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멸망하지 않게 살아남으라

기사승인 2020.06.28  16:34:02

공유
default_news_ad1

- 우리를 향한 생각(예레미야 29:10-11)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오늘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쓴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재미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련된 말씀을 조금 살펴본 후에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들에게

예레미야는 포로기가 시작된 이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편지를 적습니다. 당시 바벨론에서 활동하던 에스겔의 예언에는 예레미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이 많은 이에게 선포되지 않은 것인지, 선포되었더라도 예레미야의 예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인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침공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하였고, 바벨론의 속국이 되는 일도 받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 바로 앞 5-6절에는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바벨론의 속국이 되는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7절에서는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만약 바벨론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예레미야의 예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슷한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구원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가 보인 반응은 도망이었습니다. 적국에 구원을 선포하기 싫었던 요나는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적을 위해 평안을 구하고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포로 70년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70년의 포로 생활을 예언합니다. 사실 바벨론 포로기는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고, 에스겔을 비롯한 남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시기는 기원전 598년경입니다.

여호야김이 끌려간 이후 여호야긴, 시드기야의 통치기를 거쳐 남유다는 586년경에 멸망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함락하고 고레스가 포로 해방을 선포한 시기는 기원전 538년이기 때문에 남유다 멸망을 기준으로 본다면 50여년이 되고,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598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60년의 포로생활이 됩니다.

만약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침략이 있었던 여호야김 4년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있었고, 이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해도 66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70년에 맞는 연대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이 586년에 파괴되었고, 제2성전이 520-515년 사이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성전파괴 이후 제2성전이 건축될 때까지의 기간이 70여년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고레스 칙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전건축을 포로기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레스 칙령을 경험한 역대기가 예레미야의 예언을 언급하며 포로기를 70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은 이들이 성전파괴와 재건축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7이라는 숫자를 통해 완전함이라는 의미를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역대기가 말하는 70년의 의미입니다. 역대기 36장 21절은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땅의 안식을 지킨 일이 없기 때문에 70년간 땅을 쉬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7년에 한 번 땅이 쉬어야 하지만 쉬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땅에서 490년간 안식년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490년이면 왕정 직전 시대가 되는데, 숫자를 계산하며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조금 과한 욕심인 것 같습니다.

포로기 기간 동안

역대기의 기록된 한 문장은 ‘왜 70년이었는가?’를 고민한 결과물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보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최민식과 유지태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최민식은 자신을 15년 동안 감금했던 유지태를 만나 ‘나를 왜 감금했는지’ 물어봅니다. 그러자 유지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 감금했는지가 아니라, 왜 15년만에 풀어줬는지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다음 장면에서 유지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포로기를 겪고 해방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70년이었는가를 고민하였고, 그렇게 내놓은 해답 중 하나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의 편지는 기간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는지 이들이 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지, 그들이 무슨 잘못을 범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예레미야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예언자라 칭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충고합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은 70년이라는 기간이 긴 시간인지 짧은 시간인지에 있지 않습니다. 24절 이후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사람 중 예언자라 칭하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의 편지 일부가 나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편지에 분개하여 남유다의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 답장을 썼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와 같은 미친 자를 왜 가만히 놔두냐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미친 사람인 이유는 자신들이 오랜 시간 포로로 잡혀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그곳에서 집 짓고 밭을 일구며 살라고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바로 앞선 28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또 다른 선지자 하나냐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나냐는 2년 안에 포로가 귀환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벨론에 있던 스마야는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의 극히 단편만 보았습니다. 7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포로로 있을 것이라는 그 점만을 보았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전하고 있는 진정한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와 평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재앙으로만 인식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순간에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곳 바벨론에도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키신다고 선포하였지만, 이들은 빨리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포로기는 고통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를 지키시고 너희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 70년 동안 너희가 집을 지을 수 있게 하시고 밭을 갈아 열매를 얻게 하시며,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아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기에 포로기는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의 시간이며, 미래와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 부분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바벨론의 도시가 평안해야 그곳에서 포로들도 함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최근에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바뀌고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고민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은 죽음 이후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현실 생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병 걸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알라딘 요술 램프 같은 이야기는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읽은 결과이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사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서도 돈을 잃을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고,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렇게나 힘든 세상에서 힘든 일을 그대로 겪으며 살아가야만 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죽을 날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처한 어려움, 또 그 어려움의 크기, 아픔, 슬픔만을 바라보고 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이런 언급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예언자 스마냐는 포로들의 아픔과 슬픔을 말하였지만, 예레미야는 그 기간동안 지키시며 평안을 가져다주실 하나님만을 이야기합니다. 고통, 아픔, 슬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시선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삶에서 무엇을 얻게 되는가? 바로 평안을 얻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기에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고, 슬픔을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미래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순간에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이 주는 어려움과 슬픔, 아픔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만 집중하게 만들지만, 그 순간에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고개를 돌린다는 말은 세상을 외면하며 교회에 집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자체입니다. 고통도 아픔도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순간순간 우리가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말씀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고 계셨던 그 손길을 느끼게 되실 줄 믿습니다.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느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희망을 품게 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