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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진일보”

기사승인 2020.05.21  16: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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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1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2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3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열왕기상 19:1~4/새번역)

바알 예언자 450명과 홀로 맞서 대승을 거둔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세벨의 살해위협에 잔뜩 겁을 집어 먹습니다. 그리도 용감했던 그가 두려움이 가득해 도망치고 죽여 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합니다. 같은 사람인가 싶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엘리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지력에는 총량이 있습니다. 총량의 범위 안에서는 거대한 문제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용한 의지를 다 소진하여 고갈되면,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무너지는 게 마음입니다. 함박눈 수북한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때가 그렇습니다. 부러지기 직전 짧은 순간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게를 잴 수도 없는 눈송이 몇 개로도 가지가 부러집니다.

▲ Antoine Josse ⓒGetty Image

어쩌면 450명과 맞서면서 엘리야의 의지력은 바닥난 게 아닐지. 결국 이겼지만, 살해 위협을 받아들이기에는 남은 힘이 턱 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작은 손길이 작지 않은 순간입니다. 별 말 아니어도, 그저 어깨를 다독여 주는 수줍은 몸짓이도, 괜찮은지 물어주는 전화 한 통화도 그 마지막 고비를 넘어서게 하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별 말 아닌데, 다그치고 책망하는 몇 마디 말에도 부러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여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도망치는 것조차 더는 못하겠으니, 이 못난 사람을 죽여주셔서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게 해달라는 애원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은 이미 부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의 끝에서 봄이 움트듯 엘리야의 의지가 바닥 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먹고 쉬게 하시고, 일어나 광야 길을 나아갈 힘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다시 힘을 내서 행하지만, 오롯이 하나님 주시는 힘에 기댑니다.

정말 더는 못하겠습니다, 기도를 토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면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 이제 그만 쉬고 내게 맡기거라. 내가 너를 통해 해나갈테니.’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은 자기 의지력의 총량에 근거한 오판일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더 해보겠다는 의지가 바닥난 후에도, 그저 주님 주시는 만큼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 시종을 맡기오니, 이끌어 주옵소서. 인도하옵소서. 식상할 만큼 익숙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기도에서만 존재하는 거짓이 아닙니까. 주님께 맡긴다면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자기 판단과 욕망대로 해나지 않습니까. 기도가 끝나고 나면, 맡긴다면서도 자기 혼자 끌어안고 고민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오롯이 맡기고 자기 몫의 일에 몰입하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진정 주님께 맡기는 기도와 삶이 얼마나 됩니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경험해 보기는 했을까요?

삶이 기도라고 하면서, 자기 경험과 욕망과 판단대로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 뜻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경우는 너무나 드물어 보입니다. 사실 그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 경험과 판단과 바람대로, 옳다고 믿고 하나님 뜻이라 믿는 대로 행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린 상처와 두려움, 욕망과 집착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자신이 철저히 무너진 자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백척간두에서 드디어 한 걸음을 내딛듯, 자기가 끝난 곳에서 드디어 주님과 함께 합니다. 그제야 오롯이 주님께 맡기고 따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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