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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두려운가요

기사승인 2020.01.19  17: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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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가르침?(마가복음 1:25-27)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찬송가에 보면 ‘분투와 승리’라고 분류된 찬송들이 있습니다. 새찬송가에서는 346장에서 360장의 찬송입니다. 찬송 가사는 대부분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마귀와의 싸움에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셨고, 공생애 기간에는 귀신들을 꾸짖어 쫓아내셨습니다.

마귀와의 싸움, 사탄과의 싸움은 기독교인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사탄과 싸운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만화를 연상할 뿐 우리 삶에 직접 연결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저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첫 활동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려고 하는지,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삶을 가르치려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말씀과 귀신 축출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처음으로 하신 일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일입니다. 이들 외에 누구를 더 제자로 부르셨는지, 우선은 이 네 사람과 함께 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몇 명의 제자를 이끌고 가버나움 지역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지만, 예수님께서도 초기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 이후에 어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 나누신 장면이 나타나는데,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이런 식으로 말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신앙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나 이런 가르침의 대화에 낄 수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Jesus drives out a demon or unclean spirit」(15th-century) in Très Riches Heures ©Wikipedia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교훈’이라고 번역된 말은 ‘가르침’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 뒤에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권위 있는 자와 같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굳이 헬라어 원문을 해석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권위 있는 자’가 누군지 마가복음에 전혀 암시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을 어떤 특정인에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원문은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로도 번역이 가능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마가복음은 서기관은 살짝 무시하는 언급도 넣습니다.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셨다’, 즉 서기관들이 전하는 말씀들은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회당에 나타나 소리를 지릅니다. 그가 나타나 예수님께 “왜 우리를 괴롭히냐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리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귀신이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소리 지르며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을 본 사람들은 또다시 놀라서 말합니다. 이는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앞서 22절에서 언급되었던 ‘권위’와 ‘가르침’이 다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일’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로 나눌 수도 있지만, ‘권위’와 ‘가르침’이라는 두 단어로 연결된 한 단락의 이야기입니다.

즉, 마가복음 1장 21-28절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과는 다르게 권위가 있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전달된 새로운 가르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왜 귀신을 쫓아내신 이적 또는 능력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표현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 퇴마 또는 구마 행위는 치유 행위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기에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사람들은 마가복음 2장 12절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와 같이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라는 반응을 보여야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귀신 축출 이적을 보면서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이 생각한 귀신은?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귀신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귀신, 마귀, 사탄 등은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보다 높거나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는 전혀 없습니다.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시험하는 장면만 보더라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시대, 구약성경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스라엘에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고, 수많은 제국과 국가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면서 묵시문학이라는 장르가 생겨나면서 마귀, 사탄, 귀신에 대한 이해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적하는 원수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존재가 마귀, 사탄, 귀신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이야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존재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 이제 하나님에 맞닿을 정도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할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면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 수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의 힘이 하나님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귀신은 수로 밀어붙이는 형상이 됩니다. 마귀 사탄이 세력을 갖추었다는 사상이 생겨나면서 하나님 편에도 세력이 생겨납니다. 마귀 사탄과 상대하는 선한 천사들, 미카엘, 라파엘과 같은 천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귀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처녀귀신, 달걀귀신 같은 귀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양 판타지에 나오는 악마와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시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신에게 대적하려는 악마, 마왕 이런 이미지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귀, 사탄, 귀신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점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사탄의 세력 중 일부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찬송가 388장, 새찬송가 348장의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라는 찬송 가사가 괜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하나님이 선이라면, 마귀는 악이고 선과 악은 대립한다는 개념 속에서 우리가 선한 편에 섰으면 마귀 사탄과 대립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런 찬송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찬송은 어쩌면 지금의 시대 감각에는 조금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새로운 가르침인가?

당시 귀신이 어떤 존재로 인식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말한 이유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대적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흔드는 존재이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앞서 마귀 사탄의 대항하는 존재로 천사를 말씀드렸는데, 천사와 같은 능력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 중에 고결하다고 여겨지는 랍비 몇몇 정도만이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도 감명 깊게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던 ‘사막의 안토니우스’를 읽어보면, 안토니우스가 오랜 수도 생활을 한 후에 귀신을 이겨내는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사해 두루마리에 따르면 에세네파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서 전했다고 합니다.

귀신은 맞서 싸울 힘을 키운 사람이, 자신도 다칠 각오를 하고 열심히 대적하여 이겼을 때, 비로소 쫓아낼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나가라’ 한다고 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귀신을 내쫓는 행위는 일종의 전투였습니다. 당시의 많은 기록에 따르면 이는 영적 전투를 넘어서 실제 물리적인 상처를 입히는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명령하셔서 나가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랐던 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다는 점입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나님의 사람이 귀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새로움이었고 놀라움이었습니다. 귀신은 대적이기 때문에 맞서 싸울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는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반대로 마가복음 3장에 나타난 서기관들은 사람이 결코 귀신에게 명령할 수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렸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가르침입니까? 우리가 모르던 사실입니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은 몰랐던 새로운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만이 가장 높은 곳에 계시며, 세상 모든 것들을 다스리신다고 전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45장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일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만든 왜곡

당시에 귀신들렸다는 현상이 어떤 현상인지 저는 본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시대의 심리학자 같은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을 귀신들렸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귀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단지 정신병 증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묵시문학의 경우에는 자신들을 핍박하는 거대한 세력, 제국에 대한 반발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순히 정신이상자를 마귀 사탄에 들렸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기록에 따르면 귀신은 여러 사람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 수가 많다고 말합니다. 즉 악한 세력, 자신들을 괴롭히는 악한 세력은 너무나 크고 많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만 그중에 정신이상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도 자신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고통을 주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향해 귀신들렸다고 말하거나 귀신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귀신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어떻게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귀신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가진 두려움은 하나님조차도 이를 쉽게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까지도 만들어냅니다. 이 땅에 악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도 쉽사리 그들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악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시대에도 이는 비슷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항상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잘못된 감정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 두려움이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낸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근본에는 잃어버림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건강, 재산, 명예, 지위 등을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나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출된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대비와 자기개발에 더 힘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될 경우에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귀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세상의 악이라는 우리의 대적을 만듭니다. 어떤 악한 존재가 나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간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맞서 싸울 능력을 키우고, 힘을 갖춘 다음 그들과 대적하여서 싸움에서 이기면 우리는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들, 우리가 세상의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발아래에 있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대상을 잘못 지정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두려움의 대상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귀신 축출 사건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지만 여전히 과거 유대인들이 가졌던 생각을 이어받습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세력과 항상 대적하여서 이겨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말씀대로 그저 행하셨을 뿐이라는 점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신약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과 똑같은 방식의 잘못된 신앙만을 유지합니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말하던 서기관과 같은 방식을 고수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말씀을 신중히 읽으신 분들은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표현이 역설적인 표현이었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모든 만물,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아래에 있음을 다시 보여주신 것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여기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도 환난도 다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환난과 고통은 시험일 뿐이다. 이 시험을 이겨내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귀신의 세력과의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을 이겨낸다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구약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생각이라고 봅니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 생각을 갖길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도 악도, 평안도 환난도 주관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사야는 8장 13절에서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우리가 두려워할 존재는 오직 선한 이를 구원하시고 악한 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말씀을 덧붙여서 말하자면, 선한 사람에게 세상에서 복을 내리시고, 훗날 천국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악한 사람에게 세상에서 벌을 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막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운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이실 뿐입니다.

요즘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많은 권력자가 있습니다. 또 목회자의 탈을 쓴 사기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 우리를 선동합니다. 우리의 대적이 있다고, 우리는 선한 편이고 악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모두 쳐 죽여야 우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온다고 말합니다. 목회자의 탈을 쓴 사기꾼들은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상의 악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악한 세력이 있기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세력이 있다고 말하는 자체가 자신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거짓된 자들의 선동에 의해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며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우리가 악을 행했을 때, 당신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복과 은혜를 내려주시는 영광 받으실 존재가 되십니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셔서 하나님을 영광 받으실 분, 감사와 찬송 받으실 분으로 만드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전파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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