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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파국을 막아낼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20.01.27  17: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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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자의 눈으로 세상 읽기 (4)

기후 변화와 기상 이변은 사람들을 끝 갈 데 없는 불안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여름 극심한 더위와 가뭄으로 고생하는가 했더니 10월 초까지 태풍이 끊이지 않았고, 이번 겨울은 별로 춥지도 않고 겨울답지 않게 비도 많이 내렸다.

기후 변화는 세계 곳곳에서 관측되는 현상이다. 기후 온난화, 가뭄과 홍수, 녹아내리는 빙하와 만년설, 해수면 상승 등등은 이미 익숙한 낱말들이 되었다. 극심한 가뭄과 고온으로 인해 호주에서 일어난 산불이 대륙 전체를 삼킬 듯이 번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인류세’(anthropocene)가 곧 묵시적 파국을 맞을 것 같은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류세의 시작과 묵시적 종말

방금 인류세라는 낱말을 썼는데, 학교에서 인류가 살아가는 지질학 시대가 ‘충적세’(holocene)‘라고 배웠던 사람들은 인류세라는 말이 낯설 것이다. 인류세라는 말은 지난 2000년 파울 크루첸(Paul Krutzen)이 처음 사용했다. 크루첸은 오존층에 구멍이 나는 이유를 설명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기후화학자이고, 독일 막스프랑크연구소의 화학분야 주임을 맡고 있는 학자이다.

▲ 호주에서 발생한 산불을 피해 이동하는 캥거루 ⓒGetty Image

인류세는 충적세의 끄트머리를 중립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인류세는 충적세와 구별되는 지구 역사의 한 시기로 규정된다. 충적세는 약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난 뒤에 기후가 비교적 안정되고 해수면도 현재와 같은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인류 문명이 세계 도처에서 싹트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인류세는 이러한 인류 문명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생태계에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행사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인류세는 지각에 축적된 엄청난 규모의 석탄, 석유 등의 화석연료들을 끌어내어 사용하고 그 쓰레기를 대기와 토양과 강과 호수와 바다에 내다버림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지구 역사의 시기이다. 화석연료는 증기기관이 발명되던 시기부터 그 사용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지만, 20세기 중반부터 그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래로 인구가 급증하고, 사회적 총생산이 팽창했다. 담수 댐의 면적과 물 사용량이 증가하고, 대기에 축적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급증하고, 플라스틱이 지구와 해양을 뒤덮었다.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생물 종의 다양성이 급감했다. 이 일련의 현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지구의 모습과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수많은 기후학자들은 인류의 문화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발전한다면 인류세가 파국적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미 인류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임계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인류세의 두 기반 : 기술과 자본주의

인류세에서 인류는 기후와 육지와 바다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인류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자연으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끌어들여 이를 변환시켜 소비하고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을 자연에 내다버리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류 문화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 위력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두 가지 장치를 통하여 강화되고 있다. 그 하나는 기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이다.

기술은 자연을 대상화하고 통제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근대 이전의 사람들처럼 단순히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는 데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 세계에서 기술은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고, 그 때문에 기술체계(technology)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찍이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기술체계에서 작동하는 일관성 있는 논리를 과학주의라고 지칭했고, 이를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기술체계는 실험실의 산물이다, 무수히 설치되는 실험실들은 인공적인 세계의 단면들이다. 세계의 단면을 베어내어 반복해서 진행하는 실험의 결과들과 자료들을 해석해서 만들어내는 프레임과 관념적 구성체는 정교한 기술 장치들을 통하여 실재(reality)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관심에 이끌려 구성되는 지식과 기술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의 관계들을 통전적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스위스의 생태학적 경제학자인 한스 크리스토프 빈스g어(Hans Christoph Binswanger)가 제대로 짚었듯이, 신용을 창출하여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임으로써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경제체제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신용은 금융 장치를 통하여 무한정 창출된다. 화폐 창출의 무한성과 생태계의 유한성은 인류세에서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이룬다. 신용 창출의 제도적 절차를 통하여 차고 넘치는 화폐를 갖고서 자본주의는 미래의 세대에 남겨두어야 할 자연자원들을 현재 세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탕진한다.(1)

자연으로부터 과도하게 끌어들인 에너지와 물질은 한편으로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에너지와 물질의 희소성 조건 아래서 합리성 추구의 강박 아래 놓여 있었던 전통적인 사유체계와 지식체계를 뒤흔들고 인간 사회를 조직해 온 질서 체계를 붕괴시킨다. 에너지와 물질의 과잉 속에서 개별적인 욕망을 충족하면서 범속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Hukuyama)가 오래 전에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역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위의 인정과 가치의 공유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공동체적 속박에서 벗어나 정보들과 지식들의 네트워크에 임의로 접속하거나 단절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학문의 관점에서 인류세의 파국을 막아야 한다

인류세는 기술과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인류의 문화가 자연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지구 역사의 한 시대이다. 인류세에 이르러 기술과 자본주의는 문화와 자연을 서로 융합시켰다. 따라서 자연과 문화를 서로 별개로 나누어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연된 환자를 이송하는 의료진 ⓒSBS 뉴스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방식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이 학문이론적으로 정립되면서 강화되었다. 이제 인류세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버리고 둘을 융합체로 인식하여야 한다면, 이 융합체를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론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2) 새로운 학문이론은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을 자연과학에 편입시키거나 기술공학을 기본 문법으로 하는 단일과학을 구축하는 방식으로는 구현될 수 없다. 정신과학(혹은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에 속한 여러 학문들의 독자성을 일단 전제하고 나서 개별 학문들 사이의 협력과 대화를 시도해 보자는 방식의 학제간 연구 정도로는 인류세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류세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학문을 형성할 수 없다.

자연과 문화가 혼융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자연계와 인간계의 에너지-물질 순환, 인간의 욕망과 그 충족의 체계, 자연에 대한 기술적 개입, 그 개입으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와 인간 사회 조직의 변화, 인류세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의 추구 등등을 통전적으로 연구하고 성찰하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 이 학문은 인류세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과 구조들을 서로 연결된 전체로 파악하면서도, 그 전체를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메타적 사유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메타적 사유의 개방성은 기술과 자본주의에 의해 그 주거를 빼앗기고 있는 ‘도룡뇽’과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학문은 이제야 비로소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을 뿐이고 그 전모가 아직 드러나 있지도 않지만, 필자는 ‘도룡뇽’과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구상되는 통전융합학(統全融合學)의 이름으로 그 학문을 기획하고 싶다. 이 통전융합학은 인류의 ‘실천’을 매개로 해서 의식과 존재가 동태적으로 상호 변환되는 과정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인류의 실천이 지식들과 기술들을 갖고서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들을 만드는 과정과 거기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설명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만물이 바른 관계들 가운데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세계를 여는 방안을 또렷이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만물이 생명의 네트워트들의 네트워크를 온전히 이루도록 하려는 인류의 기획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세계는 ‘도롱뇽’과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해체하면서 맞는 지구 역사의 새로운 시대여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지구는 인류가 주체가 되는 생명세의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빛에서 창조와 종말을 성찰하는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통전융합학의 틀을 형성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기독교 신학은 일어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Hans Christoph Binswanger, Geld und Natur: das wirtschaftliche Wachstum im Spannungsfeld zwischen Ökonomie und Ökologie (Stuttgart [u.a.], Ed. Weitbrecht, 1991), 17.
(미주 2) 이러한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낸 글들은 Das Anthropozän: zum Stand der Dinge, ed. by Jürgen Renn/Bernd Scherer (Berlin, Matthes & Seitz Berlin, 2015)에서 접할 수 있다.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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