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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백성에 대한 심판을 멈추지 마소서

기사승인 2020.03.29  16: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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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히 함께 가소서(출애굽기 33:12-17)

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자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가 전해왔던 신앙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은 많은 신앙인이 은혜로운 말씀으로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참으로 은혜로운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아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후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은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입니다.

이들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해석을 붙일 수 있습니다. 훗날 북왕국의 단과 벧엘에 세워진 금송아지와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출애굽을 하던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찾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내산 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는 했지만, 이는 너무도 두려워서 가까이할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들 가까이 둘 수 없는 신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에 보이고, 가까이 둘 수 있는 신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신은 믿지 못하고, 반대로 너무 거대한 존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중적 특성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신을 요구했고, 아론은 그런 신을 만들어주었습니다.

▲ Gerard Hoet, “모세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으로부터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듣고 불꽃과 연기를 보며 두려움에 휩싸인다(Moses speaks with God, and the Israelites in the foreground panic when they hear thunder and see flashes of light and smoke coming out of the mountain[출 20:21]. 1728) ⓒRijksmuseum.nl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그날 백성 중 삼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산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32:3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앞에서 길을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33장으로 넘어가면서 한 번 더 변경됩니다. 33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혹시 이스라엘이 잘못을 범하여 이들을 진멸하실까봐 이들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3장 2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가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2장 34절에서 ‘보응할 날’을 말씀하셨지만 33장에서 이르러서는 그 보응마저도 관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간구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세의 간구입니다. 12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아신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아신다’로 바뀌어 있는데, 하나님과 모세 사이가 가깝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서 제게 은총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먼저 간구합니다. “제게 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이어진 간구는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입니다. ‘이’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이 되도록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간구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부재의 순간에,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알려달라는 간구로 보입니다.

이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의 간구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달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함께 해달라는 모세의 간구는 이다음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행하셔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이 나타난다고 간구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 일도 내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은 단순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은혜로운 말씀으로만 보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서 보면, 하나님의 부재하심에 대한 염려와 함께 하심에 대한 간구로 보입니다. 그런데 더 깊게 보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부재에 대한 간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심판의 부재에 대한 모세의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기를, 판결하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 잘못을 범할 것입니다. 이를 아시기 때문에 이들을 향한 혹독한 심판으로 모두 죽어버릴까봐 더 이상 판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자신들의 재판관이 되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길을 인도하는 사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은 분명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이 바른 모습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죄에 가득 찬 모습으로 가나안에 도착할 것이며, 가나안에서도 또 다른 죄를 배우고 행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시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세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입니다.

잘 사는 삶인가 바른 삶인가?

사순절 기간,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이 시간에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복과 은혜만을 바라는 신앙은 아니었는가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런 상황을 제안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갈 수 있는 은혜만 주고, 심판은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을 붙들고 간구합니다. 복만 주시지 마시고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야단도 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지금 시대에 아이들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부모는 아이가 ‘바른 사람’으로 성장하기보다 ‘잘 사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양육합니다. 이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고 참된 성도’가 되기보다 ‘잘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나옵니다. 모세는 ‘잘 사는 백성’이 되기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심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또 다른 맥락에서 지금 정부는 모이는 예배를 잠시 멈춰주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목회자와 성도님들은 안식일 준수라는 계명을 어긴다고 생각하시기에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계명을 지킵니까? 왜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되는 삶은 결코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삶이 아닙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계명을 잘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나만 잘 사는 삶’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만 복 받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잘 살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성경 아무 곳이나 살펴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꾸짖으며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던 안식일 법 역시도 ‘나만 복 받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한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사회를 생각하며 이들과 함께 잘 살기를 바라며 행동하는 삶이 하나님 안에서 바른 삶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잘 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어쩌면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내가 너희를 심판할까봐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내 사자를 보내주어 그가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아마 우리는 “심판 없이 복만 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하며 “아멘”으로 화답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이런 신앙은 어쩌면 하나님 없이 복만 남겨진 삶으로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계속 가르쳐 왔기에 나 혼자만 잘 사는 삶으로 이어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간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당신께서 재판관이 되어 주십시오.”

복만을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때로 우리를 야단치시고 바르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실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이렇게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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