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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신참변의 타깃, 간도국민회, 마을과 학교

기사승인 2020.03.28  17: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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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19개 교회를 찾아서-경신참변 100주년을 기념하며 (2)

간도국민회의 설립과 조직

간도국민회는 <대한국민회>라고도 하며 원 이름은 <대한간도국민회>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도국민회 또는 국민회로 약칭하기로 한다.

용정의 3∙13만세시위 후에 간도에 나타난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그 이전의 단체들과는 달리군사기지 건설, 군자금 모집과 군수품확보 그리고 무장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간도국민회는 3∙13만세시위를 계기로 세워진 무장독립운동단체 중에 가장 큰 항일단체였다. 그 전신은  3∙13 만세시위를 주도한 <간도독립운동의사부>였으며, 3∙13 만세시위 후에는 이름을 <한족독립기성총회>(1)로 바꾸고 구춘선을 회장, 마진을 부회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로 편성되었다.(2)

1919년 3월말, 러시아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의 운동방침을 고려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려는 취지에서 이름을 <대한간도국민회>로 개칭하고 회장에 구춘선, 부회장에 강구우(후기 서상용), 총무에 김규찬을 세웠고 기존의 기독교장로회 (캐나다 장로회)(3) 교구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총회 아래 5개의 지방총회를 확립하였다. 중앙총회 본부는 초기에는 하마탕에 두었다가 후기에 의란구 구룡평으로 옮겼다. 지방총회는 훈춘현(4)을 제외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에 두었다.

중부총회 본부는 국자가 서구에 있었고 회장은 강구우였으며 두 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제1중부지방회는 연길현 팔도구, 태양, 조양천 일대를 관할, 회장은 정재면이었으나 후기에는 이규병이 담당하였으며 부회장은 허동규였다. 제2중부지방회는 연길현 국자가지방을 관할하였고 회장은 강구우가 겸임하였다.

동부총회 본부는 초기에는 연길현 지인향 화련리 였고 후기에는 연길현 용지향 화전자였으며 회장은 양도헌이었다. 두 개의 지방회가 있었으며 제1동부지방회는 왕청현 양수천자 (현 도문시 소속) 일대를 관할, 회장은 미상이다. 제2 동부지방회는 용지향 화전자일대를 관할, 회장은 양도헌이었다.

남부총회 본부는 화룡현 지신향 명동이었고 회장은 마진, 재무는 남세극이 담당하였으며 산하에 2개의 지방회가 있었다. 제1 남부지방회는 용정과 회령대안 일대를 관할, 회장은 마룡하였고, 제2 남부지방회는 화룡현 이도구, 삼도구, 무산대안 일대를 관할하였고 회장은 양씨 성을 가진 자였다.

서부총회 본부는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였으며 회장은 한대진이었다. 1920년에 신설된 관계로 지방회를 나누지 않았다. 돈화현관내의 국민회지회도 서부총회에 속하였으며, 명월구에 <四一상점>을 설치하고 박홍준을 점주로 하고 공원준을 연락원으로 하였다.

북부총회는 본부를 연길현 춘화향 합수평 리대방자(현 왕청현 소속)에 두었고 회장은 김윤덕이었다. 제1 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화향일대(현 왕청현 소속)를 관할, 김윤덕이 회장을 겸임하였으며 제2 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양향일대(현 왕청현 소속)를 관할, 회장은 김혁춘이었다. 각 지방의 산하에는 각 촌 지회가 있었고 1920년 8월 통계에 의하면 촌지회가 100여개 있었다.(5)

▲ 간도국민회 북부지방회 본부 하마탕 교회 교인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간도국민회는 1920년 봄부터 청년들을 조직, 훈련하여 지역의 안전을 담당하는 경호대와 항일전쟁을 준비하는 국민회군으로 나누었다. 경호대의 총사령에는 ‘이용’을, 국민회군의 사령에는 ‘안무’를 임명하였다.

국민회군은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서 각 마을의 지회에 교관을 파견하여 청장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 후, 그들을 예비병이나 경호대에 편입시켰고, 청년들은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에 가서 군사훈련을 시킨 뒤 국민회군으로 편성하였다. 1920년 8월 통계에 의하면 국민회군의 총병력 수는 450명, 무기는 보총 400정, 권총 160정, 수류탄이 다수였다. 국민회군은 1920년 5월, 군사인재 확보를 위하여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현 안도현 소속)에 사관훈련소를 세웠으며, 독립군의 연합을 위하여 1920년 5월, 홍범도의 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 훈춘한민회의 군사부, 신민단의 독립군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6)

간도국민회는 산하에 간도청년회를 두고, 훈춘한민회와 신민단, 명월구의 의민단, 왕청현의 라자구 의사부와 연계하여 활동을 하며, 기층단위인 마을부터 시작해서 상해임시정부 그리고 중국지방정부와 연계하여 간도의 유일한 지방행정자치조직을 자처하였다. 내부에 사법부와 법무사령부를 설치하여 간민들의 소송문제를 취급하였다. <군정분리>를 주장하여 지방자치행정은 오직 국민회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고자 하였다.

간도국민회는 항일무장투쟁 활동의 일환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자기 관할 아래 지방지회로 하여금 군자금과 군량 등 의무금을 징수하게 하였다. 징수액은 토지 소유에 따라 15정보 이상의 부농은 100-300원까지, 보통 농민에게는 평균 속미(좁쌀) 2되, 짚신 3켤레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병원, 상점, 여관 등에도 군자금 출연을 요구하였다. 이외에도 모연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까지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런 국민회의 군자금 모금은 다른 단체에 비하여 성공적이었으며 1920년 5월까지 17만원이라는 거금을 모금하였다.(7)

이처럼 간도국민회는 지방총회 100여개, 회원 8,000여명을 가진, 만주전역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로서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기반을 튼튼히 다져가면서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항일무장 독립투쟁사 (상)』 229~230에는 간도국민회의 성립과 활동이 잘 정리되어 있다. 3∙1운동 직후 건립된 조선독립기성회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공포되자, 임시정부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단체의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변경하였다. 국민회는 왕현, 춘양향, 합마탕에 본회를 두고, 그 밑에 동∙서∙남∙북∙중의 5개 지방회와 근 70여 개를 헤아리는 지회를 두었다. 국민회의 성원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으나, 후에 불교∙천도교∙공교회 계통의 인물들도 가담하였다. 회장은 구춘선이 담임하였다. 국민회는 간민회의 맥락을 이어 북간도 한인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한인의 자치를 비롯하여 독립군 편성, 군자금 모금 등 민정∙군정 활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국민회는 처음에 행정권익 단체로서 독립군을 편성하지 않았다가 191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직할 독립군 부대를 설치를 시작해서 대한 국민회 독립군이라 부르고, 사령관에 안무, 부관에 최익룡, 중대장에 조권식, 임병극, 향관에 김석두∙허동규를 임명하여 병사를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국민회 독립군은 국민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비교적 재정이 풍부하였기에 정예군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 6월 국민회 독립군은 근거지를 왕청현 의란구에 두고 500명의 군인, 소총 400정, 권총 150정, 탄약 7,000발 그리고 다수의 수류탄으로 무장한 강력한 독립군으로 성장하였다.

1920년 3월 29일에 작성된 일제 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에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진공작전은 총 24회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3월 15일부터 27일 사이에 있었던 온성전투는 규모가 큰 전투였다. 특히 18일에 벌어진 온성군 일본헌병주재소 습격전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8) 상해임시정부 군무부는 1920년말에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과 관련하여 “3월부터 6월초까지의 유격전이 전후 32회나 전개되었고 일제군경 등의 관공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공식 확인하였다.(9)

이러한 활발한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운동기지화의 결과이며 북간도사회에 확산된 캐나다 장로교의 교회와 학교 설립과 맞물리고 있으며, 길동전도대, 삼국전도대, 간민교육회, 간민회, 간도독립운동의사부의 취지와 인적자원을 이어받은 간도국민회의 활동의 결과물이다.

일제가 간도참변을 위해서 작성한 <불령선인> 명단이 <간도국민회>가 일제의 타깃임을 말해 준다. 이는 곧 캐나다장로회 보호 속에 있는 민족학교와 교회가 간도참변의 타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일제가 ‘불령선인’ 토벌을 위해서 작성한 <항일마을 및 항일학교 조사표>는 경신참변이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의 근거지 초토화가 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이나 기타 기록이 빠트린 소각된 마을 속에 있는 교회를 찾아낼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일군이 <항일마을 및 항일학교 조사표>에 근거하여 토벌한 연길현의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영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의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현의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들은 장로교회 기반 위에 조직된 국민회나 대종교에 근거한 북로군정서와 관련이 있다.

항일마을 및 항일학교 명단

연변 각지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총영사관과 분관, 경찰서들이 일본군에게 항일무장부대, 항일의식을 가진 한인마을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간도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만든 <항일한인 마을 및 학교에 대한 조사표>에 의하면 토벌의 대상이 된 한인마을은 아래와 같다.

연길현 안에는 이도구 어랑촌, 이도구 시장 및 수남촌, 장인강 보이동, 세린하 회막동 부근, 유수하, 묘구 일대, 차조구, 동불사 북구, 태평구, 팔도구 부근 일대에 있는 구송허(구수하), 광제촌, 연집강,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 하마탕, 북삼차구, 용정촌 신촌, 화전자, 화령촌(화련리), 수심포 등 21개의 마을 내지는 지역이 있다. 화룡현 안에는 상하광포, 유동 부근, 청산리, 청파호, 이수구, 장재촌, 용암촌, 안방촌, 팔도하자 남쪽에 있는 장동, 송전 장하촌, 걸만동 등 11개 마을내지는 지역이 있다. 왕청현 안에는 소황구, 유수하, 대감자, 흑웅동, 신흥평, 상석현,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일대 등 11개의 마을 내지는 지역이 있다.(10)

일제가 작성한 훈춘현 안에 있는 항일마을 명단을 찾지 못했으나 캐나다 장로교 교회가 있는 숭례향의 전선촌, 소홍기하, 연통라자, 춘화향에 남별리, 노지구, 사도구, 마적달, 서북구, 용지향의 삼도구, 일송정, 두도구, 송전동, 장성촌, 신풍, 사소봉, 차대인구, 덕혜향의 대황구, 북구, 청수동, 중구, 동강자, 라권구 경신향의 금당촌, 옥천동, 서가산,포은동, 구사평 그리고 수신향의 현성 서문밖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항일학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연길현에는 돈향학교(천주교), 흥동학교(간장암, 캐나다 장로회), 배영학교(1919년 10월 교내 맹호단 조직됨), 사립영신학교(캐나다 장로회), 사립삼성학교(캐나다 장로회), 흥동학교(장흥동, 캐나다 장로회), 진동학교(신흥학교, 캐나다 장로회), 보진학교(장은평, 이도구, 캐나다 장로회), 명신학교(캐나다 장로회), 경애학교(평강수남사 대오도구, 항일학교) 사립숭신학교(구세동, 캐나다 장로회), 숭례향 사립 제1 소학교(차동, 항일학교), 숭례향 사립 제2 소학교(대명월구, 항일학교), 숭례향 사립 제3 소학교(소명월구, 항일학교), 숭례향 사립 제4 소학교(용흥동, 항일학교), 숭례향 사립제5소학교(유수하, 항일학교) 등 16개의 학교가 있었다.

화룡현에는 명동예수학교(용암촌, 캐나다 장로회), 사립명동녀학교(용암촌. 캐나다 장로회), 덕흥학교(천주교), 영동학교, 송동학교(송전동), 창동학교(용지사 장동, 캐나다 장로회), 광동학교(캐나다 장로회), 구호학교(개태사, 캐나다 장로회), 정동학교(자동, 캐나다 장로회), 영성학교(목조동, 캐나다 장로회), 화성학교(걸만동 삼동, 캐나다 장로회), 원동학교(화룡사 칠도구 어구, 항일학교, 캐나다 장로회), 흥동학교(화룡사 칠도구 서동, 캐나다 장로회), 용신학교(상리사 이천포, 항일학교, 캐나다 장로회), 양성학교(영화사 강성동, 항일학교, 캐나다 장로회), 학성학교(송언동, 대종교), 덕성학교(광포 남양동, 캐나다 장로회), 청일학교(삼도구 청파호, 대종교), 동일학교(이도구 어랑촌, 대종교) 등 12개의 학교가 있었다.

왕청현에는 사립명동학교(왕청 덕원리, 대종교), 사립원동학교(대황어구, 대종교), 사립고소학당(대감자 용암촌, 대종교), 의흥학교(삼도하), 사립창동학교(서대파, 삼차도, 대종교) 등 5개의 학교가 있었다.(12)

일제가 작성한 훈춘현 내의 배일학교 명단을 구하지 못하였다. 양봉송은 『훈춘조선족발전사』 75쪽에서 경신참변기간에 19개의 학교가 소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19개 학교는 대부분이 전도와 교육을 겸해서 독립운동을 별인 황병길, 이명순, 오병묵, 훈춘한민회를 세운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불에 탄 학교는 숭신학교(금당촌, 캐나다 장로회), 전선촌(캐나다 장로회), 진명학교, 북일학교(캐나다 장로회), 신풍학교(캐나다 장로회), 남별리학교(캐나다 장로회), 동명학교(캐나다 장로회) 등이 있고 훈춘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학교에는 광동학교, 북일중학, 동명학교, 영생학교, 흑정자학교 등이 있다.(13)

당시 <독립신문>에 발표된 연길, 화룡, 왕청, 훈춘현의 소실된 학교 수가 59개로 발표되었지만 이 숫자 또한 연구가 진행되면 바꾸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경신참변과 피해상황에 대한 통계를 고찰해 보고 참변을 당한 지역과 항일단체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미주 1) <한족독립기성총회>를 <조선독립기성회>라고 칭하기도 한다. 박창욱 외 다수, 『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1999), 46.
(미주 2) 허태일 외 다수,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 개척』(1999), 374.
(미주 3) 캐나다 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들이 만주에서 사용한 이름은 기독교장로회이지만 현재 한국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이름이 같으므로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캐나다 장로교회’ 칭한다.
(미주 4) 간도국민회가 훈춘현에 지방총회를 두지 않은 것은 캐나다 장로교회 안에서 함께 연대하는 훈춘한민회의 거점이 훈춘이었기 때문이다.
(미주 5) 허태일 외 다수, 376~377.  
(미주 6) 김춘선 주필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2015), 69.
(미주 7) 같은 책, 69.
(미주 8) 같은 책, 75.
(미주 9) 같은 책, 75.
(미주 10)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2001), 408~411.
(미주 11) 최석숭, 『훈춘조선족 이민사』(2015), 284.
(미주 12) 김철수, 앞의 책, 411~414쪽
(미주 13)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지1』(2002), 471.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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