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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부재성에 대한 질문

기사승인 2020.02.15  17: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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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짖는 인간, 침묵하는 신(막 15:33-34)

깨인 사람들은 신앙을 교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맹목적인 충성이나 확신이 아니라 자신과 신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은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데레사 수녀의 고백

돌아가신지 23년이 되었지만, 노벨평화상의 수상자이자 지금도 세계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도의 성녀(聖女)’ 테레사 수녀가 계십니다. 저도 한 15년 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들을 데려다가 마지막 가는 길 며칠 혹은 다만 몇 시간이라도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이 땅을 떠나도록 배려하는 ‘죽음의 집’에서 하루 봉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맡았던 사람은 비교적 젊은 사람이었는데 제가 아침에 맡았을 때는 정말 몇 시간 못갈 것으로보였는데, 제가 돌보고 나서 떠날 때는 의식이 많이 돌아왔습니다. 아마 그분은 그 집을 곧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10년쯤 되었을 때, 그분의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그 가운데 ‘신의 부재’로 고민하고 갈등했던 부분이 있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70세가 되었을 때 신앙의 동지인 미하일 반 데어 페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큽니다.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할 동안) 혀를 움직이려고 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쓴 2개월 후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테레사 수녀는 시상식장에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벨상 수상식 연설이 세상이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전형적 모습이라면 페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자기 실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자기 모순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 이전에 쓴 편지에서는 ‘무미건조함’ ‘어둠’ ‘외로움’ ‘고문’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고 밝히면서 지옥에서의 경험과 비교했으며, 또 자신의 내면 세계와 밖으로 보이는 모습 사이의 불일치를 알고 있다면서, “미소는 모든 것을 감추는 가면이거나 외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결국 테레사 수녀가 남긴 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38세 때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삶을 시작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무신론자로서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펴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도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의 계속된 신앙고백은 자신이 빠진 함정을 더 깊게 파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비꼬았습니다. 반면 테레사 수녀의 숭배자들은 이 고백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고 그의 업적을 더욱 거룩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이 고백은 테레사 수녀가 신이나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은 적 없는 석고상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대부분은 성자들이 신과 연결돼 있으므로 그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쉽게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테레사 수녀의 비밀스런 고백은 성자들도 우리만큼 때로는 우리보다 더 힘들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마더 테레사…>의 저자이자 테레사 수녀가 선종한 후 그를 성인으로 추앙할 것을 청원했던 장본인인 브라이언 콜로디에이추크 신부는 “이 편지들에 담긴 함의를 잘 이해하면 테레사 수녀는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신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순간을 슬퍼했던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을 가진 모든 이들 또한 의구심도 동시에 갖고 있다. 테레사 수녀의 번민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믿음은 느낌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암 투병을 하는 가운데서도 계속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시를 발표하고 계시는 이해인 수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수도공동체 안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할 때 혹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또 동료들과의 관계가 힘들 때 ‘정말 그분(신)이 계실까’, ‘내가 정말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 현대의 성녀라 추앙받았던 인도의 테레사 수녀. ⓒGetty Image

나의 고백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뜻대로 미션스쿨을 다니고 중학교 때부터 장래 희망란에 목사라고 써서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학생회 종교부장으로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한국신학대학을 가고 이후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목사가 되고 향린교회에서 은퇴를 한 저는 경력만 놓고 보면 평생을 신앙 안에서 흔들림없이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대학 1학년 때 과연 내가 목사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과연 나에게 신에 대한 소명이 있는 것인가? 나는 과연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번민하고 방황하던 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십자가를 바라보면 두려운 생각이 밀려와 십자가 바라보는 것을 피하였습니다. 죽음 또한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계속 갖고 있습니다.

제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속 가는 이유 중의 하나도 청년시절부터 가졌던 이런 신앙의 문제를 풀기 위한 것입니다. 과연 천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신의 존재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이 길을 걸었을까? 지금도 걷기가 어렵거든 당시 제대로 된 의류나 신발도 없이 또 병이 들거나 강도 떼를 만나 중도에서 죽는 위험을 무릎 쓰고 그들은 이 길을 왜 걸었던 것일까? 물론 당시에는 순례 길이 하나의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일종의 수행이 업적으로 인정을 받아 자신의 저지른 죄가 용서받는다는 일종의 행위 율법 신앙이 작용했던 일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지금에 비하면 당시로서는 죽음과 맞바꾸겠다는 결단이 앞서지 않고서는 결코 시작할 수 없는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산티아고 까미노 길은 순례는커녕 여행 혹은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경험을 바탕으로 산티아고 길의 순례의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는 책을 한 권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순례는 자신의 삶이 하늘이 부른 고귀한 삶임을 깨닫기 위해 세상 욕망에 매몰되는 삶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불행과 고통을 겪을 때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왜?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신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영화 빠삐용인가요? 마지막 장면에 교회 안에 들어가서 그런 질문을 던지지요? 도대체 내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기에 내가 이렇게 평생을 감옥 안에 갇혀 살고 도망자가 되어야 합니까? 왜? 도대체 당신이 있기나 하는 것입니까?

랍비 쿠시나의 고백

오늘 2개월 전 스페인 마드리드 시가지를 걷다가 불의의 사고로 32세의 딸을 잃은 이성우 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유대인 랍비였던 헤럴드 쿠시너(Harold Kushner)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1 성서가 말하는 야훼 신의 존재를 믿고, 그 신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데 자신의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현대의학으로는 불치병인 조로병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그 아들은 14살에 죽게 되었고, 가장 발랄하게 꿈을 키우면 살아가야 할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바라 본 쿠시너는 『왜? 착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도 80년대 이 책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이 책은 곧 그해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세계의 많은 언어로 번역이 된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처했을 때 이를 어떻게 뚫고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이 책을 ‘인류의 영혼을 빛내 준 책’이라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쿠시나는 다윗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을 잃었을 때 그가 어떻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삶을 지혜롭게 살아갔는지로 말문을 열면서 신앙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만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신앙을 지키거나 종교로부터 위안을 받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특히 고통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이라고 자학하는 신앙인들을 위해 책을 썼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납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저절로 갖습니다. 곧 고통은 내가 행한 죄의 대가로 받아드립니다. 여기에 종교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시나는 말하기를 ‘삶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나 종교는 그들을 위로하지 못하였다. 종교는 오히려 죄의식을 통하여 그들을 더 아프게 했다’고 문제 제기를 합니다. 죄의 대가라는 합리화는 고통받는 사람을 돕지도 못할뿐더러 고통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예를 가장 잘 보여준 얘기가 욥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한 지방의 가장 부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착하게 살아가던 욥은 하루 아침에 아들딸 모두를 잃고 재산마저 모두 잃을뿐더러 자신은 심한 피부병을 앓게 됩니다. 부인마저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믿음 좋은 친구들은 불행한 일을 겪은 욥을 찾아와서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하고 잘못을 회개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쿠쉬나는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도 종종 나쁜 일을 당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신은 전능하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신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신과 맞서는 대신 우리가 겪는 분노를 하느님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은 개인적으로도 일어나지만 사회적으로도 일어납니다. 우리 민족은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고 근세 100년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권력자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전두환 시절에 일어나 칼기 폭파사건이나 박근혜정권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아픔을 계속하여 갖고 살아가는 유가족들에게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쿠쉬나는 말하기를 신이라고 해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위험에서 건지기 위해 자연의 법칙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연은 도덕적으로 장님이며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은 지진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금 사람들이 재건하도록 하는 용기와 이웃을 돕기 위한 손길을 가져오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이 일에 대하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 이 추방은 징벌인가?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징벌이 아니라 이로 인해 그들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신은 사람에게 징벌로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지를 않고 오히려 선택의 자유를 주었고, 그리고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이상 하느님도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 낙원 추방에 대한 쿠시나의 해석입니다. 그는 주장합니다. 만약 유대인 6백만의 죽음에 대해 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살아온 나날들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세상의 비극에 대해 신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가 위기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위기 속에서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것만 들어주시면 저는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게요.” 그래서 목사가 된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만, 쿠시나는 이런 기도는 너무나 유치한 기도이며 ‘하느님의 은총은 거래대상이 아니다’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대신 그는 연대감, 즉 공동체 일원들이 그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사실과 신은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 그 문제를 극복할 힘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운명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 비극에서 살아남을 힘이 자기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인 것입니다.

끝으로 쿠시나는 신학자 도로시 죌레의 글을 인용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를 ‘악마의 순교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생명의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합니다.

신은 어디에?

성숙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깊이 고민해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강한 바람에 의해 나무가 통째로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건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인생의 뿌리를 깊게 만들어 갈 것인가?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책임소재를 묻는 불필요한 고통 속에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라는 저들의 기도를 들어야 합니다.

독일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간혹 포로들이 도주를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독일 병사들은 연병장에 모두를 불러내어 본보기로 몇 사람을 뽑아 형틀에 매달아 고통 가운데 죽어가도록 합니다. 포로들은 저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몇 시간씩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힘없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믿어온 야훼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때 누군가 이렇게 답합니다. “지금 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매달려 계신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에 외치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외침은 신의 부재에 대한 절망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아파하시는 아바 하느님의 품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아픔을 대신 외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로 되돌아옵니다.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책 <마더 테레사의 삶 그리고 신념>은 신의 부재에 관한 의문들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일축한다. “사랑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허리 숙여 상처와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다.” “내가 만약 사회복지나 자선을 위해 활동하고자 했다면 행복했던 집도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부모님과도 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하느님에게 몸을 바쳤으므로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지요.” 노벨상 수상 자리에서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재벌들은 재산을 기부함으로 수녀님이 돌보신 사람보다 수백 배, 수천 배의 사람들에게 복지를 베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때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I am not called to be successful, but to be faithful.”(나는 성공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충성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우리 곁을 먼저 떠나간 사람이 있다면 남은 사람들의 몫은 그들이 못다 베푼 사랑을 대신 베풀며 살아가는 삶만이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히틀러에 암살단에 동참함으로 젊은 나이에 처형당한 천재적인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본회퍼 목사의 남긴 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느님!

조헌정 은퇴목사(향린교회) choshalom@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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