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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겔 18:1-4, 21-32; 갈 2:15-21; 눅 23:39-43)

기사승인 2020.03.27  16: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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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다섯째주일(3월29일)-제주 4·3기념주일

1.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구약 최고의 조직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구약 본문의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유다의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기, 곧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있던 바벨론 땅에서, 비탄에 빠진 백성들을 향하여 예언했던 인물입니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비록 유다가 마른 뼈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불러 모아, 유대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줄 것이며, 다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서두에 제가 에스겔을 조직신학자라고 말씀드렸는데, 에스겔의 주제가 신론의 핵심 내용을 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구성하고 있는 신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나 패역한 생활에 빠진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날 것이며(겔 11:22-23)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실 것이다(겔 6장). 둘째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실 때, 인간의 삶은 생기를 얻고 회복된다(겔 37:1-14 ; 47:1-12). 셋째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 아니라, 열방을 심판하고 회복시키는 역사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겔 25-32장).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데, 에스겔이 강조하는 신 앞에서의 ‘개인의 책임’입니다. 즉, 각 사람은 부모의 죄를 상속하지 않으며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영혼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겔 18:1-4). 따라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의로운 생활, 곧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만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겔 18:31). 이렇게 심판자이신 하나님,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 앞에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 조직신학자가 바로 에스겔입니다. 그럼, 오늘 에스겔 본문 말씀을 볼까요?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겔 18:1-2)” 이 말은 포로가 된, 남 왕국 유다 백성들이 그 상황을 분석하며 아버지의 죄 값이 아들에게까지 미친것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는 것을 불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3-4).”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이 똑같이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부모의 죄를 상속하지 않으며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를 설명하면서, ‘불순종에 따른 저주’와 ‘순종에 따른 축복’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대적과 원수들의 손에 붙여 패할 것(레 26:17)이며, 나아가 “너희 남은 자가 너희의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쇠잔하며 그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그 조상 같이 쇠잔하리라(레 26:39).”고 예언합니다. 그 말씀을 오늘 에스겔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입니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1-23)
 
에스겔은 이렇게 정의와 공의를 계속 반복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악인도 그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으로 넘어가 볼까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7-28).” 그러나 이렇게 돌이켜 회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 양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회개하는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2. 한 행악자의 고백,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세 개의 십자가>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이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하십니다. 그때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고 합니다. 반면,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죽을 때 까지 회개하지 않죠?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회개합니다. 또한 회개한 한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가장 희망적인 말입니다. 저 역시 이 세상에 주어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여,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 한 사람의 소원을 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한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비록 의인으로 살았을지라도 돌이켜 악을 행하면 그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구약 에스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시 에스겔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겔 18:24-25)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악을 행하면, 그가 범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또한 공평하다는 말씀입니다. 계속 볼까요?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겔 18:26)”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6a).”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겔 18:29b)”라고 묻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공평하신대,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 생각하고, 이를 불공평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죠? 이어지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0-32)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돌이키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제주 4·3사건과 개신교 서북청년단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주일이죠?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건물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아니지만,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혹은 가족끼리 가정예배로 예배를 드리며 면대면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인내하고 참고, 감염전파를 차단하면 부활의 아침에는 얼굴과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절기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단 총회가 지정한 제주 4·3기념주일인데, 70여 년 전 제주도에서 수난당하고 죽어간 제주도민을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그 당시 학살에 가담한 개신교가 오늘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한 행악자 처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소원합니다.

제주 4·3사건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이후, 이 땅을 미군들이 지배하는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발생한 시위를 포함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인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여에 걸쳐 2만 5천에서 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많았던 사건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끝나고 가두시위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해당 경관이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본 시위 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이것을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 총을 쏘게 됩니다. 이때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구경하던 일반 주민들이었습니다.

3·1발포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노동자, 각급 학교 교사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과 단체가 동참하는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총파업에 강경으로 대응했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타 지역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며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습니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습니다. 왜 국민을 지키는 군인이 국민을 학살하고 진압해야 되느냐는 이유였습니다. 아무튼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을 당하는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전남사건(여수, 순천을 말합니다)을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해야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할 것이다. 따라서 (제주 4·3사건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발근색원은 ‘뿌리째 뽑아 근원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제주 4.3사건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서북청년단’입니다. 이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장로교 교인들이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故)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이무튼 이들은 경찰과 합세해 제주도민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도 이렇게 말합니다. “서북청년단은 경찰보다도 더 강하게 경찰력을 행사했으며, 그들의 잔인한 행태는 주민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우리 개신교에는 공산주의자의 손에 목사나 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식의 ‘순교 서사’는 많습니다. 또한 1948년 여수사건 당시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아들로 삼았다는 ‘용서 서사’도 있죠? 그러나 학살을 자행하고, 사람을 죽였으나 ‘참회하는 서사’, ‘용서를 구하는 서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지난 2018년 제주 4.3 70주기를 맞아 한국교회가 진실을 인정하고 죄악을 고백했으면 좋았는데, 그저 제주 관광 정도의 행사로 지나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제주도 기독교 성지 순례를 간 적이 있었죠? 학생회 아이들과도 한 번 더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4.3사건 희생 장소에도 들렀습니다. 사진은 모슬포 섯알오름입니다. 기억이 나시는지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예비 검속’이라는 미명 하에 제주도민들을 학살합니다. 예비 검문단속은 제주시, 성산포, 모슬포에서 이뤄졌는데, 모슬포 섯알오름에서는 25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끌려간 아이들의 고무신도 본 적이 있었죠? 이 섯알오름 학살은 제주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자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지휘관은 김윤근과 김동하였는데, 이들은 훗날 5.16군사쿠데타에도 가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국 근대사는 죽임의 역사, 반역의 역사였습니다.

<서귀포시 모슬포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예비 검문단속으로 250여명이 학살당했다>

따라서 제주 4·3사건은 군사정권 동안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며 금기시되었다가 이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들어서며 4·3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역사의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정부가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으며, 현재 희생자 보상 등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회개한 것이죠.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으면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회와 회개는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자기 자신이 못 박혀 죽어야만 진정한 참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4.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과 같이, 또한 제주 4·3사건의 만행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던 대한민국 정부처럼 참회와 회개의 길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집과 독선(이것을 바울은 율법에 얽매였다고 봅니다만), 곧 율법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구원 사건, 사랑의 역사를 깨닫지 못합니다. 범죄한 영혼은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에스겔 말씀에 나오는 속담처럼 변명합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한국 개신교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다중이용시설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행정명령에 일부 개신교 목사님들이 ‘종교박해’니, ‘예배방해’니 하며 소리를 높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교리라는 율법에 얽매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이웃 사랑의 복음을 보지 못합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행위만을 중요시하지,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의 형식적 행위만을 중요시하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며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는 싫어합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나면, 이제 진정한 예수의 제자와 교회가 어디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교만하여 바로 앞만 보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시대를 읽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그 힘들고 좁은 길로 가야만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말씀을 볼까요? 바울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16)

우리의 모든 행위, 곧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의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는 안내서입니다. 법은 사랑에 종속될 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과 율법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구원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과 율법의 법은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드는 경고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7-19)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선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렇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했던 것처럼, 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자세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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