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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유럽과 미국을 제자로 삼아!(욘 3:1-4; 행 16:6-15; 마 28:16-20)

기사승인 2020.06.26  15: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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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후 넷째주일(6월28일)

1. 백색신화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After 성령, 곧 성령 이후의 시대에, 생명의 성령의 역사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원수와도 같은 이들에게도 생명의 호흡인 성령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남과 북이 성령의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대화를 회복하고 소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민족의 범위는 아시아 뿐 아니라, 마게도냐 곧 유럽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구약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생명의 성령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까지 해당됩니다.

사실 우리는 선교나 복음 전도라고 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나, 중국과 북한, 아프리카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복음이 필요한 곳은 미국과 유럽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은 바로 이들에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럽이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지만, 그 실상은 형식만 기독교 국가였지, 정신은 우상 숭배, 물질 숭배, 권력 숭배와 타자 박해, 인종 탄압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 곧 백인종들의 문화와 사상을 전파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보고, 진정한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After 성령 시대에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지역의 개념보다는 복음의 실질적 내용 선포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지구촌은 말 그대로 하나의 촌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을, 혹은 나아가 진정한 신학을 우리가 유럽과 미국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서구 백인 사회는 이제껏 인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게 된 것은 1960년대 포스트모던 철학이 등장했을 때입니다. 이때 서구인들은 자기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이 등장하여 서구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구가 동양을 왜곡한 뒤, 이 왜곡된 상을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했다.” 지금 우리의 문화가 그렇죠? 서양이 왜곡한 동양인 상을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백인과 흑인,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인과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주인과 노예, 혹은 정의의 사자와 테러리스트! 바로 이러한 것이 서양이 우리 동양에 심어준 왜곡된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에 나온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 (경성대출판부, 2008)는 서구의 진보적인 이론가들인 사르트르, 알튀세르, 푸코 같은 이들조차도 서구 중심적인 백색신화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서양의 ‘역사’는 결코 타자를 관용할 수도 없고, 또 타자를 자신의 힘의 경계 바깥에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섭해서 짓누르는 것이죠? 로버트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타자를 총체적 체계 내부에서 하나의 지식형식으로 전유하는 것은 유럽제국주의(의 기획은 아니라고 하더라도)의 역사와 병행하고, 타자를 ‘타자’로 구성하는 것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와 병행한다.”

쉽게 말해,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는 동양인 타자를 인종차별과 성차별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성경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 믿는다, 기독교 국가라고 해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파르테논 신전이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 하면 어떤 색이 떠오릅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 없이 흰색의 대리석을 떠올립니다. 데생(소묘, drawing)할 때 석고상(가령, 로마 군인인 아그리파)들도 다 흰색이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대 조각들은 원래 알록달록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빈첸츠 브링크만(Vinzenz Brinkmann)은 조각상에 남아 있는 안료(paints)의 미세한 흔적을 찾아낸 뒤, 고대 조각이 채색되었음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 백색 비너스와 원래 채색된 비너스(로만 로바텔리 작품)

이후 X-ray 형광 분석과 같은 여러 가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조각에 칠해져 있던 다채로운 안료의 색상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과서나 미술관에서 본 백색 조각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거짓말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백색신화로 과거를 왜곡한 것이죠?

또한 이러한 고대의 조각이 아니라, 현대의 예술 매체인 사진이나 영화를 분석하며 이러한 백색신화를 파헤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문화연구자이자 킹스칼리지런던 영화학과 명예교수인 리처드 다이어 입니다. 1997년 작품인 『화이트: 백인 재현의 정치학』 (컬처룩, 2020)에서 리처드 다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백인이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매체 기술을 선택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이다. 가령 19세기에 유럽에서 발명된 사진은 백인의 얼굴을 가장 아름답게 재현하는 데 기술 개발을 집중했고, 백인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규범으로 정착했다. 백인을 표준으로 삼은 사진 기술은 20세기에 영화 촬영 기술로 그대로 옮아갔다. 문제는 백인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 최적화한 촬영 기술이 백인이 아닌 사람을 촬영할 때는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백인과 비백인이 함께 나올 경우 비백인은 잘 보이지 않거나 얼룩이 지거나 실제보다 못생겨 보이게 된다. 백인 중심성은 이렇게 촬영과 조명 기술에 힘을 행사했고, 비백인은 이 보이지 않는 백인 중심성 아래서 미적으로 주변부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됐다.”

놀랍죠? 헐리우드 영화에서 백인과 유색인이 함께 나올 때, 약간 어색하고 이상한 이미지는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카메라 기술과 촬영 및 조명기술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인 경찰에 의해 숨을 쉴 수 없어서 죽었던 흑인 플로이드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백색신화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 ‘얼굴색(complexion)’을 개선하는데 효과적이라는 비누 광고, 황당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BBC

기독교 역사에 이러한 백색신화, 나아가 백색신앙, 백색신학이 해체되어야 성서의 본래적인 의미, 말씀의 원래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예술품에 덧 입혀진 백색신화, 그리고 현재 영화 기술에 사용되어진 백색신화의 기술, 그리고 미래에 만들어갈 모든 백색신화가 사라질 때, 기독교 문화가 다양한 칼라색으로 그 본질을 회복할 것입니다.

2. 갈릴리 산지에서

서론이 길었지만,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말씀을 보겠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마태복음 마지막 장 말씀이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삼 일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십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6-20)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이 어디죠? 바로 갈릴리의 산입니다. 갈릴리는 ‘원형(circularity)’이라는 뜻으로 지역 자체가 갈릴리 호수를 동쪽에 끼고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갈릴리는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나뉩니다. 벧하케렘 골짜기를 기준으로 나눠지는데, 상부 갈릴리는 높은 산과 급경사를 이루고, 하부 갈릴리는 낮은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지도

아무튼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라고 합니다. 여기도 갈릴 리가 나오죠?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갈릴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 복음이 주변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선교의 시작지점이 바로 갈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이곳 갈릴리 산지에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 일이 힘들겠지만, 주님께서는 항상 함께 하겠다고 격려 또한 하십니다. 자, 그럼 이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복음 선포의 역사를 따라가 볼까요?

3. 빌립보에 이르니

먼저, 오늘날 유럽지역인 마게도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길을 갔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6-9)

▲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일정

이 말씀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가 요한과의 동행 문제로 인해 1차 전도여행의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꿈에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생명의 성령의 역사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은 유럽이 아시아로 전해준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게도냐는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의 고향입니다. 바울보다 300여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죠? 그리고 동방원정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길과는 반대입니다. 동방원정이 아니라, 서방원정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의 음성으로 서쪽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그리고 스페인까지! 오늘 다시 진실한 복음은 서쪽으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서양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변화시키고, 미국을 제대로 된 말씀으로 교육시켜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볼까요? 바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행 16:10-12a)

바울이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시아로부터 이방인인 유럽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곳에서 소아시아 두아디라 사람인 루디아를 만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 성(빌립보)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2b-15)

▲ 바울을 만난 루디아

루디아란 이름의 뜻은 ‘생산’입니다. 소아시아 두아디라에는 염색 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의 상품을 마게도냐로 가져와서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철학이나 종교로는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어서, 유대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생활과 수고에 시달린 그녀의 공허감은 유대교를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강가에 나가 기도모임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렇게 루디아와 바울을 통해 유럽 복음화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아니,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산(루디아)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종차별, 여성차별은 이러한 복음전파의 역사에서 발붙일 수 없습니다.

4. 니느웨로 가서

이렇게 복음의 역사는 동에서 서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진행과는 달리, 복음은 나, 혹은 우리 민족의 원수에게까지도 향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입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3:1-2)

두 번째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1장에 나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느니웨로 가지 않고, 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현재 스페인)로 갑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고, 선원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집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을 있다가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죠? 그리고 다시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말씀에 요나는 순종합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3-4)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나가 하루 동안 외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임합니다. 사흘 길을 하루 만에 마지못해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요나 이후, 100년 정도가 지나 나훔 선지자 시대에 니느웨는 멸망당합니다. 앗시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잠시 회개하여 그 멸망을 늦춘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생명의 역사는 이렇게 원수의 나라에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5. 가서 미국과 유럽을 제자 삼으라!

한때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 독일에 종교개혁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볼테르는 종교적 광신과 부당한 권력에 관해 끊임없이 맞서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볼테르의 저항 정신은 훗날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볼테르는 검열을 피해 ‘철학적 콩트(contes philosophiques)’라고 불렀던 우화 양식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장치를 통해 작품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표작이 바로 『캉디드』 (아로파, 2016)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캉디드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인데, 캉디드는 마음이 단순하고 생각이 곧았기 때문에 캉디드(candide, 순박한)라고 불렸습니다. 하루는 캉디드가 수리남(남아메리카 동북부에 있는 공화국)에서 한 흑인 노예와 마주칩니다. 설탕 공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잘려져 나간 채, 속바지만 달랑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캉디드에게 수리남의 노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설탕 공장에서 일하다 잘못해, 맷돌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면 손을 자르고, 도망을 치다 잡히면 다리를 자르지요. 저는 그 두 가지를 다 겪었습죠. 당신네 유럽인들이 설탕을 먹는 건 바로 그 덕입죠. 개나 원숭이나 닭도 우리 처지보다는 훨씬 나아요. 저를 개종시킨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일요일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모두 아담의 자식들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족보 같은 건 모르지만, 선교사들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모두 친척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친척에게 이렇게 지독하게 굴 수 있을까요?”

▲ 캉디드와 수리남 흑인노예

백색신화로 채색된 미국과 유럽의 신앙과 신학은 이처럼 겉 다르고 속 다릅니다. 사실 볼테르는 유럽의 식민 지배가 정점에 이르렀던 19세기 후반에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따라서 볼테르의 비판은 프랑스의 종교와 권력뿐만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 저질렀던 만행을 고발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서양의 문화를 기독교라고 생각해온 우리들에게도 볼테르의 비판은 유효합니다.

이제 미국과 유럽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국의 신화, 유럽 선진국의 신화가 무너졌습니다. 허울만 기독교 국가인 그들에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과 평화, 정의와 생명의 정신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따라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가서 유럽과 미국을 진정한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따릅니다. 형식만, 모양만 기독교 국가인 유럽과 미국이 이제 백색신화에서 벗어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우리 아시아와 동양이 힘써야 합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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