에서 예수살기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제자들을 찾아오시다

오늘의 본문은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3 번째로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4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고 한때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모든 생업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섰던 열기 왕성했던 제자들도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자신들의 옛 직업으로 돌아가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예수님과 함께 가졌던 메시아 왕국에 대한 꿈들을 애써 털어 내면서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예수님과 가졌던 인생의 경험들이 회한으로 남아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요한복음 기록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21:3)

외롭고 답답한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날도 열심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런 수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얼 좀 잡았습니까?’ 그들이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5절)

그러자 낯선 사람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십시오. 그리하면 잡을 것입니다.’ 무엇에 홀린 것인지 고기잡이의 전문가들인  제자들은 낯선 사람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그 말에 따라서 그물을 던집니다. 의외였습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6절)

그때서야 그들은 그 낯선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갑니다.(7절)

긴장감이 나돌다

베드로는 낯선 사람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차리고 곧 바로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어 주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마치 처음으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그물을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 시절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주님을 따랐던 그 시절과는 다르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3 번씩이나 부인했던 경험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베드로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트라우마)로 남아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처를 안고 다시 예수님에게 달려가는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다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움과 어색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이 전하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긴장감이 팽배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예수님이 조우를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뒤늦게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무척 궁금합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떠나갔던 제자들! 부활의 소식도 믿지 않았던 사람들! 자신을 지워버리고 생업으로 돌아가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옛 제자들을 만나는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아침먹자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뒤 엎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아침 먹자!”입니다.  좀 더 진지한 이야기, 야단을 하시면서 질책을 하시던지 아니면 그의 부활과 그의 사역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가르침으로 서두를 시작하시던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침 먹자” 한 마디로 “밥 먹자!” 라는 말은 우리 모두의 맥을 빠지게 만든 말입니다. 이 한 마디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서 상상되던 긴장감은 일시에 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어색함도 일시에 사라집니다.

왜 예수님은 다른 어떤 말보다 가장 평범한 ‘아침먹자, 밥 먹자!’로 제자들과의 만남을 시작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 깊은 마음씀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왜 나를 배신하고 뿔뿔이 흩어졌느냐고 따지면서 제자들의 의지가 박약함을 강조하면서 가르침을 주어야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의 자신을 향한 미안한 마음과 어색한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마음을 살피신 예수님은 다시 만나는 제자들에게 ‘아침먹자.’라는 말로 모든 긴장과 어색함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마음씀씀이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고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서 돌로 맞아 죽을 상황에 처한 여인과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예수님의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깊은 배려입니다.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결혼한 사마리아 여인을 배척하지 않고 그 여인의 상황을 깊이 배려하시고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빗발치는 심판의 소리에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여유 있게 답변하시고 땅에 무엇인가 글을 쓰십니다.  이 모든 행동은 곤경에 처해 있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마음씀씀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고 같은 마음, 심선연(心善淵)의 마음씀씀이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무 말 안하기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부교역자 중에 이제 신학대학원을 막 졸업한 전임 전도사 한분이 있었습니다.  담임인 저하고 새벽기도회를 나누어서 인도하곤 했습니다.
그 날은 전임전도사가 새벽기도회 설교 담당이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일찍 본당에 나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전도사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다가 제가 나가서 설교하고 기도회를 마쳤습니다. 전도사님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도사님이 9시가 되어 교회에 출근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 온 전도사님이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 흉내를 냈습니다.

“아침 먹으러 가자!”12년이 흐른 지금 그 전도사님은 목사 안수를 받고  훌륭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은 저를 기억하고 선생으로 받들면서 늘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깊은 마음씀씀이, 배려

예수살기는 이 같은 예수님의 깊은 마음씀씀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의 이유가 이 같은 마음씀씀이가 부족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웃에 대한 배려, 동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나의 편과 입장에서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마음씀씀이를 보다 넓고 깊게 해서 이웃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 볼 수 있다면 많은 갈등과 싸움들이 사라지고 우리의 공동체는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속담 중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콩밭에 소 풀어 놓고도 할 말이 있다.’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 속담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무슨 일이나 핑계 거리를 찾으면 다 있다는 뜻으로, 여러 구실을 내세워 책임을 피하려는 행동을 비꼬아 이르는 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담의 다른 측면을 살펴보면 의외의 것이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 보인다고 할지라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 핑계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핑계 거리를 볼 수 있고 그래서 그 핑계 거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사자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경우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씀씀이는 그 감춰져 있는 핑계거리를 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웃에 대한 판단을 한 템포 늦출 수 있었습니다. 심선연(心善淵)입니다.

예수살기는 물처럼 심선연(心善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아침 먹자.’의 깊은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아침 먹자.’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오늘 우리들은 넉넉하게 예수님을 살아감으로서 ‘아침 먹자.’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이웃을 향하여 배려 없는 ‘독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 사회를 보다 여유롭고 풍요로운 평화로 가득 찬 세상으로 만들어 갑시다.

아침 먹읍시다.

동천에서 2
- 오월과 유월이라는 계절의 정체

정인영

강가에 서서 묻는다
오월과 유월의 차이를 아느냐고
슬픔의 깊이를 소리로만 알아채야 할 만큼 고독하냐고
몇 겹의 물결이 차곡차곡 쌓여야 강이
바다가 되냐고 그건 고독하지 않냐고

마시멜로처럼 수국이 말랑말랑 피어나고
바위 옆구리에 익숙한 이끼가 번지는 것
가난한 하루살이 떼 휘휘 저으며
삐뚤삐뚤 한 켠의 삶 걷다가
텅 빈 주머니에 바짝 말려진 돌멩이 한 개
집어넣고 하루를 채우는 것

오랜 시간 구르며 몸에 새긴 물결의 뜻을
돌은 깎아낼 수 있을까
소란스럽던 꽃잎들 빗물에 잠기면
바람에 기운 나무는 그 시절이 그리울까
오월이란 유월이란 눈이 부시다가 애달펐다가
찬란했다가 무심했다가 ……

낮은 하늘 초저녁과 저녁 사이 머물러
촘촘한 달빛 펼치기 시작하면
여여하게 흐르는 강의 꿈, 찰랑거린다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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