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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 상황과 한국교회

기사승인 2020.03.05  02: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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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예배에 대한 찬반 논쟁을 넘어서

CBS 요청에 따라 3월 첫 주일 아침 ‘3.1 절 새로운 백년의 시작과 코로나 사태’를 주제로 방송을 했습니다. 말미에 교회 예배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최고 고비인 만큼 모이기보다 거리를 두자는 정부의 시책에 호응할 것을 요청했지요.

이 방송 이후 여러 경로로 에코를 전해 들었습니다. 찬반의 의견이 공존했으나 이 글에서는 예배를 존중, 고집하는 분들의 경우를 생각하며 못다 밝힌 제 생각을 전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곳곳에서, 특히 대구, 경북지역에서 수고하는 의료진, 정부 관계자들의 헌신을 생각하며 미약한 글이지만 이로써 이들 수고를 덜고 싶었습니다.

집중된, 특정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 행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이 이들을 돕는 일인 바, 이 시점에서 종교인이자 시민의 역할이라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 1 >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크게 보아 인간 세계에 대한 자연의 반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명체의 서식지 파괴, 몸 중심의 욕망적 식생활, 인간 면역력 저하 등이 사태의 숨은 배경일 것입니다. 금번 상황을 하느님의 진노, 심판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는 줄 압니다만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말이겠습니다. 너나 할 것 없는 우리들 모두의 잘못된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교통의 발달로 삶이 연결되었기에 애시 당초 폐쇄와 봉쇄는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온/오프라인 상의 연결망은 지금 전 세계를 동일한 위험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각 나라, 지역 마다 최선을 다해 방역 망을 가동하고 있으니 따뜻한 봄과 함꼐 이 고통도 사라질 것입니다. 마스크 사태로 불편을 겪고 있는 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를 매점매석하여 수백억을 번 파렴치한 장사꾼도 있다하니 기막힙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불평도 한 주치라도 선점해 놓자는 두려운 심리의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사태로 신천지란 괴물의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성종교의 잘못과 부패를 먹고 자란다는 이단, 신천지의 작태가 낱낱이 소개되었습니다. 기성 교회는 물론 정치세력에게까지 손을 뻗쳐 자신들 지경을 넓혀왔던 무서운 세력입니다. 이들 거짓으로 방역체계가 무너졌고 수천 명의 확진 자들이 발생했습니다. 벌써 30여분이 돌아가셨다 하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이들을 돌보다 순직한 공무원도 생겼습니다.

신천지 세력을 그토록 증오했던 기성교회가 의외로 신천지의 이런 악행에 관대한 것이 많이 생경합니다. 물론 이들을 혐오의 대상 삼을 수는 없겠으나 ‘이만희’를 비롯한 책임자 처벌은 불가피한 일이겠지요. 일부 정치인들, 심지어 검찰까지도 의외의 행보를 보이니 우리들 의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신천지 악행을 낱낱이 밝히되 선의의 피해자들을 가족 품으로, 기존 교회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면 좋겠습니다.

< 2 >

말했듯이 정부는 간곡한 심정으로 두 주간 동안 교회활동을 삼가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교회가 으뜸으로 여기는 예배행위도 포함되었기에 반발이 컸으나 협조하는 분위기입니다. 교인들 중에서 70% 이상이 이를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권유를 종교탄압으로 여기며 저항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리가 없지 않기에 무조건 잘못이라 할 수 없겠으나 개신교의 경우 몇 가지 점에서 숙고할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교회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생각입니다.

▲ 경남 장유중앙교회 한 교우 가정에서 온라인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경로 장유중앙교회 목사 제공

오늘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를 겪은 기독교는 그 이전의 그것과 많이 달라야 합니다. 신앙의 표현 방식도, 사회와 공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중세기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 공화국체제 하에서 기독교인 역시 시민의 일원입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우환의식을 지녀야 할 존재들이 우리 종교인들 입니다.

이웃종교인 가톨릭을 비롯하여 불교, 원불교가 교단차원에서 일정기간 종교 활동을 폐했습니다. 물론 온라인상에서 자기 방식대로 지속하긴 했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개교회주의의 특상 상 일괄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었지요. 저마다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숙고할 점을 찾고 싶습니다. 첫째는 개신교의 일부는 아직도 근대이후 세계와 마주하며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종교들이 바보이고 못나서 그런 입장을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일상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아주 작은 경우라도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신앙적 태도였습니다.

이점에서 개신교는 아직도 중세미망을 벗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은 어느 면에서 근대 사회의 에토스와 공존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 우위, 나아가 절대적 시각에 사로 집혀 이웃과의 공감대신 배타적 처신을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신천지도 사실 이점에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성교회는 모두 틀렸고 자신만 옳다는 발상이 신천지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이점에서 개신교는 스스로 이단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공존하는 힘을 더욱 키워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일부 개신교의 독자적 처신으로 한국 교회는 보편적 공교회성을 잃었습니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나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라는 정통적 교회론이 그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개체성은 장점도 많지만 잘못 사용될 경우 더 큰 문제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형식적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출현했으나 좋은 의미의 권위를 부정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소수 대형교회들이 정부와 보조를 같이했고 자신들 시설을 치료실로 내놓았습니다. 세상이 이를 치하하고 있으니 기쁜 일입니다. 예배를 고집하는 것으로 변별력을 드러내려 말고 이렇듯 사랑의 행위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일이 우선인 것을 인정하길 바랍니다.

< 3 >

이제 교회 내적 차원에서 예배를 고집하는 일의 문제점을 적시하겠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간과하는 사람은 종교인치고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가르치는 예배의 본뜻을 생각할 경우 달리 처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서는 “하느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순종을 원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배를 위한 모이는 행위를 잠시 중단하고픈 성도들이 70%를 넘는 상황에서 종래처럼 종교행사를 치루는 일은 하느님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목사들 역시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라는 자의식을 지녔기에 예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물론 바빌론 포로기에, 우리의 경우는 일제하에서 예배행위는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정황에서 예배는 그 때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들의 예배는 안식일, 교회, 목회자들을 위해 존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예배를 통해 성도들도 적지 힘을 얻고 옳은 삶을 살았던 신도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성도들은 오히려 말씀에 굶주렸고 영혼이 궁핍해졌습니다. 한두 달에 한번 씩이라도 자기 영혼과 교감되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예배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선포된 계시로서의 말씀을 제대로 준비하여 전했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을 교회 확장이나 교회 유지의 도구로 여기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사고 팔리는 현상도 목도합니다. 수많은 작은 교회목회자들이 이/삼중의 직업전선으로 내몰리고 있지만 다수 교회는 세상처럼 빈익빈부익부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느님이 기뻐할 리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이는 어떤 교회는 토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예배드리고 주일은 쉬게 하고 있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그곳이 하느님의 교회가 된다는 것도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의 이름이 본디 ‘에클레시아’, ‘흩어진다’는 뜻일 진대, 우리는 도대체 모이는 것만 강조하고 흩어진 성도들의 삶을 ‘교회’로 여기지 못하는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지금껏 수없이 모였고 예배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웃에게 해되지 않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며 홀로 하늘을 생각하며 사는 삶(愼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목사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작은교회 운동을 하는 한 교회는 매달 한 번씩 흩어지고 있습니다. 예배도 홀로 보고 헌금할 곳도 자신이 선택하여 필요한 곳에 바치고 있습니다. 흩어져봐야 모이는 기쁨을 더욱 크게 느낄 것입니다. 기왕지사 흩어진다면 만인제사 직이란 종교개혁의 원리에 의거하여 평신도를 예배의 주체자로 세우는 일도 과감하게 시도해도 좋겠습니다. 지금껏 목사의 설교만 들었다면, 이를 제대로 잘 들었다면 평신도 역시 멋진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인 바, 온라인 대예배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4 >

시민이자 공교회의 일원이길 거부하는 목회자일수록 자신들 행위를 본회퍼 목사와 견주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구치소로 자리를 옮긴 전광훈 목사를 시발점으로 해서 본회퍼 목사를 자신에게로 소환합니다. 자신들을 핍박받는 예언자로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를 말한 신학자입니다. 성숙한 세계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 없는 듯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위한 존재가 그리스도이기에 그의 몸인 교회는 이웃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잘 흩어져야 하는 바, 이 기회에 크게 배울 내용입니다.

이웃종교인 동학은 벽을 향해 제사지내는 ‘향벽설위’(向壁設位)가 아니라 자신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쳤습니다. 내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몇 주 흩어지는 일이 결코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한 주라도 폐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는 목회자들은 코로나 사태로 예배관, 교회관이 크게 달라질 것을 걱정합니다. 온라인상으로 편하게 예배하는 미국처럼 될 것을 염려하거나 가나안 교인들이 더 많아질 것을 걱정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

신학자로서 저는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지나면서 오히려 달라질 것을 선언했습니다. 소위 ‘이후’(以後) 교회,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상세히 언급할 지면이 없으나 어느 책의 제목처럼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더 크게 죽을 것”이기에 그리 주장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 이후 흥할 수도 있고 폐할 수도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인 까닭입니다. 위기로만 알고 자신을 더욱 움츠린다면,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다면 누구도 교회가 주는 물에 목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병원 곳곳에서 고통 하는 환우들, 그를 돌보는 의료진들 그리고 정부관계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생각하며 제 나름대로 돕는 길을 찾다가 이 글을 급히 적었습니다. 거친 표현이 적지 않을 것이나 수정치 않고 날 것으로 제 마음을 표합니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교회를 통해 감염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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