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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감염자의 타자화와 낙인찍기

기사승인 2020.02.16  23: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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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자의 눈으로 세상 읽기 (7)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지구촌 풍경들

지난 2월 7일부터 11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세계적인 가전제품 전람회인 암비엔테(Ambiente)가 흥행에 실패했고, 2월 24일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 최대 모바일 박람회 ‘MWC 2020’이 취소되었다.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 일로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신문들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역 차원의 전염병(epidemic)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유행하는 전염병(pandemic)이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 여러 나라들에 전파되면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중국인들이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이에 덩달아 한국 사람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프랑스 파리에서 길 가던 사람들이 한국인 여성을 보고 “저기 바이러스가 온다.”고 외쳤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독일 여행을 끝내고 귀국한 한 지인은 자주 다니던 슈퍼마켓의 계산원들이 물건 값을 계산하려고 그 앞에 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는지 의례적인 가벼운 인사말조차 건네지 않더라는 말을 전했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계산원들의 그런 이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국내 신문 보도들은 한술 더 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중세를 ‘우한 폐렴’으로 지칭하고, ‘우한 사람들’이 박쥐나 천산갑 같은 야생동물을 식용으로 쓰기 위해 시장에서 유통시키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보도했다. 미지의 전염병, 발생지역, 인종, 야생동물 식용 등을 서로 뒤섞은 보도의 효과는 컸다. 마침내 신문 지면들에는 ‘중국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으니 중국 사람들의 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보수적인 신문들은 일제히 정부가 정책 판단 실기로 인해 중국인들의 입국을 전면 통제하지 않아서 미증유의 전염병 창궐의 길을 열었으니, 두고 보자는 식으로 보도를 하고 세평을 실었다.

‘낯선 위협’인 전염병

큰 전염병이 돌면 민심이 흉흉해지기 마련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극심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가장 유력한 해법은 전염병을 ‘낯선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격리’하는 일이었다.

▲ 한 동양인 남성이 체온 검사를 당하고 있다. ⓒGetty Image

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규명과 과학적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낯선 위협’인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벌로 간주되었다. ‘천형’을 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벌을 받을 만한 짓을 했다고 여겨졌기에 기피와 멸시, 배제와 축출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그러한 사람들을 공동체 바깥으로 내다버리고 ‘격리’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말까지 그런 일은 비일비재로 이루어졌다. 한양 도성에 역병이 돌면, 환자들을 내다버려 죽음을 기다리게 하던 곳이 한강변 사육신묘지 경사면에 있었던 ‘가칠목’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천형’ 관념이 발달하였다면, 서양에서는 전염병을 ‘하나님의 형벌’로 보는 관념이 깊이 뿌리를 내렸다. 중세 유럽에서 인구의 절반을 전멸시킨 페스트는 하나님의 형벌로 간주되었다. 그 형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교회당에 밀집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페스트가 휩쓸었던 시기에 무수히 많은 그림과 부조(浮彫)에 묘사된 ‘죽음의 춤’은 전염병 창궐에서 비롯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을 얼마나 속속들이 사로잡고 있었는가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염병이 천형이나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상투적인 관념은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우리 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 않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늘이나 하나님 같은 초월적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의 잘못이나 허물 때문에 병을 얻었다는 해석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에이즈 감염자들이 문란한 성행위를 해서 그런 질병에 걸렸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는 요즈음에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에이즈는 동성연애와 매매춘을 범한 행위에 대한 벌이라는 것이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그들을 멸시하고 공동체에서 따돌리는 질병 대응 프레임은 누구나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전염병 감염에 대한 상투적 해석과 낙인찍기

전염병을 ‘낯선 위협’으로 간주하고 ‘격리’하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죽음에 이르게 하여 일상을 뒤흔드는 전염병이 ‘낯선 위협’이라는 것은 그 전염병이 외부로부터 공동체에 침입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침입해 들어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기에, 그것은 ‘낯선’ 것이다. ‘낯선’ 것은 우리에게 동화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안의 경계 바깥에 설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타자’이다.

전염병이 돌면, 그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장본인으로 낙인을 찍기 마련이다. 이러한 낙인찍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한 사회의 주류 집단에 의해 타자로 여겨져 왔던 하위 집단일 경우가 흔하다.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하지 않는가?

요즈음 같이 국제간 인적 교류가 활발하여 전염병이 외국에서 오는 경우가 잦을 때에는, 이미 타자로 여겨져 왔던 인종 집단들이 전염병 감염원으로 쉽게 낙인찍힌다. 한 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우한 폐렴’으로 부른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하지 못한 우한 사람들에게 전염병 창궐의 죄를 묻고 ‘우한 사람들’을 전염병 감염원으로 낙인찍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언행이다.

아마 처음에는 우한 사람들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의 경계심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언론 보도가 꼬리를 물고 감염자와 사망자의 수효가 급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우한 사람들’을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찍고, 그들의 입국을 단호하게 거부하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후베이 성으로 확산되자 ‘후베이 성 사람들’ 전체를 교류할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찍었다. 이러한 식의 낙인찍기는 계속될 것이고, 확대될 것이다. 아마도 그 연장선상에서 인종차별이 자리를 잡게 될지도 모르고, 그 인종차별은 전염병 확산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인종적 편견들과도 복잡하게 결합하여 끈질기게 이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이등국민으로, 열등한 족속으로, 더러운 인종으로 보는 인종차별이 우리의 마음과 몸에 새겨지는 것보다 더 참담하고 무서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도 전염병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염병이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판단하고 그 사람들을 전염병 감염원으로 낙인을 찍는 것은 전염병 창궐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된 일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염병 감염자들과 감염원을 우리 바깥으로 밀어내어 그들을 타자로 만들어야 우리 안에 안정감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들 말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고 전염병 감염자를 가려내고 전염병의 전파 경로를 파악하여 그 확산을 차단하여야 한다. 이를 위한 만반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문명사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전염병 발생과 확산의 죄를 묻기 위해 그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낙인을 찍는 일이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오늘의 세계에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전염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든 젠더들과 퀴어들,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인종들과 집단들과 국민들도 전염병 감염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제는 누가 전염병에 걸렸는가가 아니라,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새로운 전염병에서 벗어나려면 현대 문명의 추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사르스, 메르스,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 같은 새로운 전염병이 빈발할 것이고, 그 확산 규모가 엄청나게 넓어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기후변화, 병원체의 진화, 도시 인구의 밀집, 국제간 인구 이동, 개발지역 확대로 인해 서식지역을 빼앗긴 야생동물들의 인간 공동체 침입 증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공공의료 시스템의 광범위한 붕괴 등으로 인해 ‘낯선 위협’이 침입하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인간 세계를 황폐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새로운 전염병은 문명의 조건들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전세계로 확산된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은 인류의 문명이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차단하고 감염자들을 격리해서 치료하는 것은 매우 급박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을 끄기 위해 출동한 소방수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우한이나 중국 여러 지역에서 야생동물 식용으로 인해 인수공통감염 전염병이 발생한 것 같으니 중국 당국은 그 발생원을 차단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주민들에 대한 위생 교육을 반복해서 철저하게 시켜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도 부분적인 조치일 뿐이다. 기후변화, 도시화, 지구화, 무모한 개발, 자본 축적과 팽창에 급급한 인류 문명의 기본 논리와 발전 추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전염병의 공격으로부터 인류가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인류가 새로운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에 대처하기 위해 함께 할 일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전염병의 공격으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함께 만들어갈 것을 다짐하기 전에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 기피와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마음을 조장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드는 숭고한 연대의식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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