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죄의식과 하나님 나라”

기사승인 2020.05.04  17:42:02

공유
default_news_ad1

- 살며 묵상하며

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태복음 5:27~28/새번역)

“너희는 ‘남의 배우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계명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동침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의 덕을 지켰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 마음은 너희 몸보다 훨씬 빨리 정욕에 더렵혀질 수 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곁눈질도 너희를 더럽힌다.(메시지성경)

이 말씀을 대할 때면 대학 때 일이 떠오릅니다. 새벽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나와서 마시던 자판기 커피 한 잔이 떠오릅니다. 과제나 수업이 아니라 영혼이 갈망하는 책, 마지막 장을 덮게 되는 게 싫어서 아껴 읽었습니다. 더 읽고 싶은 마음을 접고 나와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음미합니다, 책과 커피의 여운을. 그러던 어느 아침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쳤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 누구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깨를 보니, 아끼던 옷에 비둘기의 배설물이 두툼합니다.

세월이 지나 이제는 미소가 번지는 장면입니다. 그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음욕을 새 똥에 빗댄 비유 때문입니다. 신약학 수업에서 이달 교수님이 언급한 비유입니다. 그 강의에서 깨달은 바는 대략 이렇습니다. ‘음욕이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이 죄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새 똥에 맞는 게 어찌 자기 책임이겠는가. 그런데 새 똥을 맞으려고 찾아다니면 다르다. 음욕도 그렇다. 음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음욕을 일부러 떠올리고 떠오른 음욕을 붙잡고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것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면 죄다.’

▲ Emily Tan ⓒPinterest

내면에 묶여 있던 무엇인가가 풀려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 사춘기 시절, 이성에 눈을 뜨면서 죄의식은 한층 깊어졌습니다. 음욕이 죄라고 알아들었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건강한 청소년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시절 부흥회나 수련회에서 눈물 흘려 회개하는 기도는 기본 옵션이었습니다. 수련회의 설교는 늘 죄를 일깨우는 데 중심이 있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시간씩 목이 쉬도록 자책 가득한 절규를 해야 기도 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이라 여겼고, 은혜 받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청년부에 이르도록 매번 대부분의 수련회와 부흥회는 이런 기도의 반복이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연합수련회들 중에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그런 회개 기도가 없고, 주님을 배신한 제자들이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런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조차도 그렇게 유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명백한 사실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보였습니다. ‘네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겠니? 자 고백하고 회개하렴….’ 이런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셨죠. 사춘기 여린 마음으로 거짓말, 도둑질, 음욕, 게으름, 위선 등의 나쁜 행동 리스트를 따라 자신을 검열하고, 자책감과 죄책감을 부풀리는 것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선포를 이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죄를 자백해라,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러나 말씀을 깊이 만날수록 다른 선포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 뜻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니 돌이켜서 그 뜻을 함께 이루며 살아가라.’ 죄책감을 북돋우는 개인윤리차원의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돌이키는 실천의 돌이킴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실천의 돌이킴으로 회개를 강조했다면, 교회가 지금 이 모습일지.

음욕의 죄에서 시작한 묵상이 하나님 나라까지 번져왔습니다. 음욕 자체가 죄가 아니라 음욕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죄다? 톰 라이트 역시 “예수님이 우리에게 피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최초의 충동에 이어지는 응시, 그리고 음욕에 찬 상상”(톰 라이트 저,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Ⅰ』, 양혜원 역(서울: IVP, 2010), 82)이라고 풀었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는 다르게 보입니다. 몸으로 간음을 범하지 않았어도 마음과 상상과 시선으로 이미 더럽혀진 자신을 돌아보게도 합니다. 그러나 음욕에 대해 묵상이 음욕으로인한 죄책감을 북돋우는 맥락을 성찰하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성경 주석이라면 너무 벗어난 일이겠지만, 성과 정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김누리 교수는 말합니다. “죄책감을 내면화한 자아는 권력 앞에 굴종한다.”(유튜브 「차이나는 클라스」, “김누리의 교육 혁명 제안” 중에서) 죄책감이 높은 사람의 약한 자아가 권력에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욕망에 대한 정죄와 억압은 죄책감을 북돋웁니다. 그리고 죄책감이 커진 약한 자아는 권력에 굴종하기 쉽습니다. 죄책감이 내적 통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통해 정치적으로 건강한 자아의 토대를 다진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에서는 다를까요? 시시콜콜한 잘못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인 윤리의 차원에 갇힌 신앙, 죄책감만 커진 신앙 역시 권위에 굴종하게 쉽습니다. 음욕의 문제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강화하는 교회의 가르침 자체를 돌이켜 보게 하는 지점입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설교에 아멘으로 복종하고, 입에 올리지도 못할 일을 저지른 목사에게 굴종하는 행태는 이와 무관할까요?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도 건강한 정치적 실천을 위한 성교육이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돌이킴의 회복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개인적 자책감 차원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적극적 삶의 회개가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케냐에서 온 분이 한국의 동물원에 가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드넓은 초원에서 만나던 동물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좁은 울타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시체처럼 앉아만 있는 동물들이 가슴 아파보였던 것입니다. 원죄를 강조하고, 개인 윤리의 죄악을 강조하는 신앙이 죄책감이라는 좁은 철창에 신앙을 가둔 게 아닐까요?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던 기독교 신앙의 이빨과 발톱이 그렇게 뽑혀 버린 게 아닌가요? 너무 착하기만 하고 굴종적인 된 신앙이 철창 속 사자처럼 슬퍼 보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