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예배, 제사보다 자비를”

기사승인 2020.03.09  16:30:43

공유
default_news_ad1

- 살며 묵상하며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10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13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14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마태 12:7~14/새번역)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고 계십니다.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서 먹는 일을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를 보고 비난하자, 성경말씀을 들어 반론을 펼치십니다. 그 중 하나가 7절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호세아서 6:6을 드십니다. 제사를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일깨우십니다. 이사야1장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사보다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이사야 1:13,17b)

예수님께서도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셨습니다. 굶주린 제자들이 안식일에 음식을 위해 일한 것을 옹호해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이어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몸짓으로 순종의 예배, 자비의 예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간다면, 오늘날 예배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 이시은 작가, 「겹」

한편에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공예배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당분간 가정에서 예배를 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사이에 세상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현장으로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만들어 선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사겠다고 세, 네 시간 전부터 나와 줄을 서고, 서로 다투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마스크 사지 않기 운동을 벌입니다.

각자 사정이 있고 어느 쪽이 무조건 다 나쁘다고 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일리가 있습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풍경은 분명해 보입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이들을 돕는 손길을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돕는 손길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비의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소극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나님 사랑의 방법으로 여기고, 가정에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는 봉사활동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돕는 방법만 있겠습니까. 인근의 어떤 분은 자원봉사로 소독봉사를 나가십니다. 마스크나 소독제를 만들어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방법이 없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물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죄를 짓지 않나? 가정이야 교회야? 이렇게 벌 받지 않고 복 받을 길에만 관심하거나 예배의 형식, 공간에만 관심합니다. 예배를 찬송하고, 말씀 읽고, 설교 듣는 형식으로만 보면, 공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자비까지 포함한다면? 섬김의 몸짓으로도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냐는 공간의 물음에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적극적인 섬김의 몸짓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가 형식에 갇혀 가정인지, 교회인지만 묻는다면, 자칫 생존을 위한 도구로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주일성수의 복을 받으려는 집착과 죄를 짓지 않으려는 두려움으로 비치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불안을 제물 삼는 주술이 아니지 않습니까. 산 제물로 나를 드리는 예배라면, 이웃을 위한 섬김으로 왜 드리지 않겠습니까.

천국 입구에서 양과 염소를 나눕니다. 주일성수 여부를 물으시겠습니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무엇을 행했는지만 물으십니다(마25).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사람을 살리려고 배교자가 된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의 배교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 보게 하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신앙적 신념을 포기하고 배교자로 낙인찍히는 길을 택합니다. 그 앞에서, 신앙의 규율을 지키자고 이웃에게 걱정거리, 비방거리가 되는 일은 더욱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쪽으로 신앙의 방향을 틀어야겠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무엇으로 도울 수 있을까? 그 물음으로 때로는 오랜 신앙적 규율을 어기게 되더라도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응원해주시고 기뻐해주실 것입니다.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범하신 주님께서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