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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가르침: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기사승인 2020.02.25  17: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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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20강

이번 강좌에서는 『大學』, 「경장(經章)」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가 다뤄졌다. 『대학』, 「경장」의 내용을 자신만의 도표로 재구성하면서 그 핵심 뜻을 전달코자 한 것이다. 1956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썼던 글이다. 『다석 일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역』에서 『대학』으로 주 텍스트가 바뀌었으나 다석은 여전히 같은 진리를 선포하였다.

다석은 자신의 삶을 옛 경전들을 살펴 읽으면서 보냈다. 그만큼 그에게는 경전이 소중했던 것이다. ‘연경’(硏經)반을 만들어 죽을 때까지 경전을 읽었고 가르쳤던바, 이는 그의 제자 김흥호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언급한대로 이번에는 『주역』에 이어 경장(經章)과 전장(傳章)으로 구성된 『대학』을 풀어냈다. 여기서는 주로 205자로 쓰여 진 경장 내용을 다뤘다. 유학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 『대학』만큼 좋은 책이 없다. 유학의 진수로 이끄는 지리학과 같은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다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학』의 글귀들을 갖고서 20강을 시작했다.

< 1 >

‘지지지지’(知之至之). 자신이 반듯이 이르고자 할 데를 찾았으면 꼭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중의 지지(至之)는 꼭 이르러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함했다. 몸을 갖고 자신을 갈고 닦아 정신을 기르고 궁극적으로 하늘(上)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겠다. 거룩한 뜻을 갖고 그런 삶을 성취하란 말이다. 하느님에게 닿은 삶을 살아내란 말이다. 어떤 방해거리가 존재할지라도.

다석이 『천부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하늘오 쪽월’, 즉 ‘하늘에 닿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책’이란 푼 것도 이를 적시한다. ‘지종종지’(知終終之), 마칠 곳을 알면 반드시 마치란 뜻이다. 맛과 멋을 찾아 사는 몸 생활을 그치고 위(上)뜻을 갖고 사는 얼의 삶을 이루라고 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 한 분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성서말씀을 상기시킨다.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이 바로 ‘지종종지’란 말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배웠다면 반드시 그 지경에 도달하는 것이 종교의 길이다. 행(行)을 수반치 못하는 지(知)는 참된 지(知)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것만큼만 아는 법이다.

‘가여기야’(可與幾也). 여기(與幾)란 아주 가깝다는 뜻이다. 진리(참)를 가까이 하란 말이다. 혹은 진리가 가깝게 있다고 말해도 좋다. 참을 실현시키는 기회가 가까이 있으니 반듯이 이루라는 의미가 담겼다.

‘지종종지가여존의’(知終終之可與存義). 마칠 곳을 알아 마치고 나면 반드시 옳은 것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식이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옳은 의지를 세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가 말하는 인(仁)이다. 옳음(義) 없이 사랑(仁)을 말할 수 없다.

공자가 ‘나의 길은 하나로 꿰b렸다’(吾道一以貫之)고 했을 때 이는 충서(忠恕), 곧 인(仁)을 말한 것이다. 충(忠)이 마음 한 가운데가 뚫려 하늘로 곧이 곧장 가는 것이라면 서(恕)는 이를 줄곧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앞의 것이 수직적 차원이라면 나중 것은 수평적 차원을 적시한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인간을 받아들이는 것(容納), 그것이 서(恕)이다. 앞서 보았듯이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충신습(忠信習)을 말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남과 관계할 때 곧은 마음으로 그리했는가? 벗과 사귈 때 믿음으로 했는가?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익히려고 애썼는가?

이 셋을 늘 상 반성하고자 충신습을 말한 것이다. 참을 살펴 이웃(남)을 용납하는 일(仁)에 한 치의 거짓도 없기를 바라서였다. 『대학』이 말한 ‘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 事有終始), 일에는 반드시 처음 할 일과 나중 일이 있다는 것도 실상 이르러야 할 곳에 가까워지기(則近道矣)를 바라서였다.

< 2 >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이것은 『대학』의 골격을 이루는 3강령이라 불린다. 자신 속의 德(속알)을 밝혀, 백성들과 가까워져서 지극한 선을 이루는 것이다. 본래 주자학은 친민(親民) 대신 신민(新民)을 말했는데 왕양명이 신(新)을 친(親)으로 바꾸었고 다석은 후자를 좆았다. 친과 신은 백성을 대함에 있어 그 태도가 동이 서에서 멀 듯 많이 다를 것이다.

또한 백성 ‘민(民)’을 ‘씨ㅇ·ㄹ’이란 순수 우리말로 풀어낸 것도 다석이었다. 이 때 씨ㅇ·ㄹ은 계급적 차원의 민중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다석은 본 강령 셋을 상세히 풀었다.

‘지지이후유정’(至之而后有定). 그칠 줄 알아야 정(定), 고요함이 있다는 뜻이다. 몸이 정해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편하니 바탈을 태울 수 있다. 따라서 머물고(定) 그치는 것(止)이 시작이다. 그로인해 그 다음 단계(而后)가 지속적으로 생겨나며 마침내 궁극적으로 머물 곳에 이를 수 있다. 지지(止之)란 말이 바로 그것을 일컫는다.

‘정이후능정(定而后能靜), 정이후능안(靜而后能安)’. 정(定)함이 있어야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져야 평안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안이후능려’(安而后能慮)라 하겠다. 다석이 자신을 ‘생각하러 온 존재’로 여긴 것도 이런 차원에서 한 말이다.

‘여이후능득’(慮而后能得). 생각할 만한 자격을 갖게 되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이 내 것이 된 상태(與幾)라 하겠다. 다석은 이를 일컬어 진물성(盡物性)이라고 했다. 사물의 본성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와 일치를 이뤘다는 말뜻이다. 사물의 근본에 도달했다는 의미이다.

신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격물(格物)하여 치지(致知)한 경지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주객도식을 난파한 상태라 말해도 좋다. 이로써 처음의 지(止)를 근간으로 궁극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극(無極)이란 말이 바로 그런 상태를 지칭한다. 사물의 극진한 이치에 까지 도달해 더 알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는’ 생각에 ‘나는’ 생각이 더해졌던 까닭이다.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말도 결국 이런 차원일 것이다. 이로써 천하(天下)는 인류를 위해 덕(明德) 일체를 밝혀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한 선에 머물게 된다.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할 일이다.

‘능득명친지(能得明親止)’. 여기서 명친지란 거듭 하늘과 가까워져 늘 상 새롭게 된다는 뜻이다. 낡은 것을 지속적으로 버려야 하늘과 진해질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겼다. 한마디로 교리지상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천하에 필요한 덕을 밝혀 세상과 가깝게 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늘을 옳게 아는 것이 된다. 여기에 이르러 멈춘 것이 지어지선이다.

그렇기에 『대학』의 3강령, 明德, 親民 그리고 之善이 따로 있지 않고 선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또한 세상에서 직업을 얻고 관리가 되어 정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머물 곳을 알아서 그치고(地止致之), 끝을 알아 거기에 머무는 일을 적시한다. 한마디로 군자의 삶을 일컫는데, 증자는 이런 존재를 다음처럼 비유했다.

“부모 없는 어린 임금을 보좌할 때 안심되는 이, 사방 백리 큰 나라를 맡겨도 안심되는 이, 국가 존폐가 걸린 중대사에서도 뜻을 꺾지 않은 이, 이런 사람이 군자이고 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신이지래(神以知來), 신과 통해서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그러나 군자는 마칠 것을 알아 돌아 갈 줄도 아는 사람이다. 始終이 終之인 까닭이다. 대개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 나온 것(神, 伸)을 기뻐하나 세상 뜨는 것(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앞의 것을 길(吉)하다고 하고 나중 것을 흉(凶)하다고 말한다.

< 3 >

하지만 『대학』은 돌아 갈 줄 아는 삶을 가르친다. 신(神)과 귀(鬼)는 결코 다를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온 천하를 밝혀 모두가 하나가 될 만큼 친한 세상을 이룩하자는 것이 ‘能得明親知’로서 ‘치국평천하’의 실상인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경지이다. 따라서 다석은 유교정신을 무본(務本)에서 찾았다. 누구도 예외 없이 통치지뿐 아니라 백성들 한 사람 한사람 모두가 근본을 찾고자 힘쓰는 종교라는 것이다.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古之慾明明德於天下者). 앞서 자신의 ‘속알’, 명덕(明德)을 밝힌 존재들이 적지 않다. 요·순·우·탕·문왕·주공 등이 유교전통에서 말하는 그들이다. 이들을 본받아 자기 속 명덕을 밝히는 것이 으뜸이고 그 배운 바를 익혀(習) 이들 마음을 주변사람에게 미치게 해야 한다. 이는 천하 백성을 제 몸처럼 알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학』이 말하는 親民의 경지일 것이다. 이런 명덕과 친민, 속알과 어짐이 지극한 선(至善)에 이르러 멈추는 것이 『대학』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다.

‘선치기국 욕치기국자(先治其國 欲治其國者) 선제기가 욕제기가자(先齊其家 欲齊其家者) 선수기신 욕수기신자(先修其身 欲修其身者) 선정기심 욕정기심자(先正其心 欲正其心者) 선성기의 욕성기의자(先誠其意 欲誠其意者) 선치기지 치지재물격(先治其知 致知在物格)’.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나라를 잘 치리해야 한다. 그에 앞서 중요한 것은 제 집을 잘 이끄는 일이다. 하지만 제 몸을 잘 닦아야 집도 다스려 질 것이다.

수신에 앞서는 것이 정심(正心), 바른 마음이다. 바른 생각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意)를 성실하게 해야만 한다(先誠其意). 그러나 그 전에 뭔가를 알아야만 한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이치를 알아야만 한다. 알면 반드시 깨쳐 알아야 할 것이다. 선치기지(先治其知)가 바로 이 뜻이다.

이를 위해 만물의 격(格), 곧 사물의 본성을 바르게 아는 일이 중요하다. 다석은 이를 진물성(盡物性)이라고도 일컬었다. 이렇듯 사물들이 성질을 알아야 지식이 넓혀진다(致知). 이로부터 과학이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핵심은 앞서 말한 ‘고지욕명명덕’이란 말이다. 옛 지혜를 알아 자신의 ‘속 알’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런 사람은 지선(至善)을 알고자 하며 거기에 머물고자하기에 하늘에서 온 존재이다. 사실 이런 뜻을 사람마다 품어야 옳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주어진 본성(바탈)을 갖고 태어났기에 말이다(天命之謂性).

‘물격이후지지(物格而后知至) 지지이후의성(知至而后意誠) 의성이후심정(意誠而后心正) 심정이후신수(心正而后身修) 신수이후가제(身修而后家齊) 가제이후국치(家祭而后國治) 국치이후천하평(國治而后天下平)’. 다석은 여기서 성서적 진리와 『대학』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만물의 성질(格)을 깨친 후에 그 타당성을 생각하여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바, 이를 지지(知止)라 했다. 이점에서 다석은 자신이 한 때 물리학을 공부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종교를 말하면서 물(物)에 무지한 것을 오히려 비판했다.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고 생태계에 무감각한 오늘의 세태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물격(物格)을 중히 생각했다. 세상의 평화는 물(物)의 성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직전 문장이 거시적 담론에서 시작했다면 여기서는 물격을 통해서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를 취했다.

‘지지이후유정 지수지향정(知止而后有正 知遂志向正)’. 지지(知止)는 반듯이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 지향이 시작이고 능득(能得)이 마침(終)이다. 일(事)에는 종시(終始)가 있고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다.

하지만 『대학』은 선후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처음과 나중이 우로보로스 신화처럼 뱀이 꼬리를 물 듯 서로 얽혀져 있기에 말이다. 오히려 시종보다는 종시라는 말을 즐겨 쓴다. 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오르기 위한 발판이기 때문이다.

배추는 맨 ‘밑 둥’이 머리(대가리)이다. 사람 역시 ‘밑 둥(바탈)’에서부터 시작한다. 땅에서 솟아난 본말은 모두 하늘 정신인 것이다. 몸을 입고 태어난 나는 부모의 ‘긋’(끝자락)이지만 나로부터 새롭게 시작이 열린다. 끝이 다시 시작인 셈인바, 이것이 바로 종시(終始)이다. 하지만 본말을 따져 생각하는 것은 언제든 사람(先人本)이다.

‘천도종시후천종(天道終始后天終)’. 하늘의 道(진리)에 이르러서 비로소 멈출 수 있다. 마치는 순간 하늘과 내가 완전히 함께 마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알 때 머물 것, 종지(終之)가 분명해 진다. 이에 대한 예(例)를 다음처럼 들 수 있겠다. 정사(政事)를 잘 하려면 좋은 사람을 써야만 한다. 이 경우 좋은 사람은 부모를 잘 섬기는 자라야 할 것이다. 부모를 옳게 섬기는 자는 자신의 몸에 성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궁극적으로 하늘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이 때 하늘은 자연을 뜻할 수도 있겠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말이다. 앞서 다석이 물격(物格)을 중시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은 지금껏 말해온 ‘於至之善’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

결국 『대학』은 ‘근본’(本)을 따져 알고자 하는 유교 경전이라 할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대학』이 성서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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