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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의 두 개의 ‘C’ - 그리스도와 조선(Christ/Chosun)

기사승인 2020.03.26  17: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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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선교를 위해 꼭 알아야 할 주체사상 100문 100답(78)

Q: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은 무엇인가요?_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 (5)

A: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주체사상이 그리스도교와의 대화 속에서 창시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주체사상이 구상되던 시기에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김성주(일성)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리스도교 사상은 바로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이었습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를 통해 전해진 구원신앙과 창조신앙은 주체사상의 인생관(人生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을 살펴보고, 그 특성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은 곧 주체사상의 특성으로 연결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체사상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정도 목사의 신학 사상 1 - ‘자신력의 신학(自信力 神學)’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력(自信力)’을 강조한 신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해석의 신학은 한마디로 하여 ‘자신력(自信力)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말로 하여 타인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을 믿는 ‘자주(自主), 자력(自力), 자립(自立)의 신학’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연재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의 권면을 경청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또 동양 격언에 이르기를 만사를 물론하고 ‘시작이 반이라’ 하였으니 우리는 되겠다, 되지 아니하겠다, 판단치 말고 마음에 있는 대로 하여 봅시다. 그리하면 만삭되지 못하야 생산한 우리도 자신력(自信力)을 얻어 바울의 일을 할지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남을 의뢰치 말라. 만일 누구든지 남을 온전히 의뢰하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죽이고 다른 사람으로 자기를 대신하며, 또 혹 절반은 자신하고 절반은 의뢰하면, 이는 반은 자기요 반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
… 이와 같이 은혜 받는 때에 우리는 속히 자신력을 얻어 남을 믿지 말고 스스로 서서 동양에 선교하는 큰 기관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믿고 바라나이다.”

이상의 주장에서 우리는 해석이 강조하는 ‘자신력(自信力)’이 바로 ‘되겠다, 되지 아니하겠다, 판단치 말고 마음에 있는 대로 하여 보는’ 마음, 즉 ‘스스로의 힘(自力)’을 믿고 결심한 바를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해석의 자신력은 남을 의뢰치 않고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주인’이 되는 자주(自主)의 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해석의 자신력은 남을 믿지 말고 ‘스스로 서서’ 자립(自立)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도산 안창호 선생(사진 왼쪽)과 해석 손정도 목사(사진 오른쪽)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은 ‘자신력 신학(自信力 神學)’입니다. 이 신학은 ‘스스로 주인(自主)이 된 입장에서, 스스로의 힘(自力)을 믿으며, 스스로 우뚝 서기(自立)를 소망하는’ 신학입니다. 해석의 ‘자신력 신학’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람이 자기운명의 주인인 ‘주체(主體)’가 되어야 한다는 ‘주체신학(主體神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신학 사상 2 - ‘민족신학(民族神學)’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 중 하나는 또한 그것이 ‘민족(民族)’을 강조한 신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의 삶과 목회와 신학은 통일되어 있었으며, 이 모두는 민족의 재생과 광복을 향해 있었습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서 신앙심과 애국심은 분리가 불가능하게 융합되어 있었습니다.

해석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가 갖은 옥고와 유배를 겪었으며,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성원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만년에는 길림을 근거지로 독립 역량 강화에 매진하였습니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시세가 불리하여 베이징으로 나갔다가도, 생의 마지막에는 길림으로 돌아와 독립군 후방기지 건설에 몸과 마음을 바치다 순국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가 두 제이(J)(예수와 일본, Jesus and Japan)를 위해서 살았다면, 조선의 독립운동가 해석 손정도 목사는 두 씨(C)(그리스도와 조선, Christ and Chosun)를 위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부활신앙(復活信仰)은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살아나는 신앙이었습니다. 해석의 구원신앙(救援信仰)은 도탄에 빠진 민족의 운명이 구원받는 신앙이었습니다. 해석의 창조신앙(創造信仰)은 역사의 주관자가 반드시 민족 해방의 새 역사를 창조하리라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처럼 일평생을 초지일관하여 ‘하느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 낸 해석의 신학은, 민족의 구원과 부활을 간절히 바라며,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두 번째 창조와 도래를 염원하는 신학이었고,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신학(民族神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신학 사상 3 - ‘민중신학(民衆神學)’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 중 하나는 끝으로 그것이 ‘민중(民衆)’을 강조한 신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의 민중 중시와 민중 강조의 신학적 입장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연재에서 다음과 같은 김성주(일성)의 증언을 살펴본 바 있 습니다.

“로선상으로 보면 신채호는 무력항쟁의 제창자였다. 그는 리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다같이 현실성 없는 위험한 로선이라고 보았으며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게 된 정황에서 우리 2천만 민중은 하나가 되어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일부 인사들이 리승만을 상해림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해 나선 것도 평소부터 리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리승만은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것은 그가 림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림시정부를 탈퇴한 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도 리승만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이따금씩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신채호는 성미가 면도날 같고 주장이 무쇠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리승만을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탄핵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신채호의 말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었다. 단재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채호와 함께 림정을 결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발언을 참고해보면 손 목사의 정견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치론도 위임통치론도 다같이 망상이라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의 립장을 취하였으며 대중을 동원하여 거족적인 항쟁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우리의 전민항쟁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런 혁신적 립장은 그로 하여금 리승만과 같은 사대주의자, 야심가가 수반으로 군림하고 있는 상해림시정부에서 각원으로 남아있을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게 하였으며 결국은 림정과 결별하고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용단을 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손 목사는 길림에 온 후 일본경찰들이 ≪제3의 세력≫이라고 규정한 혁신파 인물들과 련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새 세대의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었으며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의를 다하여 후원해 주었다. 그가 교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문 밖의 례배당은 우리의 전용집회장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례배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김성주(일성)의 이 증언은 해석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의 변화과정을 보여줍니다. 상해에서 길림으로, 실력양성론에서 무력항쟁론으로의 방향전환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민중관(民衆觀)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독립운동의 방도에 있어서, 이승만의 외교론은 상층 엘리트들이 중요하고 민중이 도외시 됩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은 민중이 계몽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무력항쟁론에서는 광범한 민중이 투쟁의 주인으로, 주체로 됩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는 독립운동의 방도를 무력항쟁론에서 찾았기에, 민중을 주인으로 보는 민중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을 삶과 투쟁의 주인으로 대하고, 광범한 민중에 의거하여 민중 자신의 해방을 가져오는 독립투쟁을 전개하려고 하며,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는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중을 주인으로 삼는 ‘민중신학(民衆神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은 스스로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주체신학(主體神學)’이며, 창조신앙에 입각하여 민족의 구원을 대망하는 ‘민족신학(民族神學)’이고, 민중을 가장 귀하고 힘 있는 존재로 대하는 ‘민중신학(民衆神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세 가지가 해석 손정도 목사의 신학의 특성입니다.

정대일 연구실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jungsc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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