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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항구?”

기사승인 2020.02.21  16: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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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쿠쉬 「안전한 항구」 & 「트로이의 목마」

블라디미르 쿠쉬의 「안전한 항구」가 떠오르는 시절이다. 코로나19가 지역사회로 퍼져가면서 불안이 커지기 때문이다. 호주 산불이 드디어 잡혔다는 소식에도 길게 기뻐하지 못한다. 중국 공장의 기계들이 멈추고 이 땅의 기업들도 그 여파에 흔들린다. 언제 끝날지,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은 자영업자들에게도 청천벽력이다. 경기가 어렵다, 어렵다 했건만 이제는 얼마나 더 힘겨워질지조차 알 수가 없다. 잔잔한 파도, 화창한 바닷가, 항구에서 즐기는 아늑함은 언제쯤 회복될까? 그러나 그런 아늑함을 담은 쿠쉬의 작품도 ‘안전한 항구!’로만 만날 수가 없다. ‘안전한 항구?’로 읽어야할 불안이 작품 안에서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 Vladimir Kush 「안전한 항구」 ⓒU.H.M. Gallery 단해기념관 전시 중

작품을 가만히 살펴보면, 몇 척의 배가 보인다. 두 척은 저 망망대해에, 다른 하나는 작은 잔 안에 떠있다. 어디가 안전할까? 부둣가 잔속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쿠쉬는 잔속의 배가 안전하리라는 기대를 슬쩍 흔들어 놓는다. 왼쪽에 길게 늘어진 커튼의 줄이 풀어지고 있다. 바람에 휘날려 금방이라도 잔을 쓰러뜨릴 듯 역동적이다. 거센 태풍이 아니어도 부둣가조차 위험할 수 있다. 작은 바람에도 잔이 넘어져 뒤집힐 수 있다. 저리도 화창한 날 잔잔한 파도인데, 안전할 거라 믿은 항구에서도 전복될 수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저마다 자신을 지킬 방법을 찾고 그것을 보험 삼아 투자한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인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끝까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안전한 것, 더 강력한 것을 찾다가 오히려 더 큰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강력한 안전장치일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큰 것을 내놓아야 한다. 더 강력하게 묶여 버리기 쉽다. 때론 가장 강력한 해결책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핵무기, 핵발전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되지 않았나.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나 인기든 그것에 집착하면서 더 단단히 묶이고 더 큰 문제에 휘둘리기 쉽다.

안전하리라 믿었지만 더 위험할 수 있는 역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추구하는 더 강력한 안전장치가 오히려 파멸을 부추기는 모순, 쿠쉬의 다른 작품 「트로이의 목마」는 그 역설과 모순의 결과를 보여준다.

▲ Vladimir Kush 「트로이의 목마」 ⓒU.H.M.Gallery 단해기념관 전시 중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계로 만든 코뿔소를 타고 초원으로 들어간다. 코뿔소 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저 넓은 평원 어디에도 동물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인간 문명이 생명의 초원을 멸종시키고 있는 풍경이다. 목마 속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트로이성을 함락시켰듯이 자신들을 지켜줄 과학기술의 목마를 타고 생태계를 함락시키고 있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방식이 결국 자멸의 길로 치닫는다. 나만, 우리만 살겠다는 생존의 논리가 생명의 질서를 파괴한 결과다.

생존과 생명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세포의 모습이 있다.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자살이 그것이다. 세포가 감염되거나 손상될 때, 혹은 수명이 다할 때, 스스로 죽는 세포자살이 일어난다. 세포자살은 세포괴사와 다르다. 괴사하면 염증을 일으켜 주변에 문제를 일으키지만, 세포자살은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생명은 이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을 통해 살림의 길을 간다. 생명이 생명을 살리는 자기 부정의 길이 아닐까.

아포토시스에 이상이 생기면 암이 발생한다. 죽어야할 때 죽지 않고 무한증식할 때, 생명을 죽이는 암이 되는 것이다. 죽어야할 때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 오히려 모두를 죽인다. 생존을 무시할 수야 없겠지만, 생명의 길까지 부정하면 공멸로 치닫는다. 생존의 집착이 생명의 길을 역행할 때, 함께 죽는다. 타자를 죽여 자기만 살겠다는 집착이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길을 압도할 때, 결국 함께 죽는다.

생명의 길이 아니라 생존의 집착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 그 무엇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존과 안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더 큰 문제가 되고 마는 현실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더 완벽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완전하고 영원한 해결책으로, 최고의 보험으로 하나님을 전하지 않던가.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유한하다. 그 무엇도 완전한 해결책이나 절대적 안식처가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완벽한 해결책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다 해결되던가? 그런 사람의 소문이라도 접한 적이 있나? 본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그렇게 확신하고 집착할 때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종교를 자신을 지키는 가장 완전한 안전장치로 삼을 때, 더 큰 문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개인과 사회의 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고 의지할 때, 이기심이 더 강해지기 쉽다. 그래서 종교심이 강한 사람이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현실이 드물지 않다. 최고의 진리라고 믿으며 절대 틀려서는 안 된다고 집착한다. 그래서 자기 믿음과는 다른 믿음, 자기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절대악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지옥으로 보내고 파괴하려 한다.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는 그렇게 절대적 확신에서 잉태되었다.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소수자에 대한 배타적 타자화와 폭력으로 이어진다. 절대진리에 대한 집착과 확신이 차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폭력과 독선을 정당화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확신은 너무 자주 감옥과 폭력이 되지 않았나. 인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선과 악을 스스로 절대화하며 서로를 죽이고 있다. 끊임없이 선악과를 따먹는 형국이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좋은 믿음으로 보곤 하지만, 니체는 확신이 진리의 적이고 감옥이라고 봤다. “이미 오래 전에 나는 확신이 거짓말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 아닐까라고 숙고한 적이 있다.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박찬국, [사는 게 힘드냐고-니체가 물었다], 167, 174, 175)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전해주는 신앙과 기도는 이런 확신과 다르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중에 쓴 편지다. 바울의 사역은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 때문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다. 고린도후서 12:10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새번역)

고린도후서 11:24~27을 보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유대 사람들에게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새번역)

하나님을 믿어서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핍박당하고 고통 받았다. 그 모든 고난을 나열한 끝에 결국 바울이 토로하는 염려조차 자신의 안위가 아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을을 누르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28/새번역)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따른 삶이 아니다. 오히려 이웃을,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을, 교회를 위해 고난을 짊어진 길이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옥에 갇힌 바울이 기쁨으로 초대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립보서 4:4~7/새번역)

죽을 고비와 고난을 겪으면서 기뻐하라고 선포한다. 대체 무엇이 기쁠까?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곳에서 쓴 빌립보서에는 기쁨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빌립보서 1:3~6/새번역) 바울은 감옥에서도 하나님 안에 잘 살아가고 있는 빌립보교회 공동체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1:12 이하를 보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18.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새번역)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중심에 있다. 1:20~21에 바울의 궁극적 바람이 드러난다. “내가 간절히 기도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새번역)

그렇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붙잡혔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한다. 자기 삶이 안전한지 불안한지는 주된 관심이 아니다. 자기 안전을 위해 하나님을 안전한 항구 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여행한다.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영이 사도 바울의 중심을 지켜주고 또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정확한 나침반은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면, 바늘의 방향을 믿을 수 없다. 살아있는 삶도, 살아있는 사랑도 흔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방향을 잃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역경의 현실 속에서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방향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리라. 안전한 항구에서 자신의 안위만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거친 파도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리라.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갈 이유를 잃을 때, 신앙은 안전한 항구만 찾는 퇴행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절대적 안전장치, 최고의 보험으로만 하나님을 만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실종되기 쉽다. 혹시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진정한 사랑일까, 혹시 투자나 거래가 아닐까? 기도 역시 소원 성취나 마음의 평안을 위한 도구로만 고착된다.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기도하며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기도가 깊어지면, 흔들림 없는 평안만을 누리던가? 오히려 하나님의 아픔과 분노에 더 민감하게 깨어나지는 않던가.

토마스 머튼은 진정한 기도(명상)가 “만족과 모든 체험을 초월해서 순수하고 꾸밈없는 믿음의 암흑 속에서 쉬는 사랑의 작업”이고,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pp. 230, 231)이라고 한다. 장피에르 드 코사는 신부도 『지금 이 순간의 성례』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아무 말이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이 말해지고, 모든 것이 행해집니다,” 모든 것을 맡길 때, 불확실하고 불안한 침묵도 하나님 뜻 이뤄지는 은총이다. 확신이나 평안을 얻어야 한다는 집착이나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맹종 사이에서 신앙은 불안과 갈등을 끌어안는 신뢰다.

불안의 파도 넘실댈 때, 항구의 쉼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바다를 향해 나아갈 힘이어야겠다. 파도의 고통이 전혀 없는 안전이 참으로 살아있는 삶인가. 실은 무의미의 고통에 갇힌 죽음이 아닌가. 파도의 고통을 기꺼이 맞이할 이유가 충분할 때, 살아있는 삶이다. 파도를 타는 사랑은 불안이 넘실댈 때, 안전한 항구만 찾지 않는다. 불안의 파도 위에 사랑의 길을 낸다. 불안과 갈등 위로 위로와 화해의 길을 낸다. 성령의 바람이 그 길로 부르고 계신다. 안전한 항구로, 든든한 산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을 타고 파도 위를 노닐게 하시는 분 역시 그 하나님이시다.

참고

(유튜브 작품 해설) 하태혁 목사의 그림 이야기: 「안전한 항구」 & 「트로이의 목마」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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