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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권리와 구원의 문제

기사승인 2020.02.18  01: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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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신 30:15-20; 고전 3:1-9; 마태 5:21-24)

< 1 >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라고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일련의 이런 화법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옛 사람들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지를 드러냅니다.

옛 사람들의 가르침은 율법 혹은 랍비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구전 전승에 대한 서기관들의 해석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이혼 증서를 써주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등이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제시한 가르침은 옛 율법이나 옛 사람들의 가르침을 대체하는 새로운 율법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옛 율법을 대체할 새로운 율법이나, 이전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제시하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단지 사람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 곧 사람의 의도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행위는 의도의 결과이지요. 그러나 설령 행위로 실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나쁜 의도도-의도까지 재판하는 세상 법정은 없지만-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간음 행위까지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27-29)는 예수님의 말씀은, 행위 이전의 탐욕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율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급진적이고, 철저하게 해석하신 것이지요.

문제는 같은 간음행위일지라도 남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당시의 관습입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대인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을 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남자의 관점에서, 남성중심적으로 간음을 규정한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간음을 경계하는 곳에서도 여성의 권리와 삶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위험성이 문제 되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조차도 간음일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성서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욥기 31,1; 집회서 23,4-5 등). 그러나 그 때에도 남자의 탐욕이 문제가 아니라, 여자의 탐욕만 문제된 것이지요. 여자를 위험시 하는 시각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은 여자가 가까이 오면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죄를 범하기보다는 오히려 넘어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들은 여자와 인사는 물론 악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여자에 대한 위험한 눈길을 경고하신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과 마음과 인간으로서의 성적 권리를 침범하고 소유하려는 남자들의 탐욕스러운 눈길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왔을 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 8,7)고 하시며,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 8,11)고 하신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가부장제적 남성 중심주의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여성들을 편드신 것이지요. 간음은 개인적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 Jan Brueghel the Elder(1568&#8211;1625), 「Christ and the Adulteress」(1958) ⓒWikimediaCommons

탐욕이 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일까요? 마태는 마가를 약간 변형하여(막 9,43-48) 눈에 관한 언급을 제일 앞에 놓습니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29-30). 이 말씀은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시선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에게서,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자기 자신의 구원과 저주에로 향하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간음을 경건한 유대인 남자들에 대한 도덕적 규정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삶의 권리를 빼앗고 파괴하는 죄로 보았고, 마지막 심판 때에 지옥에 던져질 범죄로 여겼던 것입니다. 타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구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도 개인의 도덕적 의(義)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마음의 회개’가 ‘몸의 회개’와 분리될 수 없다는 회개의 급진성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급진성(Radikalität)은 극단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적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우리 육체를 학대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강복하셨다(창 1,28)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요 2,1-1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적 삶, 생명의 육체성을 긍정하신 분이십니다.

과학자이면서 급진주의 좌파운동에 헌신했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부고에서, 리처드 르원틴은 급진성을 “사물을 근본 뿌리부터 고려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첫 번째 원칙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즉 급진성은 끊임없이 본질에 대해 묻고 이를 실천의 첫 번째 원리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의 이런 ‘급진성’을 어떤 신학자들은 ‘철저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인간 혹은 사물을 대하는 내 마음과 몸의 태도를 결정하는 첫 번째 원칙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에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생각과 실천의 첫 번째 원리에 무엇을 두고 있습니까? 돈 일수도 있고, 명예,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중립 혹은 중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이든 불순종이든 그 가운데 하나의 선택만 있을 뿐, 제3의 선택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철저성은 실행력이나 도덕주의, 영웅주의와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순종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영에 속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2)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12절부터 14절에 나오는, 폭력에 관한 법의 요약이며 동시에 인용입니다. 살인은 예나 지금이나 마땅히 재판을 받을 중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거나, 얼간이라고 말하거나,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이 살면서 화도 낼 수 있고, 형제자매에게 얼간이 혹은 바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형제자매에게 얼간이 혹은 바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욕이나 비난이었는지 몰라도, 과연 그것이 살인에 버금가는 심판받을 일이며, 심지어는 지옥 불 속에 던져질 죄란 말일까요?

우리는 물론 화가 타살이건 자살이건, 살인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에 속한다는 당시의 랍비적 명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것은 화가 나쁘게 발전하여 살인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 때문만이 아니라,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성서의 증언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20).

형제자매에 대한 비난이나 욕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난이나 욕도 살인에 이르는 경우가 있지요. 악성 댓글이나 가짜 뉴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이 대표적 예입니다. 이웃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은 세상 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받게 되겠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공의회에 불려갈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행위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된다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질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예수님의 초점은 성내는 일이나,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 살인에 버금가는 악한 행위일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런 죄는 세상 법정에서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행위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함으로써, 초점을 성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한 죄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때문에 상처받고 죽을 수도 있는 이웃, 그래서 보호받아야 할 이웃에게로 옮기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얼간이, 바보라고 비웃는 사람은 사실 비아냥 자체에 목적이 있기 보다는, 자신의 의, 곧 자기는 그들과 달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임을 과시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보다 더 앞세우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세상 법정에서 명예훼손죄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 2 >

예수님은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선택은 온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신명기 법전의 언약의 말씀도 백성에게 선택을 요청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 30,15-19).

신앙의 길은 두 길 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 번영과 파멸, 하나님과 우상 사이의 선택 밖에 없습니다. 제3의 길, 중립 혹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길은 없습니다.

< 3 >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인간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 두 종류로 구별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달리 표현하여 ‘자연에 속한 사람’(고전 2,14), ‘인간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고전 3,3)입니다. 이들은 고린도교회에서 파벌을 조성하여 시기와 싸움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나는 바울 편이다’고 하면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고전 3,4). 이들은 신도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람을 중상하고, 술 취하고, 약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고전 5,10-11). 여차하면 세상법정에 사람들을 고소하고, 같은 신도에 맞서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고전 6,1-6).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는 사람’(고전 1,9), 곧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 믿는 사람(고전 1,25), 곧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보다 하나님의 평가와 판단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고전 2,16), 곧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믿는 사람(고전 3,16), 하여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판이나 세상 법정에서의 심판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고전 4,3-4), 곧 원수 갚기를 오직 하나님에게 맡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누어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사는 사람(고전 7,17), 곧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람(고전 9,19), 곧 자신의 자유를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쓰지 않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받은 은사를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고전 14,12), 곧 받은 은사를 자기를 내세우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악용하지 않고 오직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악에는 아이가 되지만 생각하는 데는 어른인 사람(고전 14,20),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 사람(고전 16,14), 곧 시기와 인정욕구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매사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하면서 일이 되게 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나누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깁니다(고전 5,12-13). 바울은 교회 안에 있으나 육에 속한 사람들을 권면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아직 어린 아이와 같지만,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고전 3,1). 그래서 지금은 젖을 먹이듯이 권면하지만,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신앙이 성숙하면, 이들도 모두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영적이고, 적당히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영적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육적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집을 세우든지, 그 기초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위에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인 각 사람의 선택과 결단에 달렸습니다(고전 3,11-13).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내놓으실 때마다(신 30,19),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마땅히 죽음 대신에 생명을, 저주 대신에 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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