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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아픔이 나를 비껴가지 않기를”

기사승인 2020.05.18  17: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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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1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2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3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7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열왕기상 19:1~7/새번역)

이 장면에는 이상해 보이는 구석들이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홀로 맞서 이겼던 엘리야가 맞나 싶습니다. 그리도 용감했던 그가 두려움에 가득해 도망치고 죽여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천사도, 하나님도 이상해 보입니다. 40주야를 더 가서 호렙산에 이르게 하시고, 그제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7000명이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왜 로뎀나무 아래, 가장 절망스러웠던 그 때 말씀해주시지 않는지.

▲ Franz Xaver Messerschmidt, 「The Vexed Man」(1770) ⓒGetty Image

너무나 절망스러웠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 이상함은 조금씩 옅어집니다. 상실감, 박탈감, 절망감으로 어찌할지 모르를 때, 주변 사람은 어떻게든 위로해주려 합니다. 그 위로 상당수는 답과 해결책을 일러주려는 것입니다. 빨리 힘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책과 답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만큼 힘과 여유가 생길 때까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음에도 너무 아픈 것입니다. 상처가 너무 클 때는 해결책들마저 짐스럽습니다.

알지만 할 수 없을 때, 알아도 하기 싫을 때, 그럴 때는 그저 곁에 함께 있어주고 기다려주는 존재가 절실합니다. 어쩌면 천사가 엘리야에게 그렇게 함께 있어주고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줍니다. 먹고 잠이 들자 얼마 후 다시 와서 두 번째 먹을 것을 줍니다. 음식으로 몸이 기운을 차리고 잠으로 마음이 쉼을 얻도록 돕고 또 돕습니다. 그 과정에 함께 하며 기다리고 기다려줍니다.

엘리야는 그제야 죽여 달라던 극단적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호렙산까지 사십 주야를 더 갈 힘과 마음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사십 일을 나아가면서 엘리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심리학에서는 걷는 명상의 효과를 강조합니다. 자리가 변하면 마음도 변하고, 왼발 오른발 번갈아 움직일 때, 좌우뇌가 자극되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걸어갔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분명 긴 시간의 이동이 마음을 맑고 안정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알아들을 준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상담의 기술을 일러주려는 본문은 아니겠죠. 그러나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앞에서 이 본문은 그들을 어떻게 만나야할지 보여줍니다. 너무 빨리 정답을 제시해서 더 이상 아파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다그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사회적 재난, 부조리하고 억울한 정치적 폭력에 상처당한 이들이 직면하기 쉬운 압력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덮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다그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대하는 천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에게 필요한 쉼과 시간과 여백을 선사해줍니다. 그저 함께 하며 기다려 줍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사, 2018, 9)에서 아내와 자신에게 오랫동안 슬퍼할 일이 생길 때, 꼭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 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사랑하는 이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아픔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것은 더욱 원하지 않습니다. 슬픔에서 서로가 소외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랑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천사가 엘리야의 절망을 빨리 밀어내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역시 사랑으로 보입니다. 엘리야만큼 아파하고 절망할 수는 없어도, 홀로 두지는 않습니다. 엘리야를 좌절과 절망 속에 홀로 두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해해줄 수 없고, 자신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고 명하시는 주님, 같이 느껴줄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 홀로 두지는 말아야겠습니다. 함께 기억해주고 조용히 곁이라도 지켜줘야겠습니다. 그 분들의 아픔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도록,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도록.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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