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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싫어할 사람들

기사승인 2020.05.24  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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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때(스가랴 13:1-6)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최근 정의연, 정대협 이야기로 언론이 시끄럽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에는 무슨 일이든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저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임이 가진 문제들과 그 구성원들의 어떤 도덕적 해이를 가지고, 그들이 지금껏 해왔던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일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근본부터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께서 잘 내리실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은 이와 연결된 이야기에서부터 말씀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일전에 한 언론에서 정의연과 같은 사회 운동 단체는 자신들에게 놓여있는 문제가 해결되면 해산해야 하기 때문에 단체 유지를 위해 문제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이 기사에 동의하진 않지만, 한 후배가 이 기사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링크해놓고 이런 말을 덧붙여놨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진다면 싫어할 사람들이 생각남’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읊조리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기에 당연히 이러한 기도를 가르치셨고, 이는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통해서도 고백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어떤 세상이 되는지 꿈꿔본 일은 있을까요? 오늘 스가랴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곳은 어떤 세상인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부정함과 죄가 사라지는 날

스가랴 13장 1절은 ‘그 날’로 시작됩니다. 그 날은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스가랴는 거대한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날에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둘러싸 공격하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날을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날로 만드시고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애매한 부분은 12장 11-14절인데, 그 날에 예루살렘에 애통하는 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쟁의 피해로 인한 애통의 소리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각 족속이 나뉘어 각각 슬퍼하는데,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전쟁에 승리할지라도 이스라엘에 남겨진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제 13장으로 넘어와서, 이날에 하나님께서는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더러움은 ‘부정함’이라는 의미로 봐도 무관합니다.

샘이 열린다는 표현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스가랴는 제2 성전 건축과 연결된 예언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성전을 통해 죄와 부정함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전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샘이 ‘그 날’이라는 특정한 시기와 연결된 점과 그날이 성전 완공을 가리키지 않고,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샘은 특정 장소를 뜻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샘은 어떠한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죄와 부정함을 사라지는 현상,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선포입니다.

이 샘이 성전의 대체제가 아니라면, 이는 일시적인 회복을 위한 곳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날’을 전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일시적 회복과 용서를 위한 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죄와 부정함이 모두 사라지리라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고, 부정한 상태에 놓이지 않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마르지 않는 생명수와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2절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상을 사라지게 하시며, 우상은 기억도 나지 않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또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영, 부정한 영을 제거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한 영은 조금 확대해서 이해한다면, 질병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은 질병에 걸린 상태를 부정하다고 여겼고, 이런 상태가 악한 영에 의해 유발된다고도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에 죄를 범하지 않고, 부정한 상태에 놓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다고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또 확대해서 생각하면 질병과 아픔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곳에는 죄도, 부정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사라짐

다음으로 이어지는 3-6절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조금 무서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부모가 그를 칼로 죽이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 시기에 예언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게 될까요? 이는 예언자의 역할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습니다. 그들이 받은 말씀은 사람의 죄악에 대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죄를 깨우치고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4절에 나타난 선지자도 예언자와 같은 히브리어 ‘나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세상에 죄는 없습니다. 죄가 없기에 회개할 일도 없습니다. 만약 이런 시기에 우리의 삶을 돌이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잘못된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날에 예언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글자 그대로의 내용은 조금 무서운 말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지금 시대로 바꿔 말하자면, 아무도 법을 어기지 않기 때문에 경찰도 검찰도 법관도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아마 법체계의 궁극적 지향점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말씀은 경찰, 검찰, 법관이 모두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날에 사라지게 되는 사람, 직업은 예언자 뿐입니다. 죄와 부정함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예언자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스가랴는 제사장이 사라지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2성전 건축에 앞장섰던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높이는 예언도 합니다.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스가랴 다음에 이어지는 말라기의 말씀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학자들은 스가랴와 말라기의 문체로 인해 이 둘이 본래 한 권의 예언서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학문적 이야기를 떠나 12소예언서 안에서 이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함께 살펴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말라기는 네 장밖에 되지 않는 책인데, 그중 두 장인 1-2장은 제사장의 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장은 정확히 제사장의 죄라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성전에서 벌어지는 잘못에 대해 지적합니다.

스가랴의 마지막 부분과 말라기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그날에 예언자는 사라지지만 제사장들은 사라지지 않고, 잘못되었던 그들의 행태만 사라져 온전한 제사장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말라기는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을 다르게 규정합니다. 예언자는 이미 죄를 범한 사람이 되돌아오는 역할을 수행한다면, 제사장은 율법을 선포하여 사람이 처음부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말라기 2장 5-6절에 잘 나타납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예언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앞의 내용과 같습니다. 죄가 없는 세상입니다. 오직 참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가기에 죄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가기에 그곳에는 부정함이 없습니다. 부정함이 없기에 차별도 비방도 모욕도 없습니다. 부정함의 사라짐은 또 질병과 아픔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

저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신 줄 믿습니다. 죄의 길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에 더 이상 죄의 길을 바라보지 않는 분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하고, 이를 세상에서 실천하고 살아간다면, 그곳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세상에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죄와 부정함이 사라져 차별도 편견도 없는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이의 범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이사야가 꿈꿨던 것처럼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놀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세상을 바라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누군가를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를 미워하게 만들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 하도록 종용하며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가는 세상입니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세상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세상은 전자입니다.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바라신다면, 세상의 잘못을 꾸짖는 예언자가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며 바라고 그 세상을 위해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스가랴는 자신이 예언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사라질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런 세상을 선포했습니다.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신다면, 차라리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신다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먼저 스가랴와 말라기의 선포대로 살아갑시다. 그때에 우리로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갈 줄 믿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처럼 생명과 평강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실 줄 믿습니다. 화평과 정직함이 여러분과 함께하며,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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