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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교회 다시 찾기

기사승인 2020.01.18  17: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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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교회주의가 한국교회의 희망인가? 자유라는 사회질서가 보여주는 괴물 (2)

우리는 평신도의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집사·권사·목사·장로와 같은 위계를 나누고자 한 것이 아닌데, 이미 위계로서 나눠져 있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파헤쳐나가야 하는지, 지금까지도 많은 고민이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교육이라는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을 사용해야한다.

평신도의 위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목사·집사·선지자 등의 위치가 위계를 나눠 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다.(1) 다시 묻겠다. 정말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위치와 지위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 그 위치에서 정말로 열심히 섬기고 일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부분이다. 교회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다.

이광수씨가 말한 “유대의 위계가 지닌 독재가 교회로 넘어간 느낌이라는 것”(2)을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평신도라는 것이 아닌 집사와 권사, 장로라는 호칭을 통해 그 위계를 나누고 권위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을 보는 어린 사람들은, 또는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세상과 다를 게 없는 교회를 보고 무엇을 믿으려고 다니는지 알 수 없어질 것이다.

앞서 한스 큉이 말한 바 있다. 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믿으려고 하는 것이 바뀌어버린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위치는 하나같이 똑같은데, 지위라는 것이 없는데, 그 지위를 위해서 싸우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3)

우리는 다시금 그 위치를 생각해야한다. Way church는 “에베소서4장 11절에 나오는 다섯 가지 다양한 소명자들에 대해, 서로 누가 높거나 낮지 않다. 모두 소명자들이며 한 몸을 이룬 다양한 지체들이다. 다만 모두의 머리가 예수님으로 같을 뿐이다.”(4)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위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J. Kirk Richards, 「Greatest in the Kingdom」

이태원에 있는 Way church는 전도사님이 담임을 하고 있고 목사님이 부사역자라고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위계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고는 담임 부담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한 사람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신도와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위계는 필요없고 모두 평등한 존재라고,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말한다. 기독교가 답을 말해준다고, 평등의 논리로 말이다.”(5)

하지만 나는 지금의 교회(기독교)는 전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교회의 권력을 거부하고 지금의 형태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6)면, 지금의 이러한 평신도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 사회에 무교회가 답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사회와 문화 속에 진정으로 무교회가 답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앞서 말했듯이 무교회에는 단점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서당과 같은 형식의 교회라면 더더욱 지금의 상황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해보자. 굳이 교회라는 형태의 구조가 필요한 것인가? 교리에 ‘건물이 있어야 교회로 인정을 하는 비성경적인 이야기를 우리가 들을 필요가 있는가?’(7)라는 말이다.

성경은 건물이 있어야 교회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에클레시아였다. 이는 공동체다. 단지 집에서 모이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김교신이 말하는 무교회도 그렇다. 그는 교회의 형태를 없애고자 했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당파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눠지고 보수냐 진보냐 나눠져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무교회주의 였던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교회라는 것은 금전적인 것 이외에도 학문적인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강해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빨리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우선시 해야 하는 부분이다. 지금의 문화와 사회는 소수에 대한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김교신은 이것이 저항하라고 한다. 이것(무교회)이야 말로 진정으로 지금 필요한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대형교회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을 해야 한다.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단체인가 생각했을 때, 단언컨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덩치만 키우기를 원하고 지금 그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교인들이 떠나는 것이다. 많은 대형교회의 사건과 사고를 보고 욕을 먹는 것은 대형교회이기도 하지만 그냥 교회를 다니는 일반 평신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냥 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단의 눈치를 보고 권력 있는 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지금 무교회주의가 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있는 사람이 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현 상황을 우리는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놓지 말아야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닐까?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이 답이라고 외치던 위클리프처럼, 룰라드처럼 성경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명분 하에 우리는 무교회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것이 정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알고 파헤쳐야 한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 대형교회를 말하고 있지 않다.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무교회주의, 교회주의 이런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이고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닐까?

자유라는 말에 속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있는 국민의 일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기회를 받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라고 하는 달콤한 말에 속아서 그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많은 권력자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를 핑계로 착취를 당하는 것이 있지 않는가?(에히리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의 자유라는 명분 하에 폭력을 가하고 있지 않는가?(레프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이 정당화되기 위해 우리에게 희생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다카하시 데츠야, 『국가와 희생』) 우리는 언제나 자유의 이면에 공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유라면, 정말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인지.

종교의 자유, 종교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있다. 자, 종교로부터 우리는 자유한가? 때론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가해지는 것은 못 느끼는가?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너무나도 당연히 자신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사회는, 교회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이 가져다주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일부였다. ‘교회가 권위 시 되면서부터 오염되어 갔다.’(8) 위로 올라가려는 교회는 주변의 자양분을 빨아 먹어야만 했다. 주변은 괴물(교회 권력)에게 자양분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은 커지고 더 큰 괴물이 되었을 때 주변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위치를 같이 하는 것에 대한 위계가 성립이 된 것이다.

자유를 주겠다고 한 그들은 자양분이 된 그들을 다시금 지배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은 참지 못해 종교를 포기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주변 어느 기업이든 사회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자양분이 된 사람이 멍청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도 무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괴물에 대해 욕하는 것도 무지한 사람이다. 서로 쿵짝이 맞았기에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커져서는 안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가 커지게 되면 태풍을 만든다. 이는 자신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를 전체를 파괴하기 시작한다.(9) 이것이 제일 무서운 괴물이 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한다. 자유라는 것을 잘못 이해했을 때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자유인 것이고, 자유라는 것을 이용해 사람을 이용한다면 괴물이 되어서 주변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라고 하는데, 그 권리를 나라가 준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한다.(10)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자유인인 것이다.(11) 자신이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알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 교회가 아닐까?

교회를 다시 찾기

우리는 우리가 잊어버린 교회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지금의 교회들이 이것이 교회다(중세적 교회론)라고 거짓말 하는 교회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교회를 다시 찾아야한다. 교회라는 것은 한 개인이고 공동체가 교회이다.

(1) 신앙인 개인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표현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신앙고백을 존중하는 공동체 (2) 어떤 형태의 에클레시아든지 간에 철저하고 지속적인 서서 공부가 그 중심 축이 되어야한다.(오직 성경) (3) 교회가 살아 있는 신앙을 일정한 형태의 제도 속에 묶어넣으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해야한다. (4) 세상 질서를 초월하는 이들의 신앙은 동시에 세상 참여적입니다. (5) 교회가 부여하는 타이틀을 거부하다 보니 원칙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사귐(egalitarian koinonia)을 지향합니다. (6) 모든 에클레시아는 각자 특수한 제자리가 있다고 보는데, 따라서 한국적 에클레시아는 한국의 종교, 사회, 문화 전v을 소화하고 그 내용을 담아내는 기독교 공동체여야 한다.(12)

우리는 종교개혁 때 외친 세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교회는 침묵을 원하고 있다. 공동체성을 위해 침묵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시기에도 있었다. 가톨릭의 침묵이었다.

지금의 교회도 그렇다. 침묵을 원한다. 항상 침묵하고 저항을 거부하고 제도 속에 성도들을 가두고서 이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회들이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우리들의 교회이신 예수를 찾기 위해서 저항하고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롤러드들의 성경을 알기 위해 번역하고 외우고 외쳤던 그들처럼 우리도 교회를 알기 위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배우고 외워야 한다.

춘원 말했던 “성직자들의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공부하고 연구를 해야 한다.”(13) 못 배운 것은 용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배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무지하다는 것은 용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찾기 위해 침묵보다는 저항을 해야 하며, 교리 속에서 나와 평등한 교회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현대교회를 향한 도전

현대의 많은 교회들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고 입막음을 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침묵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교회의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침묵이 정답이 아닌 저항의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교회의 의미를 다시 찾으라는 것이다.

(1) 신앙인 개인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표현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신앙고백을 존중하는 공동체 (2) 어떤 형태의 에클레시아든지 간에 철저하고 지속적인 서서 공부가 그 중심 축이 되어야한다.(오직 성경) (3) 교회가 살아 있는 신앙을 일정한 형태의 제도 속에 묶어넣으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해야한다. (4) 세상 질서를 초월하는 이들의 신앙은 동시에 세상 참여적입니다. (5) 교회가 부여하는 타이틀을 거부하다 보니 원칙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사귐(egalitarian koinonia)을 지향합니다. (6) 모든 에클레시아는 각자 특수한 제자리가 있다고 보는데, 따라서 한국적 에클레시아는 한국의 종교, 사회, 문화 전v을 소화하고 그 내용을 담아내는 기독교 공동체여야 한다.(14)

웨이처치가 말하고 있는 교회론에 대해서, 교회와 선교가 따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자화하는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물보다 크신 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15)  또한 초대교회로 돌아가 모여야 하는 6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예수님 때문이다. 모임을 명령하시고 떠남을 약속하셨다. 둘째, 교회를 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항상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제자화가 시작된다. 제자화를 진행하다보면 모임이 생긴다. 이는 특정한 날(주일)이나 장소(교회)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셋째, 개인적 소명이 공동체의 소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성장이다. 성경은 동반성장을 말한다.(엡 2:20~22) 다섯 번째, 예배 때문이다.(히브리서 2:11~12) 여섯 번째, 모임이 서로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는 죄의 유혹에 더 쉽게 굴복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죄와 싸워 이기는 일을 함께 수행하게 된다.(16)

이러한 교회를 만들었을 때 비로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고, 더 이상의 천국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무교회가 답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답을 찾는 것은 평신도이고 그들은 성직자이며 집사이며 장로이며 권사이다. 이들은 위계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요. 교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나눠 놓은 직책이다. 위계를 나눈다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는 지금의 교회에 대한 저항이요. 지금의 교회에 대한 도전이다.

미주

(미주 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캐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장11~12절, 『등불성경』(로뎀서원)
(미주 2) 백소영,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73.
(미주 3) 송준기, 『끝까지 가라』(서울: 규장, 2018), 171~174.
(미주 4) 송준기, 171.
(미주 5) 레프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조윤정 옮김(서울: 달팽이출판사, 2008), 155~172.
(미주 6) 송준기, 174~183.
(미주 7) 앨런 허쉬 박사의 “초대교회 200년의 상황”, 16-23을 보면 지금의 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앞서 나온 볼프스강 짐존의 중세적 교회론에 대한 것을 보면 비성경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미주 8) 송준기, 끝까지 가라(규장), 35~36.
(미주 9) 장 라세르, 『기독교인과 폭력』, 이봉석 옮김(서울: 늘봄, 2017), 127~132를 보면 국가에 대해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이 국가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제도로 우상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해 특별한 계급이나 권력의 손안에 있는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미주 10) 레프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15. 국가라 불리는 인위적인 연합체를 위해 삶과 자유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삶과 자유를 위해 국가라는 미신에서 그리고 그 소산-범죄라고할 만한, 인간에 대한 복종-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와 권력기관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면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미주 11) 레프 톨스토이, 188. 모든 사람이 공통된 목적에 헌신하고 이런 식으로 커다란 전체를 이룬다면 만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191.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깨달은 양심의 목소리다.
(미주 12) 백소영, 23~33.
(미주 13) 백소영, 73.
(미주 14) 백소영, 23~33.
(미주 15) 송준기, 71.
(미주 16) 송준기, 215~217.

이왕용(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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