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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愚問賢答)

기사승인 2020.01.26  02: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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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워해야 할 때(마가복음 2:19-20)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오늘은 설 주일입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올 한 해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설 명절 중이기 때문에 복잡한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간단하게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금식논쟁

오늘 본문에는 ‘금식논쟁’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금식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를 묻습니다.

저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과 제자들은 매일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 중에 금식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항상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귀신 들렸다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금식하지 않으셨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전혀 거리낌을 갖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포도주가 물 대신이었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자연스러웠겠습니다만,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시는 것보다 조금 더 마셨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왜 금식하시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지금까지 많은 학자나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를 담아서 이 말씀을 전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말씀이 일종의 비유이기 때문에 ‘신랑’이라는 표현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겼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말씀을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이시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른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까지 그렇게 들어왔고,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신랑이고, 내가 있는 이 순간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대답하셨다면, 이 대답은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자신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대답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답을 던지셨습니다. 자신이 신랑이라는 의미의 말씀은 평소 예수님의 답변들과 비교했을 때,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 금식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있는 의미가 담긴 비유로 생각하기보다,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언제 합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금식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회개할 때 금식을 합니다. 금식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 예수님께서 금식했다는 기록은 40일 외에는 성서에 없다. 예수님은 늘 식사와 잔치의 주인공이셨다. ⓒGetty Image

때로 하나님께 어떠한 종류의 간구를 드릴 때도 금식하는데, 이 금식도 회개와 연결된 부분이 있다고 보입니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친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특정 금식일이 지정된 때도 있습니다. 스가랴 7장에 보면,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70년 동안 매년 두 차례,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일을 지정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가랴 8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넷째, 다섯째, 일곱째, 열째 달에 금식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성전 파괴와 관련된 금식 이외에도 넷째 달과 열째 달에 금식하는 날이 또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로 정해서 행했던 금식은 자신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였을 것이고, 이 행위는 회개의 감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적 회개가 아닌 국가적 회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서 40일간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 금식은 회개의 금식이라기보다 극단적인 자기 수행에 가까운 금식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는 행위는 수도자들이 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준비하시며 일종의 자기 비움의 노력을 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어떤 이유로 금식을 했을까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수행이라는 의미로 금식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리새인들은 그런 목적으로 금식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들은 로마에 점령당해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로 인해 하나님께 나라의 독립이라는 간구를 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국가적인 죄의 고백과 회개의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이스라엘의 위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기인가?

그런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위기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통해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은 오히려 결혼식 때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먹고 마시기를 즐길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의미가 담긴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의미에서 결혼식 때처럼 즐거워하고 삶을 누리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셨던,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말씀과는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11장 16-17절, 누가복음 7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당시의 사람들은 춤을 출 때 춤추지 않고, 슬피 울 때 울지 않는다는,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늘 금식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먹고 마실 때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어지는 생베를 낡은 옷에 덧대면 안 된다는 말씀이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도 시기와 상황에 맞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깊은 비유적 의미가 담겨있다기 보다는 그냥 그때그때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끝난다면, 이 역시도 그리 좋은 답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 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해야 하는 때인지,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판단하시는지에 대해 다음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이 말씀만으로도 그들은 어떤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저 말씀에 따를 시기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잠시 언급했던 스가랴 7장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스가랴 7장은 다리오 왕 4년에 몇몇 사람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에스라에 따르면 다리오 왕 2년부터 제2성전 준공이 다시 시작되어 6년째에 성전 건축이 끝났기 때문에 이 시기는 제2성전 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로 보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성전이 다시 건축되고 있는데, 성전 파괴로 인해 정해져 있던 금식일을 지켜야 하냐는 질문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금식이 나를 위한 금식이었느냐? 오히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너희가 평온했을 때에 선지자들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라.”

그리고 9절 이후에 옛적 평안했을 때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지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이 듣기 싫어 등을 돌리고 귀를 막았으며 마음을 굳게 하여 율법도,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기는 제2 성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시기였고, 헤롯에 의해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진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스가랴가 예언을 전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성전이 있고, 평안한 때가 아니냐? 그렇다면 지금 너희가 할 일은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일이다.”

아마도 20절에서 말씀하신 ‘신랑을 빼앗길 때’는 70년 경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는 때를 의미하시는 듯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스가랴의 예언처럼 이들이 땅에서 흩어질 일도, 이 땅이 황폐해질 일도 없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우리가 슬퍼하며 금식해야 하는 시대입니까? 아니면 기뻐하며 먹고 마셔야 하는 시대입니까? 항상 언론에서는 위기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경제도 위기, 사회도 위기, 세대 간의 갈등, 집단 간의 갈등은 극에 치닫고 있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시대가 위기와 갈등의 시대라면 우리는 아마 울며 금식해야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 의해 침략당해 나라는 국권을 잃은 상태였고, 로마 병사들이 이스라엘을 감시하고 관리하던 시대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게 맞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가 울며 금식해야 하냐”고 물으십니다.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위기 상황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시대의 위기로 인해 걱정하고 염려하며 눈물 흘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근심하며 금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며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를 입었고 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신 은혜를 즐기며,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삶을 통해 보여주신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이 그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스가랴가 8장 19절에서 말한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슬픔이 기쁨이 되고, 애통이 즐거움이 되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슬퍼하며 애통하는 시대가 아닌 즐거움과 기쁨의 시대입니다. 금식해야 할 때가 아닌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기억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약속된 복과 은혜가 내려질 줄 믿습니다.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는 구원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항상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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