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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 43:18-21, 44:21-23; 행 16:25-34; 마 9:9-17)

기사승인 2020.01.24  17: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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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셋째주일(1월26일) 설주일

1.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며, C에는 E가 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입니다. 곧,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선택(Choice)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E를 하나 추가하려고 합니다. 곧, 결과(End)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또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결과가 다를 것입니다.

이제 2020년 1월도 끝나갑니다. 새해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다짐했던 결심들이, 여전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나요? 혹은 그 작심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나요? 저도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들 대부분도 ‘작심삼일(作心三日)’, 혹은 ‘작심하루’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오늘도 자책하며 절망합니까? 나는 왜 이럴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았을지라도, 옛 인간을 단번에 벗어버릴 수는 없고, 계속적으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나날이 성화되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인간론으로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지상의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본성을 가집니다. 곧 ‘영과 육’, 혹은 ‘옛 인간과 새로운 인간’이라는 두 본성이 우리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상호 투쟁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루터의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의인이면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를 의롭다고 여길지라도, 그는 죄인이며, 결코 그의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최종적인 종말에,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성화(聖化)의 과정’이 완성되고, ‘죄성(罪性)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진정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곧, 새로운 세상이 오기까지는, 우리는 죄인이며 이러한 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오늘도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넘어지고 쓰러지는 우리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녕 이러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진솔한 삶은 이것을 인정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곧, 자신을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이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이 그렇습니다. 주현절기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우리의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예수님)을 소개하며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오늘 설 명절 연휴를 맞아, 찾아가는 가족과 친지들 가정에, 또한 찾아온 친척들과 가족들의 가정에 주님의 구원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먼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마태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막 2:14 ; 눅 5:27). 세관은 세금업무를 보는 관공서를 말하죠?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국경 근처에 위치하여 통행세를 징수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업무였습니다.

아무튼 예수께서 국경 근처 세관을 지나시다 마태를 만났고,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 세관 업무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죄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 9:10) 이 때 사건이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작심삼일로 자신의 의지 없음과 부족함을 탓하는 어리석은 우리를, 또한 이 불의한 시대에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부르시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아마존에서 22년을 사역한 허운석 선교사는 자신의 가식으로 뒤덮인 자아의 폭로하며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 (두란노서원, 2016)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기도하러 간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하나님을 훼방하고 대적하러 나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려고 손만 모았다 하면 ‘하나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합니다. 우리가 달라는 이것, 저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수 있는데도, 입만 열었다 하면 내 마음에 드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라고 조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하면서 왕(王)바리새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교회 기도하러 간다하며 싸움합니다. 교회 찬송하러 간다하며 고함지릅니다. 교회 말씀 들으러 간다하며 남을 흉보는 이야기만 하고, 듣습니다. 교회에 사랑을 실천하러 간다하면서 미움과 증오와 혐오만 행하고 옵니다. 이러한 가식으로 뒤덮인 우리의 자아가 바로 병든 자,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자인 것입니다.

3. 악행과 죄를 먹구름처럼, 뜬구름처럼 흩어버리고 날려 보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러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 그렇습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이 죄인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이전의 죄의 습성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 최고의 문화신학자인 폴 틸리히(P. Tillich)는 새로운 존재를, ‘인간 실존’에 관한 질문의 답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현된 존재’로 봅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우리 인간의 실존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작심삼일은 새로운 존재의 지평에서 보면,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기본적 실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새로운 존재인 우리들 앞에 펼쳐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사야가 잘 말해 줍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20)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어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바꿔주시겠다는 말씀이죠? 그리고 그 희망의 물을 마시게 한다고 합니다. 생수의 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존재가 행하는 새 일이 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찬송과 기도입니다. 이사야 말씀을 좀 더 볼까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 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1-23)

<우리의 악행과 죄를 먹구름처럼, 뜬구름처럼 흩어버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하늘도, 산들도 숲과 그 가운데 나무들도 소리 내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빽빽한 구름(먹구름)같이, 우리의 죄를 안개(뜬구름)같이 없게 만드신 하나님, 공동번역은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내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죠?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4. 기도하고 찬송하매

그러한 구체적인 모습이 사도행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였습니다. 바울은 기도합니다. 찬송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믿는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이 옥문을 열고 매인 사슬을 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찬송은 이러한 물질적 변화에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을 계속 보겠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 16:27-30)

그렇습니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능력이 전파됩니다. 바울은 그 간수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행 16:31-32)”였습니다. 그리고 그 간수와 간수의 집이 구원을 받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 16:33-34)

5.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자, 다시 질문해 봅시다.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삶은 도대체 어떠해야 합니까? 새로운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서 서두에 말씀 드린 대로, 언제나 ‘의인이면서 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로지 최종적인 종말에,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성화의 과정이 완성되고, 죄성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될 때 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마태의 집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 9:14)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물론 이 말씀은 금식에 관한 논쟁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자신을 낮아지게 하는 행위입니다. 음식을 금함으로 육신에 고통을 주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모습을 자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의지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와 같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축제를 즐기셨습니다(요 2:7-10).

그러나 신랑 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때는 금식할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된 금식’과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남을 비난하는 그 낡은 가죽 부대와도 같은 바리새인들에게,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낡은 가죽 부대가 찢어져 새 포도주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둘 다 보전됩니다. 우리 교회가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둘 다 보전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성품을 배우려고 교회 생활하는 것이지,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비방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교인 모두가 새 것, 곧 좋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 가죽부대와 새 가죽부대>

작심삼일, 혹은 작심일일이어도 좋습니다. 계획은 늘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은, 오늘도 우리가 나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을 닮으려는 참된 신앙의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낡은 포도주를 마음에 담고 계신가요? 빨리 털어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라는 새 가죽 부대가 찢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으십시오.

서두에 B, C, D, E를 말씀드렸죠? 인생의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Choice)을 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올바른 선택은 그리스도(Christ)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시어 여러분들의 인생의 결과(End)가 행복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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