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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안고 세워진 서·북간도의 교회들

기사승인 2020.03.21  20: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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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19개 교회를 찾아서-경신참변 100주년을 기념하며 (1)

올해, 2020년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 못해 퍼렇게 멍들게 만드는 경신참변의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두 개의 전투야 자랑스러운 기념식을 가지겠지만 경신참변은 정부나 단체가 기억이나 제대로 할런지 모르겠다.

잊혀진 경신참변의 중심 서·북간도 교회들

경신참변은 19세기 중∙후반에 살길을 찾아 만주로 도망친 조선의 소작농들과 천민, 빈민들이 한인촌을 이루고 감히 독립을 꿈꾸며 일본에 저항하다가 처절하게 도륙 당한 고난의 역사이다. 독립운동사가 자랑하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는 그들이 싸운 전투였고 승리였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그 전투를 몇몇 영웅의 전투로 만들어, 고난 속에서 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한 그 기반과 모체가 된 서·북간도 한인촌을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참변이 일어난 곳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땅이 되었고, 수난을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놈이며 크리스천이었기에, 해방의 공간에서도 경신참변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경신참변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간도 한인들과 희망과 절망을 나누며 독립의 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교회, 특별히 「독립신문」에 19개로 기록된 경신참변에 불에 탄 캐나다 장로교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연변의 1900년대 초반 20년까지의 한인들의 사회운동은 대부분이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인 마을이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지면 잇따라서 가까이에 근대 학교가 설립되었다.(1) 치외법권을 가진 캐나다 선교사들의 보호 속에서 근대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지식전수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양하며 항일정신을 심어 주었다.

이에 따라 한인 자치와 민족교육을 위해서 출발된 간민교육회, 뒤를 이은 간민회, 그리고 3·13 용정만세시위와 3·20 훈춘만세시위, 그 후 크고 작은 무장단체 성립에 이르기까지 캐나다 장로교회의 참여와 의지가 참으로 대단하였다. 무장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독립자금을 후원하는 교회들의 참여가 없었으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양 전투에 교회를 근거로 해서 세워진 간도국민회, 훈춘한민회, 신민단(2), 라자구 의사부대(3) 등의 기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찼던 기독교의 대 사회적인 영향력이 1920년 경신참변을 정점으로 해서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간도에 몰아친 사회주의 바람에 밀려서 이를 수용하거나(4) 아니면 보수 민족주의와 순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현실 정치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면서 경건주의적인 비정치화의 길로 나아가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종교로 남아야 했다.

경신참변의 희생자 규모

1920년 9월, 일제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서·북간도에 2만 5천여 명의 군인과 경찰, 헌병을 파병하여 독립운동단체와 한인독립군기지로 지목되는 한인촌,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 시키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1920년 10월에서 12월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조선인 마을에서 학살과 방화, 약탈과 폭행을 반복하였고 일부의 부대를 남겨서 1921년 5월까지 만행을 저질렀다.

「독립신문」 제92호에 실린 간도참상에 대한 후속 보도에 의하면 훈춘, 화룡, 연길, 왕청 4개현에서 3,664명이 피살당했고, 155명이 체포되었으며 가옥은 3,520동, 학교 59개, 교회당 19개가 불에 탔고 곡물 59,970섬이 소실되었다. 서간도에서는 관동군 소속의 일본군에 의해 유하현, 삼원포, 흥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등지에서 1,323명이 사살 당하였고 125명이 체포되었으며 교회당 3개가 불에 탔다. 장백현에서는 일제에 매수된 장강호 마적단과 일본군 국경수비대에 의하여 212명이 사살 당하고 4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북간도에서 19개 교회가 불에 탔고 서간도에서는 3개가 탔다. 어떤 기록은 불에 탄 교회가 대략 28개(5)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신참변에 대한 여러 기록을 자세히 읽다보면 불 탄 마을 중에 기록에 빠진 교회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불에 탄 교회 숫자가 30여개를 훨씬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가정이 가능한 것은 경신참변으로 일제 토벌의 타깃이 된 것은 주로 간도국민회 인사들과 그 지부들이 있는 마을 그리고 관련이 있는 학교와 교회들이었기 때문이다. 간도국민회는 기독교인들 중심의 무장단체였으므로 일제가 그런 <불령선인>들의 마을을 불태울 때 불령선인들의 온상인 교회를 남겨 두었을 리가 없고,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을 일깨우는 학교를 불태울 때, 학교의 모체가 되는 교회를 불태우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세워진 교회 중에 학교와 교회가 한 건물을 사용하는 곳이 36개소나 되었다고 하니(6) 간도국민회지회와 불에 탄 마을의 관련성을 추적하면서 북간도 지역에서 불에 탄 19개 교회를 찾기에 초점을 맞추고, 불에 탄 교회가 28개라는 기록의 사실 여부도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도 불에 탄 교회 수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경신참변이 진행 중일 때 「독립신문」이나 통신원의 집계표가 나왔고, 외진 마을들은 그나마 집계에서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신침변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시작된 반종교운동과 사회주의 범람으로 교회가 겪은 환란이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중국의 정치상황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반혁명의 대명사였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와 교회 연구자도 있을 수가 없었고, 있는 기록마저도 무관심 상태에서 유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 마딩(한국명 민산해)이 장암동교회 참변 기록에서 분명히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불타 죽었다고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나온 대부분의 책들이 “교회”를 “학교”로 바꾸어 정리한 기록들을 보노라면 역사 기록이 그 시대와 사회를 뛰어 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19개의 불에 탄 교회를 찾기 위해서 먼저 1장에서는 1900년대 초반 20년에 북간도에 세워진 캐나다장로교 교회를 살필 것이다. 2장에서는 토벌의 타깃이 되었던 간도국민회와 일본영사관이 토벌을 위해서 만든 항일마을과 항일학교 명단을 정리하고, 3장에서는 간도참변과 피해상황, 4장에서는 소실된 교회와 마을, 간도국민회 관련의 사례들을 찾아보고 5장에서는 기록에 근거하여 불탄 교회 이름을 정리하고 6장에서는 누락된 교회역사 회복의 의미를 생각하며 끝맺고자 한다.

1900년대 초반 20년간 간도사회를 이끌어 간 캐나다장로교 교회의 독립을 위한 교육과 계몽,희생과 고난은 사회주의 흐름에 묻혀버렸지만 그들의 역사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망국의 고난을 온 몸으로 감당한 교회와 그 분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참되게 기억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대 초기 20년간에 북간도에 세워지는 교회들
 
1911년 3월, 캐나다장로교 성진주재 선교사 그리어슨의 조사인 이동휘는 북간도의 각 시찰회 중심으로 열리는 연합대부흥회에서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 우리도 서양문명국가처럼 잘 살 수 있다. 삼천리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이룩되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7)라고 사자후를 토하였다. 그의 호소는 간도 한인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1910년대 북간도의 학교와 교회 설립을 촉진시킨 것이 사실이다.

▲ 의료를 통한 선교를 하기 위해 성진에 제동병원을 세운 그리어슨 목사는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다. 사진은 그리어슨 목사(앞줄 가운데)가 제동병원을 배경으로 한국인 직원들과 단체 촬영을 한 모습. ⓒ사진 출처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북간도에 전파된 기독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동아기독교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캐나다장로교의 교세가 가장 우세하였고 간민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가장 컸다. 장로교 교회는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어서 많은 뜻 있는 청년들과 망명 지사들을 결집시켰다. 교회 지도자들은 독립정신은 학교교육으로, 단결은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 간다는 신념으로 교육과 전도를 병행하여 많은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 선교사들이 의료선교를 통해서 간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자신들의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을 보호하였으므로 장로교는 북간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였다. 실제로 김약연, 정재면, 박태환은 1909년에 <길동기독전도회>를 만들어서 구국운동의 차원에서 전도에 열중하였으며 1911년 3월에는 조선 성진선교구 조사인 이동휘가 간도에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는 중에 <삼국전도회>로 바꾸어 향후 3년 동안에 36개 교회를 신설하였다.(8)

북간도 선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본격적으로 시작

1902년 성진에 주재하는 그리어슨(한국명 구례선) 선교사가 조사 홍순국과 함께 북간도와 연해주 시베리아에 산재한 한인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답사를 한 뒤, 성진 출신 안순영을 용정에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1903년에는 역시 캐나다 장로교선교사인 페레스와 베이커 등이 훈춘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1906년 그리어슨은 구춘선, 박무림, 이보건 등의 협조로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안순영전도사는 한족 신도인 선금의 도움을 받아서 화룡현에 양무정자교회를 세웠다. 또한 같은 해에 김련보, 한학렬의 노력으로 광제욕(광제암)교회가 세워졌다. 

1907년에는 남감리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이화춘이 박무림과 남공선과 함께 와룡동교회를 세웠고 정재면이 용정중앙교회를 세웠다. 1908년에는 남감리회에서 파송된 이응현이 모아산교회를 세웠고 1909년에는 김약연과 정재면이 명동교회, 최봉렬이 호천포교회, 황병길과 오병묵이 훈춘성내교회를 세웠다. 1909년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구역 협상으로 장로교는 연변일대를 선교구역으로 감리교는 강원도를 선교구역으로 확정하였다.

1910년에는 한수현이 민진기 교회를, 김하병과 김동현이 대황구교회를, 김강, 김병관, 김명규가 차대인구교회를, 이춘이 옥천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11년에는 장은평교회(양진섭과 양형섭), 적안평교회(강백규), 국자가교회(류기연, 류찬희)가 설립되었고 강익태가 유한풍을 전도하여 정동교회를 세웠다. 같은 해에 화룡현교회(남성희, 최선택), 은포교회(심성문, 엄방진, 김약연) 투도구교회(강찬규, 호일표)가 설립되었고, 간장암교회는 강백규의 전도로 김영섭, 김동의, 김동희에 의해 설립하였다. 정형권의 전도로 신풍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공원표와 박병섭의 전도로 일송정교회가 세워졌으며 오재영이 금당촌에 이주하여 금당촌교회를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구사평교회, 남양동교회, 의란구교회 (김순문), 연통라자(이병하), 노지구(이병하) 교회가 설립되었다.(9)

한생철의 기록에 의하면(10) 1913년과 1914년에는 세워진 교회가 없다. 그러나 최석승의 ⌜훈춘조선족 이민사⌟ 284쪽에 의하면 1913년에 설립된 교회로 차대인구교회와 신풍교회가 나오는데 ⌜연변문사자료 제 8집⌟의 한생철의 「영국더기 - 룡정기독교장로파교회 시말」에는 그 교회들이 각각 1910년과 1911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온다. 이는 교회 설립 기준의 문제인 것으로 사료된다.

1915년에는 광암교회, 희망동교회, 창강교회, 영생동교회, 훈춘 두도구교회(이병하), 남별리교회(오병묵), 사도구교회, 혜례성남교회, 현성 서문밖교회, 포은동교회가 설립되었다. 1916년에는 대양동교회(박이섭), 동불사교회(이하원), 응조암교회, 상용자교회, 관지골교회, 전선촌교회(이방춘), 연수동교회, 회막동교회(이춘삼)가 설립되었다. 1917년에는 낙원동교회, 무봉촌교회, 청산리교회, 영신동교회, 낙타동교회, 소홍기하교회, 송전동교회, 장성촌교회가 설립되었다. 1918년에는 전석동교회, 백운평교회, 구호동교회(채일선), 용섬매자교회, 장동동교회, 십리평교회, 삼도구교회가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신흥교회, 중강자교회가 설립되었다. 1920년에는 토성보교회, 로두구교회(조성극), 용정동산교회(이성국), 용강동교회, 합성리교회, 북구교회, 청수동교회, 동강자교회가 설립되었다.(11) 1906년에서 1920년 까지 이름이 알려진 교회 수는 총 72개이다. 그러나 순회전도사 이동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삼국전도회>가 1911년부터 3년간에 걸쳐서 신설한 교회가 36개라고 하였는데 현재 그 기간에 신설된 교회 이름으로 확인한 것이 16개뿐이다. 나머지 20개는 이름이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숫자를 합하면 1920년까지 설립된 교회는 92개소가 된다.

1919년에 캐나다 장로교에 기반을 둔 국민회 지회가 100여 개로 나타나는데 이는 지교회가 100여개가 된다는 뜻과 같다. 나머지 20여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룹은 오지의 기도처소나 개척교회였을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지속적으로 부흥하여 1911년에 이르러 연변 각지에는 교회와 집회처가 40여 개에 달했고 교도가 1,600여명에 달했다.(12) 조선총독부의 “국경지방시찰복명서”에 의해 작성된 1914년에 나온 연변조선족 각 종교 교회당 및 신도 분포에 보면 기독교장로파(캐나다장로파) 교회는 21개이고 429세대, 3,145명의 교인이며 항일태도경향이 아주 강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13) 1915년의 어떤 통계에 의하면 당시 북간도의 한인교회당은 94개소 였으며 신도는 5,700여명에 달했다.(14)

1920년에 이르러 간도에 조직교회 30개, 미조직교회 57개, 기도회처소(개척교회)가 28개 등 모두 백여 처의 교회가 형성되었다.(15) 어떤 기록은 1921년에 북간도에는 교회 63개소, 신도 6,442명 이었으며 세례 받은 자가 1,915명이었다고 한다.(16) 이 수치는 경신참변으로 캐나다장로교회가 방화와 학살을 당하였음을 시사해준다.

1922년 동만의 장로교 교세상황을 보면, 기도처를 포함한 교회가 115곳, 세례교인이 1,961명,교인 총수가 6,392명이었다.(17) 이 수치는 교회 처소는 경신참변 전의 수치이고 교인들의 수치는 경신참변 후, 1921년의 수치와 같다.

이상으로 1920년 경신참변 당시 캐나다 장로교회는 이름이 밝혀진 교회 72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교회 20개, 기도처소나 개척교회가 28개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주

(미주 1) 김춘선 주필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2015), 476.
(미주 2) 같은 책, 483.
(미주 3) 같은 책, 73. 
(미주 4) 같은 책, 489/490.
(미주 5) 같은 책, 487.
(미주 6) 서굉일·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1997), 287.
(미주 7) 같은 책, 117.
(미주 8) 같은 책, 198.
(미주 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1997), 112~138.
(미주 10) 같은 책, 118/119쪽;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2006), 141~152.
(미주 11) 연변종협문사자료위원회,  118~119;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141~152.
(미주 12) 김택 주필, 김인철 부주필, 『길림조선족』(1995), 659. 
(미주 13) 김춘선 주필 외 다수, 466.
(미주 14) 같은 책, 466/471.
(미주 15) 서굉일·김재홍, 287.
(미주 16)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19.
(미주 17)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152.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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